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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27화 (127/231)

127화

“날 위한답시고 바른말을 해 대는 것이 꼴 보기 싫어서야. 내게 목을 매달고 죽겠노라 협박하는 건 에이가 하나로 족해. 그 정도면 과하다 못해 넘치지.”

카르낙은 침대에 털썩 앉아 제 두 손을 비볐다.

“차라리 잠자리에서 날 유혹하는 건 어때? 네 몸놀림에 잠시 정신이 나가 네 부탁을 들어줄지도 모르잖아.”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고 하기도 싫었다. 몸을 무기로 남자를 유혹해 정신이 혼미할 때 답을 받아 내라고? 그렇게 하는 여자들도 분명 있겠지. 하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릴리는 카르낙의 대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이해해 주길 바랐다. 그녀의 의견에 공감하고 그 후 올바른 해답을 찾기를 원하는 것이다.

카르낙이 올바른 왕이길 바라는 것은 자신의 욕심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의 곁에 머물기 위해서라도 그런 믿음이 필요했다. 착각에서 비롯된 맹신이라도 좋았다. 부디 내 아비 같은 미친 왕은 되지 말아요. 사방에 피를 뿌리며 잔인하게 대륙을 멸망하게 하지는 말아요. 부디. 부디.

“제가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 건 저를 수련하기 위해서예요. 온전히 저를 위한 일이지 폐하를 어떻게 해 보려는 것이 아니에요.”

아내의 대답이 어처구니없었다. 카르낙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허무맹랑한 소리를 지껄이는군.”

“제가 살던 그라타에서는….”

“그놈의 그라타! 그라타! 고작 10여 년을 산 땅에 꿀이라도 묻어 놨어?!”

“…….”

릴리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으며 왕이 면부를 주시했다. 붉으락푸르락한 그의 낯빛이 가시를 부풀린 복어 같았다.

“그라타라면 아주 징글징글해.”

정말이지 진절머리가 난다. 매번 무슨 일 있을 때마다 아내가 그리운 듯 떠올리는 그 땅이 지긋지긋하게 싫었다. 대체 그곳이 뭐기에. 그토록 그리며 돌아가길 바라는가. 제 가족도 피붙이도 없는 이국의 땅인데.

파니릴리의 본래 고향은 바로 이곳 엘버그였다. 그녀는 엘버그에서 태어나 엘버그 땅에서 자랐다. 그것이 꼬박 10년 그리고 다시 돌아온 지 3년째가 되어 가니 따지고 보면 그라타보다 이 땅에서 지낸 시간이 더 많지 않은가. 그럼에도 그녀는 말끝마다 그라타를 들먹였다. 그러느라 제게 곁을 내주지 않는 것 같아 화가 났다. 그라타라는 거대한 그물이 저와 릴리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아 패배감이 들었다.

“엘버그에 왔으면 엘버그의 문화와 법도를 따라. 넌 죽어도 그라타 사람이 되지 못해, 릴리. 네 눈동자, 네 머리 빛깔. 네 피부색은 영락없는 엘버그 사람이야. 그라타에서 넌 엘버그에서 온 이방인으로 불리겠지.”

“폐하께서는 새로운 엘버그를 만든다 하셨지요.”

왕비는 옛 기억을 더듬었다. 어느 날 카르낙은 제 앞에서 눈을 빛내며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새로운 나라를 만들 거야.”

그 말에 가슴이 뛰었더랬다. 아버지가 망친 나라를 카르낙이 어떻게 일으켜 세울지 기대감에 손끝마저 저릿했었다.

“당신이 꿈꾸는 새로운 엘버그란 대체 어떤 곳인가요? 전… 당신이 꿈꾸는 것이 나와 같으리라 생각했어요. 그게 아니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비슷하리라 생각했어요. 한데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대체 그 새로운 엘버그는 어떤 곳이죠? 생명 없이 바스라진 사막 같은 곳인가요? 투로들의 사막처럼요?”

