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발 아래 은빛 눈-132화 (132/231)

132화

그 자리에서 당장 열어 보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사실이. 혹여나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것을 열어 보았다가 다시 주워 담지 못할 무언가를 발견한다면, 그렇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두렵기도 했다. 그리하여 카르낙은 잠시의 고민 끝에 비단 뭉치를 제 가슴팍에 집어넣었다. 왕이 별말 없이 걸음을 옮기자 핀이 참지 못하여 뒤따르며 물었다.

“안 열어 보십니까?”

“나중에.”

카르낙은 마차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이자 근위병 하나가 굳게 걸어 잠근 마차의 문을 열었다. 덩달아 감금 신세가 되어 버린 리쿠스가 비틀비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더니 양손이 묶여 거동이 불편한 파니릴리를 돕기 위해 몸을 돌렸다.

“왕비 전하, 천천히 일어나십시오. 머리가 부딪힐지 모르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제가 잡아 드리겠습니다.”

마침내 파니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슈미즈 위에 간신히 가운을 두른 경황없는 모습 그대로. 카르낙에 의해 생긴 푸른 멍을 목에 두르고 거윈에게서 시작된 핏자국을 묻힌 채.

창백한 피부, 생기 없이 그늘진 눈동자, 재갈 때문에 버석하게 마른 입술. 끊길 듯 나풀거리는 흐트러진 머리카락. 손끝과 새틴 실내화에 묻은 검댕까지. 여왕이라기보다 죄인에 가까운 차림새에도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근위병이 조심스레 그녀를 안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닥에 두 다리를 딛는 모습이 꼭 깃털 같았다. 디디는 동시에 양옆으로 조금씩 흔들리는 모습조차 그랬다.

성큼성큼 다가가 흔들리는 그녀를 가뿐히 품에 안아 아늑한 막사의 침대 위에 내려놓고 싶었다. 언제나와 같이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쓸어 주고 신발을 벗겨 발끝을 주물러 주고 싶었다.

네가 나를 배신하지 않았더라면. 네가 나를 저버리지 않았더라면, 릴리. 나는 기쁜 마음으로 네 발등에 입을 맞추었겠지. 그러나 그럴 수 없어서, 상황을 이렇게 만든 릴리가 원망스러워서 카르낙은 양손을 꼭 말아 쥐었다.

리쿠스가 조심스레 다가와 물었다. 왕의 심기를 거스를까 잔뜩 몸을 웅크린 채였다.

“…왕비 전하의 거처는….”

“언제나와 같지 않겠어?”

카르낙은 릴리에게 시선을 거두며 냉랭한 목소리로 답했다. 리쿠스는 왕이 멀어지기 전에 재빨리 하나를 더 물었다.

“저, 폐하. 왕비 전하께서 여태 물 한 모금 드시질 못하였는데 잠시라도 재갈을….”

“불허한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그러고는 곧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끊으려는 듯 빠르게 몸을 돌렸다. 리쿠스는 몹시도 난처한 얼굴로 왕의 비정한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어야만 했다.

***

막사 기둥에 묶어 놓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릴리는 질긴 소가죽을 덧대어 만든 튼튼한 간이 의자에 앉아 왕의 거대한 천막을 떠받들고 있는 기둥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방에 밝혀 둔 촛불의 그림자가 춤을 추듯 그 곁을 맴돌았다.

기운이 없는 탓인지 종종 시야가 흐릿해졌다 또렷해졌다 하였고, 종종 저도 모르게 선잠에 들었다가 깨는 것 역시 반복했다. 한기가 들어 오들오들 떠는 그녀를 보다 못해 병사 하나가 따듯한 양모 이불을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릴리는 그의 상냥함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감사를 표했다. 다정히 이름을 물어보고 직접 고맙다 말하고 싶었으나 재갈이 물려 있어 무리였다.

