133화
릴리는 고개를 숙여 제 입가에 닿은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겨우 입술을 적실 만한 적은 양이었다. 꿀꺽 그녀의 목울대를 타고 액체가 넘어가는 것을 보고 그는 다시 물었다.
“왜 그랬어. 왜… 어째서 구스와 고프리를….”
어째서 그들을 꺼내 주었어? 어째서 내 적들을 그렇게 쉽게 풀어 주었어? 기어이 내가 죽여 없애려 한 것들을 네 손으로 꼭 그렇게 놓아줘야만 했어? 그것이 왜 하필 너여야만 하는데? 너는 내 편이잖아. 이 세상 모두가 내게 등을 돌려도 너만은, 너만은 내 곁에 있어야 하잖아. 너는 내 거잖아. 이 세상에 딱 하나뿐인 내 것이잖아.
릴리는 몇 번 입술을 뻐끔거렸다.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느라 쌕쌕, 파열음이 났다. 그녀는 간신히 말했다.
“…코르넬리오 부인이 살아 있대요.”
“…….”
“살아서… 살아서… 함께 있다고….”
“…테이먼 테르조의 진영에 말이야?”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카르낙은 복부가 뚫려 피를 쏟아 내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해 냈다. 그녀가 피를 토하며 꼬꾸라져 일어나지 못하는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계집이 살아 있다고? 살아서 제 아비에게, 테이먼 테르조의 진영에 합류했단 말인가?
그 질긴 생명 줄. 결국… 테이먼 테르조는 코르넬리오의 장자를, 장차 멀루아를 지배할 핏줄을 쥐었다. 그것도 가만히 앉아서. 파니릴리가 그것을 그에게 갖다 바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기어이 릴리, 네가. 네가 내게 반역을 저질렀다. 그리고 기어이, 너는 알고 만 것이다. 그토록 감추고 싶었던 것. 너에겐 죽어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내 추악한 모습을 너는 보고 만 것이다.
“네 탓에 난 간신히 손에 넣은 멀루아 땅을 잃게 생겼어.”
“…….”
“넌 나를 배신한 거야. 너는… 결국 반역을 저질렀어. 네 남편에게. 너의 왕에게.”
“…그러니 폐하, 절 죽이세요.”
릴리는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지금껏 그랬듯 본을 보이세요. 가장 잔인한 형벌을 제게 주세요.”
“…알잖아….”
카르낙은 어금니를 물고 중얼거렸다.
“…내가 그러지 못할 거라는 거… 알잖아. 내가 너에게….”
“…….”
“내가 널 어쩌지 못할 거라는 거…. 내가 널 죽일 수 없다는 거…. 내가… 내가 너를 해칠 수 없다는 거! 너도 알고 있잖아! 이미 다 알잖아!”
독백에 가까웠던 중얼거림은 비명을 지르는 듯한 고함으로 변했다. 그는 속을 게워 내듯 악을쓰고 몸을 떨며 밭은 호흡을 내뱉었다. 커다란 어깨가 외부로부터 저를 보호하려는 듯 안으로 굽었다.
“그까짓, 그까짓 놈들 때문에.”
그런 간사하고 하찮은 간신배 때문에, 그깟, 그깟 어리고 철모르는 어린애 때문에, 그까짓 것들 때문에 내가 널 어떻게 죽여. 그까짓 반역죄. 그까짓 거. 그것으로 내가 너를 어떻게 죽이냔 말이야. 내가 너를… 내 손으로 너를 대체 어떻게 벌할 수 있겠어.
“제가 저지른 일, 용서받을 수 없다는 거 알아요. 그런 것은 각오했어요. 그러니….”
“무엇을 용서하고 안 할지는 내가 정해! 내가! 네가 아니라 내가 정한단 말이야! 빌어먹을!”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포도주 잔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러고는 제 두 손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쥐어뜯듯 그는 제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바르르 떨었다. 섬세히 세공된 은잔이 파열음을 내며 바닥을 굴렀고, 언뜻 그가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내가 짐승처럼 보이겠지.”