카르낙 발투만이 염원했던 엘버그는 다시는 투로를 무시하지 않는 대륙. 아내가 자신의 품에서 아무 근심 없이 지낼 수 있는 곳이었다. 이렇게 가끔 대륙을 여행하며 그녀에게 신기한 것을 잔뜩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러면 그녀의 미소는 꽃처럼 만개할 터였다. 그것으로 족했다. 아내가 웃는 모습을 지켜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그는 충분했다. 처음엔 분노와 복수뿐이었을지라도 이젠… 이제는 릴리가 오랫동안 제 곁에 있길 원해 이 대륙을, 자신의 왕좌를 지켜 내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조금이라도 더, 조금이라도 더 오래 그녀와 함께하기 위해.

아내는 그런 자신의 진심을 몰랐다. 그녀는 늘 먼 이상을 좇는다. 투로로선 가지지도 못하고 가질 수도 없었던 어떤 꿈 같은 것을 그린다. 자신은 눈앞의 행복 말고는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그녀는 늘 그 너머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릴리의 눈동자가 저를 향해 있어도 공허하였다. 진실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제 것이라 뱉어 낼수록 영영 제 것이 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치기가 어렸다. 릴리가 제게서 멀어지면 이 땅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분노와 증오의 땅일 뿐이다.

“이곳이 사막이 되든 불지옥이 되든 아무 상관없어. 내 것이기만 하면 돼.”

“…죽음뿐인 땅이라도요? 엘버그의 모든 사람들이 재처럼 사라져도요?”

“엘버그 사람들? 그 개도 안 먹을 쓰레기들 말이야?”

“…….”

카르낙의 분노는 여전했다. 예상한 대로였다. 카르낙이 꿈꾸는 새로운 세상에 엘버그인은 없었다. 엘버그 땅을 차지하고도 엘버그에서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모두 죽어야 기뻐할 사람이었다. 여전히 그의 가슴속엔 사랑이 없었다. 짓이겨지고 찢어 발겨져, 그대로 썩은 채였다. 마치 이 멀루아의 땅처럼. 그 안은 온통 죽은 것뿐이었다.

릴리는 인정해야 했다. 그의 본모습을 내내 외면했음을. 그 대신 어떻게든 자신이 만들어 낸 카르낙 발투만이라는 허상을 좇으며 그것에서 헛꿈을 찾았음을.

그 죽은 땅 위에 단 한 조각의 새싹을 틔우기 위해 그토록 애를 썼건만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스스로를 함정에 빠트려 쓸모없는 착각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 결론에 도달하니 숨이 막혔다. 명치부터 호흡이 내려가지도 올라와 입 밖으로 뱉어지지도 않았다.

“하아, 하아.”

릴리가 제 배 언저리를 잡고 호흡을 고르자 카르낙이 치료사인 리쿠스를 불렀다. 그는 왕의 침전으로 뛰어 들어와 릴리의 호흡과 안색을 살핀 뒤 그녀를 커다란 침대에 눕혔다. 심신의 진정을 돕는 따듯한 차를 한 잔 내온 뒤 왕비 전하의 심신이 회복될 때까지 누구도 그녀를 자극하지 말라고 일렀다. 카르낙은 아내의 몸 위로 이불을 꼼꼼히 덮어 준 뒤 그만 나가 보라는 왕명을 기다리고 있던 리쿠스에게 말했다.

“왕비가 3일째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다.”

“예. 알고 있습니다. 이국에서는 종종 몸과 마음을 단련하기 위하여 음식을 단기간 금하기도 한다더군요. 왕비 전하께서도 엘버그에 오기 전 종종 그것을 따랐다 하시니 몸에 큰 무리가 온 것은 다른 이유일 겁니다.”

“…….”

왕이 다시 묻지 않았음에도 리쿠스는 말을 이어 갔다.

