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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26화 (126/231)

126화

“…….”

고프리는 씹는 것을 멈추었다. 저도 모르게 카르낙의 손에서 조각나는 고깃덩어리에 시선이 갔다.

“네놈의 땅이 썩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은?”

“…….”

고프리는 카르낙의 말을 통역해 내지 못했다. 울퍼는 여전히 접시에 코를 처박고 있었고 고프리는 제 주인을 대신해 왕에게 대답했다.

“그것은…. 영주님은 아직 그것은… 알지 못하십니다.”

그제야 카르낙은 눈을 들었다. 귀신이라도 씐 듯 보라색 눈동자가 발광하고 있었다. 그것이 저에게 향하자 소름이 끼쳐 코프리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어째서? 네놈이 울퍼에게 그것을 전하지 않아서?”

“…….”

고프리는 선뜻 대답하지 못한 채 호흡을 골랐다. 침이 마르고 자꾸만 한기가 들었다.

“아니면 네놈이 울퍼를 네 꼭두각시로 여겨서?”

그는 강하게 도리질을 했다.

“그, 그런…. 당치도 않으신 말씀입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폐하께서 임명하신 봉신을 꼭두각시로 여길 수 있단 말입니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속을 알 수 없는 위인이니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도 없었다.

“그저 저는… 울퍼 님의 종으로서 울퍼 님의 명대로 주인이 들어 기뻐할 소식만을 전했을 뿐입니다.”

“이 땅의 군사적 가치는 알고 있나?”

울퍼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고개를 들었다. 왕은 정확히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얗게 질린 고프리와 왕을 차례대로 가늠할 동안 카르낙은 말을 이어 갔다.

“엘버그는 아직 전쟁 중이다. 여전히 누가 얼마나 많은 땅을 차지하느냐 치열하게 싸우고 있단 말이지. 그러므로 이 멀루아 영지는 나와 테르조가 벌이는 싸움의 일부분이야. 영지가 병들어 죽으면 너희만 뒈지고 끝나는 게 아니야. 나는 내 땅을 잃게 되고 당연히 병력을 손실하게 되는 거다. 놈들은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내게서 승리를 갈취해 가는 것과 진배없어.”

“…….”

입 모양으로 대강 왕의 말을 알아듣고 울퍼는 다시 고프리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는 여전히 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왕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러나 고프리는 제 주인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왕의 입을 쳐다보았다. 왕이 말했다.

“울퍼, 나는 너에게 분명 이 땅을 다스리라 했다. 영지민들을 쪄 먹건 삶아 먹건, 네놈이 뒷구멍으로 얼마의 돈을 챙기든 상관없지만 분명 나는 네게 땅을 다스리라 했어. 내 땅을 썩히고 병들게 하라고 한 적 없어.”

…내가? 어째서 내가 땅을 썩고 병들게 한다는 거야? 난 그런 적이 없는데? 난 이 멀루아성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가 본 적이 없는데? 울퍼는 손짓으로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러나 고프리는 통역하지 않았다. 그러자 울퍼는 급기야 분을 삭이지 못한 듯 쾅쾅, 두 손으로 테이블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시종들이 그 소리에 놀라 구석으로 움츠러들었다.

왕은 건조한 눈으로 광인이 춤을 추는 듯한 울퍼의 하소연을 보다가 천으로 손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프리가 기계적으로 그를 따라 일어났다.

“너는 왕명을 거역했다, 울퍼. 내 땅을 망가뜨리고 그것을 등한시했으며 영주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도 하지 않았어.”

왕의 근위대가 저벅저벅 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울퍼는 눈에 띄게 당황하여 주춤거렸다.

“설마 네놈이 무사하리라 생각하진 않았겠지. 그렇지?”

근위대가 그를 감싸자 고프리도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아마도 확신하고 있는 듯 보였다. 울퍼와 함께 저도 잡아갈 것이 분명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근위병들은 고프리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울퍼가 제압된 뒤 카르낙은 어느새 제 뒤에 서 있는 핀에게 말했다.

“감옥의 가장 볕이 잘 드는 방으로 마련해 주어라. 어차피 오래 살진 못할 테니.”

핀에게 하는 명령이 분명할진대 고프리는 자신을 향한 위협으로 느꼈다. 아니 필시 그럴 것이다. 울퍼를 가두며 그의 입과 귀였던 저를 그냥 내버려 둘 리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저를 잡아넣지 않는 이유는 뭘까.

그의 두려운 호기심이 해결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정확하게 3일 뒤 울퍼의 시신은 성문에 걸렸다.

고통을 이기지 못해 일그러진 얼굴 그대로, 갈라진 배에서 쏟아져 내린 내장이 밧줄처럼 바닥까지 늘어진 채 그의 시신은 보란 듯이 영지민을 향해 전시되었다.