“…….”
릴리는 부정하지 않았다.
“너 같은 사람에게… 내가 저지른 일들은….”
그래. 이해할 수 없겠지. 받아들일 수도 없겠지.
“나도 알아. 내가 추악하다는 거, 잔인하다는 거. 내가… 내가 미치광이라는 거…. 내가… 내가 너에게 그다지 훌륭한 남편이 아니라는 거, 네가 섬길 만한 왕이 아니라는 거….”
그러나 거짓이라도 좋았다. 스스럼없이 다가와 오직 나만이 너의 희망이라 말하던 때가. 원하는 것은 오직 나의 신뢰와 사랑뿐이라고 말하던 네가. 아무 조건 없이, 아무 이유 없이 네가 내게 보여 주었던 믿음과 헌신이. 평생 가져 보지 못한 사랑과 애정이. 그것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이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성군을 흉내 내어 자비를 베풀고 한없이 용서하는 깊고 단단한 남자가 되고 싶었다. 오직 너를 위해. 네 사랑을 얻기 위해. 너의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 그것을 위해서라면 좋은 왕을 흉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네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주길 바랐다. 한없이 나약하고 초라한 투로를. 삶이 엉망진창이 돼 버리고, 모든 게 망가져 버린 가엾은 벌레를.
그래서인 거다. 이런 결과를 얻은 것은. 네가 절대로 사랑할 수 없는 이를 사랑하라고 종용한 탓이다. 너를 속인 탓이야. 너를 욕심 낸 나의 잘못이다.
“그래도 너는 나를 떠날 수 없어. 평생”
“난 반역자예요. 폐하의 믿음을 저버렸어요. 함께 있으면 고통뿐일 거예요.”
“그래서야.”
“…무엇이요?”
“그것이 바로 내가 네게 내린 형벌이다, 파니릴리. 죽을 때까지 나를 견디며 그 죗값을 다해.”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녀에게조차 기어이 폭군이 되어도 상관하지 않겠다. 미친 왕이자 미친 사내로 낙인이 찍혀 평생 그녀의 증오를 먹으며 살아간다 해도 그것이 파니릴리가 없는 인생보다 나았다. 어떻게든 그녀의 삶에 자신을, 또 자신의 삶에 그녀를 욱여넣을 수만 있다면 그녀가 제 무덤 위에 침을 뱉고, 그 위에서 춤을 춘다 하여도 기껍게 따를 수 있었다.
“왕비로서,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해라. 설령 역겹더라도 언제든 내가 원하면 너는 네 침대를 데워 놓고, 내 씨를 배 아이를 생산해. 그리고 그 아이가 커서 또 아이를 낳고, 또 아이를 낳을 때까지…. 너는 죽어서도 그라타로 돌아가지 못할 거다. 너의 시체는 내 옆에 나란히 묻히게 될 테니까.”
거짓말. 거짓말이야, 릴리. 난 언제나 내가 죽은 후 자유로워진 너를 떠올린다. 그라타로 향하는 네 기쁘고 가벼운 발걸음을 생각한다. 너의 환한 미소를 상상한다. 그 아름다운 미소 뒤에 내가 있길 열렬하게 바라 왔다.
나를 떠올릴 때도 그와 같이 아름답게 웃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안 돼. 그것은 영영 이루어지지 않을 꿈과 같다. 행복하지 못하다면 차라리 불행해졌으면 좋겠어. 그렇게 영영 네게 박혀 지울 수 없는 상처로라도 남고 싶다.
“시종에게 네가 먹을 포도주와 음식을 내오라고 하지. 너는 내가 보는 앞에서만 먹고, 마시고, 또한 쉴 수 있을 거야.”
“…….”