“요 며칠 심사가 소란하신 듯 보였습니다. 종일 안색이 어두운 것도 심신의 불안정이 원인인 듯합니다. 그러니 왕비 전하께서 심신을 달랠 말미를 주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결국 또 파니릴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나인가. 그녀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도 그녀를 아프게 만드는 것도 그녀를 힘들게 만드는 것도 모두 자신이었다. 바라는 것은 오직 그녀의 행복임에도 그것을 제외한 모든 고통을 그녀에게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릴리, 너는 나를 견뎌야지. 나를 견뎌야 해. 내가 살아 있는 동안만큼은 너는 나를 견뎌야만 한다. 그 후에는 내 무덤에 침을 뱉든 아니면 부관참시를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 그래 마땅하니 달갑게 네 침을 받고 네 처벌을 기꺼이 받겠다. 그러니 제발 릴리, 나를 견뎌 줘.

“떠날 채비를 해 둬.”

“예?”

리쿠스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뜬금없는 명령에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방금 전 심신을 달랠 말미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건만.

“고프리를 죽인 뒤 우린 이 땅을 떠날 거야.”

“…멀루아 땅을 다스릴 새 영주도 결정하지 않고 말입니까?”

“새 영주는 필요 없어.”

어째서?

“영지를 불태울 거다.”

왕의 눈이 그늘 속에서 선득하게 빛났다. 광인의 것이었다.

“이 땅에 풀 한 포기 나지 않게 전부 다 태워 버릴 거야.”

“…하… 하면 영지민들은….”

“모두 병든 것들이다. 더는 번지지 않도록 여기서 소각해야지. 살아 있는 것들은 전부 다.”

이를테면 밭을 태워 경작지를 만드는 화전 같은 것이다. 모두 재로 만든 뒤 그것을 거름 삼아 이 땅 위에 새 생명을 싹 틔울 것이다. 그러면 사막화되어 가는 하게너의 영지민들을 이곳으로 이주시킬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엘버그의 싹은 모두 사라지고 투로가 그 자리에 뿌리내릴 것이다. 밑지는 것이 없는 장사였다.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었다. 도리어 득이 되겠지.

그로부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멀루아의 광장에는 왕명이 공표되었다.

“영주의 폭정과 영지민 사이에 도는 풍토병으로 이 멀루아 땅은 회복 불능의 죽은 땅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땅은 나. 카르낙 발투만의 명으로 곧 소각될 것이다! 소각될 일시는 지금으로부터 두 번째 해가 뜰 때다. 그러니 조금이나마 더 목숨을 부지하고 싶은 자들은 지금 즉시 이 땅을 떠나라.”

영지민들은 급작스러운 공표에 비명을 질러 댔다. 그 자리에서 실신하는 이도 몇 있었다. 광장은 곧 신음과 비명과 절망만 흐르는 비통함의 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파니릴리가 그 소리에 다시금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은 당연했다. 그녀는 신발을 신는 것도 잊어버린 채 맨발로 복도를 가로질러 알현소로 향했다. 이제는 카르낙의 것이 되어 버린 울퍼의 주좌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전하! 전하!’ 알현소의 문이 열리기도 전에 소란스레 릴리를 만류하는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그 덕에 카르낙은 릴리가 문을 박차고 들어오기 전에 먼저 그녀가 나타날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덜컥, 문이 열리고 맨발로 바닥을 디딘 채 헐떡이는 릴리의 뒤에 그녀의 구두를 들고 쫒아 온 시종들의 파리하게 질린 안색이 보였다.

그녀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는 뻔했다. 보좌의 근처에 서 있던 핀이 슈미즈 차림의 릴리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였다.

“왕비 전하.”

그러나 릴리의 원망 섞인 눈동자는 카르낙에게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핀의 인사를 들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또 한차례 설전이 시작될 때였다. 핀은 고함이 오가기 전에 시종에게서 릴리의 신발과 가운을 받아 들고 모두를 물린 후 문을 닫았다.

릴리의 신경질적인 목소리는 타이밍 좋게 울려 퍼졌다

“여길 전부 소각하겠다는 거, 그거, 그거 사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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