눈만 감으면 그라타가 보였다. 그곳이 간절하게 그리웠다.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엘버그에 와 처음이었다. 자신의 한 일의 무게를 알면서도 그것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그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왕의 막사는 공간이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사적으로 사용하는 간이 침실과 측근들이 드나들 수 있는 간이 서재. 오랫동안 주둔을 해야 할 곳이라면 아마 지금보다는 더 화려하고 넓게 차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길어도 반나절 이상 지내지 않을 곳이므로 작은 책상과 의자, 그 밑에 깔린 양탄자 정도가 서재의 전부였다.

카르낙이 멍하니 그곳에 앉아 있자 시종이 포도주가 가득 담긴 잔 하나를 조용히 내려놓고 막사를 나갔다. 그는 찰랑거리는 탁한 액체를 바라보다 제 가슴팍을 더듬어 비단 뭉치를 꺼냈다. 그러고는 다시 또 한참, 윤기 나는 천 뭉치를 멍하게 바라만 보았다.

그 어떤 전언도 없이, 서신도 없이 도착한 작고 은밀한 물건. 누가 보낸 것일까. 에이가가 자신을 건너뛰고 아무런 서신도 없이 릴리에게만 은밀히 전해야 할 물건이란 없을 것이다. 하게너 성에서 요양 중인 로로가 보냈을 리도 만무하다. 마음에 집히는 것은 사실, 딱 하나였다.

세바스탠. 그자가 보낸 것일까. 그자가 릴리에 대한 어떤 증표를 이곳에 넣어 보낸 것은 아닐까. 단단한 감촉은 분명 금속이나 유리 따위의 것이었다. 설마 벌써 정을 통한 것은 아닐까. 둘만의 은밀한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닐까.

설마 이것이 내가 더는 릴리에게 다가갈 수 없게 만들면 어쩌지. 내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면 어쩌지. 내가 미쳐 버리고야 말 무엇이면 어쩌지. 간신히 붙잡고 있는 그녀에게로의 끈이 완전히 잘려 나가게 될까 몹시도 두려웠다.

파니릴리. 그 여자에 의해 제 안에 무너진 것들이 얼마던가. 그녀를 위해 밀어내 버린 자신만의 신념과 원칙은 헤아려 볼 수도 없이 많다. 내겐 너뿐이야, 릴리. 도저히 너를 사랑하지 않을 방법도 자신도 없어. 그러니 제발 나를 벼랑 끝으로 몰지 마, 제발.

그는 떨리는 손끝으로 천 주머니의 노끈을 풀고 내용물을 바닥으로 쏟았다. 투르르르르, 투박한 것이 테이블 위에 마찰하여 반원을 그리며 굴렀다. 카르낙은 눈을 가늘게 뜨고 동그란 것을 들어 보았다.

반지였다. 카르낙은 그것을 기억했다. 혼인 전, 리오의 길드장과 디셋 사제의 역모를 알리며 자신에게 건넸던 것. 알기어스 왕의 인장이었다. 카르낙은 그날, 자신의 아내를 완전히 믿기로 맹세했다.

아니, 확신했다. 파니릴리는 이제 자신의 것이라고.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을 배반하지 않을, 오직 자신만을 위한 여자라고. 그래서 이 반지를 다시 그녀의 손에 쥐어 주었다. 내가 너를 믿는다는, 더 이상 너는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나의 적이 아니라는 신의와 감사의 증표였다

그때 온전히 자신의 마음을 그녀에게 주었다. 남김없이 모두 그 인장 안에 쏟아부어 그녀의 손에 들려 주었다. 그 후로 이 반지에 대해 떠올린 일이 없다. 릴리가 이 반지를 어디에 두었는지 그것으로 무엇을 했을지 궁금해한 일도 없었다. 이것은 온전히 파니릴리 알기어스의 것이었으므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제 아비와 자신의 핏줄에 대한 작은 위안거리로 삼더라도 좋았다. 그것으로 그녀에게 위로가 된다면 차라리 기쁠 것 같았다.

그것이 다시 돌아왔다. 대장간에서 세바스탠과 은밀한 이야기를 주고받던 그녀의 모습을 기억해 냈다. 질투심에 팔팔 끓어 놈의 멱을 따고 싶기까지 했던 자신의 감정도 지금껏 생생하다.