릴리는 그의 말에 별다른 대꾸도, 별다른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진즉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카르낙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아마 구스와 고프리를 탈출시키고 난 후 그녀는 자신의 영혼을 제 손으로 절멸시켰으리라. 파니릴리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카르낙이 침실 휘장을 걷고 나갔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은색 쟁반에 소박히 차려진 음식이 들어왔다. 작은 간이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을 잠시간 바라보던 카르낙은 그 위에 촛불 하나를 올렸다.
“핀이 사슴 한 마리를 잡아 왔더군. 아무 말 없이 내미는 꼬락서니가 날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 가져온 것 같았어.”
카르낙은 모닥불에 바짝 구운 고깃덩어리 하나를 잘게 찢어 그녀의 면부 앞에 내밀었다.
“자.”
“…….”
“먹어. 며칠째 굶고 있는지 본인은 잘 모르겠지만 이미 굶을 만큼 굶었어.”
“…배 안 고파요.”
“먹어.”
“먹고 싶지 않아요. 입맛도 없고요.”
“네 입맛이 어떻든 관심 없어. 아사할 작정이라면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본디 식탐이 없었다. 적당히 배고픔만 면하면 그만이었다. 지금은 먹고 싶다는 의지도 없었다. 속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을 본인도 자각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식욕이 없었다. 이대로도 나쁘지 않았다. 아무런 파동 없이 지금 그대로 유지하고 싶었다. 안으로 천천히 천천히 끝없이 침잠하고만 싶었다.
카르낙은 돌처럼 딱딱한 밀빵을 엄지손톱만 하게 뜯어 포도주에 적셨다. 그러고는 다시 내밀었다.
“여긴 네 입맛을 돋우어 줄 만한 음식이 없어. 네가 울퍼의 창고를 모조리 턴 덕에 일행들을 먹일 음식도 빠듯해.”
“…그렇다면 내 몫은 허기진 군인에게 주세요. 내 몫으로 남겨진 고기도 모두 그들에게 주세요.”
카르낙은 그녀의 입가에 내밀었던 빵 조각을 갈무리하여 제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마치 보란 듯 몇 덩어리를 더 찢어 입안에 넣고 씹더니 이내 포도주도 가득 들이켰다.
도발하려는 제스처임은 안다. 그러나 그다지 동하지 않았다. 릴리는 멍하게 그를 바라보며 희미한 촛불에도 흐려지지 않는 영롱한 눈동자를 가졌노라 생각했다.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어떻게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며 무거워진 눈꺼풀을 내리려 할 때, 우악스러운 손길이 제 턱을 움켜쥐었다. 그 악력에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사위가 어둠에 잠겨 버렸고, 벌어진 입 안으로 무언가가 쏟아졌다. 릴리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그것을 밀어내려 했지만 제 발목과 이어진 가죽끈이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도리질을 치려 했으나 그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흘러들어 온 포도주가 턱 숨통을 막았다. 카르낙의 혀는 집요하게 그녀의 입 안으로 음식물을 밀어 넣었다. 하는 수 없었다. 눈을 질끈 감고 그녀는 그것을 꿀꺽 삼켰다.
콜록, 하고 기침이 터졌다. 입가에 고여 있던 포도주와 음식물이 밖으로 튀어 나왔다. 그래도 카르낙은 입을 떼 내지 않았다. 여전히 턱을 움켜쥔 채 그녀의 입가를 핥아 흘러내린 것들을 다시 모조리 입 안으로 넣어 주었다. 그래도 안 되는 것들은 손가락으로 밀어 넣었다. 정말이지 집요한 움직임이었다. 어쩔 도리 없이 릴리는 제 입 안에 들어온 것들을 남김없이 삼켰다. 그래야만 이 불가항력적인 행위가 끝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 안이 텅 비고 나서도 카르낙은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든 먹이겠다는 집념은 금세 다른 욕구로 변질되어 있었다. 침착하던 그의 숨소리가 가빠진 것은 그때쯤이었을까, 아니면 릴리가 눈치채지 못한 어느 순간이었을까.
카르낙이 그녀의 입가와 입술을 핥고 빨며 맛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