알기어스의 문양을 뱀처럼 감은 벌레. 꼭 지네와 닮은 까만 투로 하나가 그 위의 알기어스를 덮고 있었다. 이것은 발투만의 새로운 문장이었다. 알기어스를 지배하여 그 위에 서 있다는 의미였다.

카르낙 발투만의 신의 위에 자신의 헌신을 덧입혀 혹은 아내로써의 책임과 의무를 덧입혀, 그것도 아니라면 카르낙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덧입혀 릴리는 새로운 문장을 만든 것이었다.

그것을 보고 있는데 두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져 그는 책상 위에 쿵, 하고 머리를 박았다.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설움이 복받쳤다.

멀루아에 당도하기 전, 혹은 울퍼의 목을 치기 전, 우리의 사이에 조금씩 금이 가기 전 네가 이것을 내게 건네주었다면. 아아, 릴리. 그랬다면 우리는 어땠을까. 나는 네 발밑에 엎드려 네 피부의 조각조각, 너의 뼈마디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었겠지.

나는 세상에 더없이 충만한 사내가 되었을 거야. 네가 나를 얼마나 기쁘게 하였는지 그것을 종일 설명하느라 너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겠지. 나는 네게 좀 더, 좀 더 좋은 남편이 되었을 거야. 너를 조금 덜 조바심 내었겠지. 그러면 어쩌면, 지금, 지금보단 더 나은 모습이었을 거야.

카르낙은 제 코끝을 한 번 훔치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쓸어 넘긴 후 찰랑거리는 와인 잔을 들고 침실로 향했다.

흔들리는 불빛 아래 마르고 여린 아내의 가느다란 실루엣이 보였다. 카르낙은 자작하게 타들어 가는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에 재갈을 물린 것도 그녀의 두 손에 거친 가죽끈을 둘둘 말아 놓은 것도 자신이었다. 그녀의 목이 시퍼렇게 멍들 만큼 살갗을 조인 것도, 그녀에게 소리를 지르며 발악을 한 것도, 며칠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게 한 것도 카르낙 발투만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자포자기하게 만든 것도. 그녀에게서 빛을 빼앗은 것도 분명 자신일 터였다.

카르낙은 그녀의 앞에 앉아 릴리의 입에서 재갈을 빼 주었다. 천 뭉치는 비쩍 말라 있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건조한 촉감이 그의 심장을 할퀴어 댔다. 그는 조심스레 그것을 그녀의 목덜미로 내리고 와인 잔을 입술에 대 주었다.

“…마셔.”

“…….”

릴리는 대답이 없었다. 멍하고 무기력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 카르낙의 콧등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그에 따라 입언저리가 같이 씰룩거렸다. 금방이라도 무엇인가가 비어져 나올 것 같은 표정이었다. 릴리는 왜 자신의 남편이 저토록 아픈 얼굴을 하고 있는지 의아했다. 자신을 향한 모든 속박과 처벌은 바로 그 스스로의 의지였으면서.

“마셔….”

처음, 사람들에게 파니릴리 왕비에게 물 한 모금도 건네지 말라 명령한 것은 그녀가 고통스럽기를 바라서가 아니었다. 그녀를 길들이고 싶어서였다. 짐승을 훈련하듯 그가 건네는 물, 그가 건네는 음식, 오로지 그만이 허락하는 자유를 누리게 하여 자신에게 복종하게 하고 싶었다.

어떻게 해도 그녀를 버릴 수 없으니, 아니, 그녀를 놓아줄 수 없으니 차라리 잔인하고 비정한 남자가 되어 그녀를 개처럼 길들이고 말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곁에 둘 수 있다면 그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은. 지금은 릴리….

울음이 비어져 나올 것 같아 카르낙은 중간중간 밭은 숨을 들이키며 내뱉었다.

“…널 용서하고 싶어.”

그런 후 네게 용서를 구하고 싶다. 내가 지금 너의 신의와 애정을 잃은 것이라면 어떻게 하면 그것을 다시 되돌릴 수 있겠느냐 구걸해 보고도 싶다.

“그러니… 마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