영지민들은 잔인하게 난도질되어 있는 영주의 시신을 보며 비명을 지르기는커녕 환희에 젖어 감탄사를 질러 댔다. 그러며 자신들을 고통에서 구해 준 카르낙 발투만의 은총에 경의를 표했다. ‘마침내 엘버그 왕국의 참된 국왕이 사악한 영주를 심판하였다.’ 종일 그렇게 부르짖으며 카르낙을 숭배하였다.

고프리는 제 주인을 끌어와 산 채로 배를 가르고 그의 목에 밧줄을 감아 성벽 아래로 던져 버리는 모습을 똑똑히 봐야만 했다. 또한 그것에 영지민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생생하게 지켜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 또한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 예감한 순간 그는 카르낙의 명에 의해 지하 감옥에 던져졌다.

그제야 고프리는 깨달았다. 왕이 원했던 것은 울퍼를 통해 고프리가 자신이 죽은 이후에도 계속될 고통과 수치를 미리 알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결코 죽은 후에도 너는 영원히 평화와 안식을 누리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이토록 잔인한 형벌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고프리는 어두컴컴한 감옥의 축축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 처지가 괴로워 눈물이 났다. 울퍼의 마지막 모습이 그를 고통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참으로 잔악하고 비정한 왕이도다. 카르낙 발투만.

3일.

단 3일.

고프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오직 그뿐이었다.

매분 매초 그에게 죽음이 다가왔다.

기괴하고도 끔찍한 형상이었다.

그는 귀신처럼 흐느꼈다. 서늘한 지하 감옥을 더욱 서늘하게 만드는 울음소리가 잠시도 그치지 않고 메아리쳤다.

***

“왕비가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울퍼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멀루아 영지의 재고 기록이나 뒤적이고 있을 때였다. 왕의 매서운 되물음에 시종은 몸을 움츠렸다. 칠푼이 울퍼가 천벌을 받은 것은 좋았지만 행여나 저도 그처럼 죽임을 당할까 두려운 까닭이었다.

“예…. 예, 페하. 왕비 전하께서… 3일째 식음을 전폐하고 계십니다….”

왕의 눈에 별안간 불길이 일었다. 왕의 옆에서 서류 정리를 돕고 있던 핀이 뒤로 휙 몸을 돌렸다. 마치 듣지도 보지도 못한 듯이. 그는 이런 골치 아픈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이제 정말 별짓을 다 하는군.”

카르낙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핀은 그가 서재를 벗어나기 전에 재빨리 내뱉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폐하.”

왕은 대충 손을 까닥였다. 그러고는 쏜살같이 방 안을 빠져나갔다. 온 정신이 제 아내의 소소하고도 위협적인 반항으로 향해 있는 것 같았다.

릴리는 왕에게 시위할 마음은 없었다. 다만 산책을 다녀온 직후, 그 짧은 새에 성 안에서 일어났던 소란에 대해 들은 뒤에는 허탈함에 아무것도 입에 넣고 싶지 않았다. 지금껏 방관하던 울퍼를 이제 와 지하에 처넣었다고? 이토록 갑작스럽고 간단하게?

제 남편의 속내를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혹여나 자신과의 다툼이 그 일에 영향을 미쳤을까, 심사가 뒤틀린 카르낙이 분풀이로 울퍼를 그 지경으로 만든 것은 아닐까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을 거라며 되뇌는 한편 남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확신할 수 있겠느냐 되물을 수밖에 없는 자신이 비참했다.

그때그때 자신의 기분에 따라 좋았던 것도 싫어지고 싫었던 것도 좋아지는 듯한 남편의 성정에 과연 어린 구스를 구할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었다. 그 때문에 우울했다. 무력한 자신이 싫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음식을 물리다 보니 아예 당분간 단식을 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부르테가 종종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 적어도 일주일 정도 몸을 비우기로 했다. 그러면 비로소 잡념 또한 비워지리라.

“비 전하, 이것만이라도 드셔야 합니다. 이러다 크게 건강이 상하실까 저어됩니다.”

전담 시녀는 계속 그녀의 손이 닿을 만한 곳에 데운 고깃국을 내려놓았다. 저러다 왕비가 쓰러질까 염려하여 안색이 어둡다 못해 꺼뭇한 지경이었다. 가뜩이나 흉흉한 분위기에 왕비가 어떻게 된다면 저 역시 울퍼와 다름없는 처지가 될 것이 자명했다. 그러니 속이 타들어 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미안해요. 하지만 역시 먹지 않는 것이….”

쾅, 하고 기척도 없이 문이 열렸다. 시녀는 움찔 떨더니 재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왕의 침전에 무례하게 들어올 수 있는 이는 오로지 왕뿐이었으므로.

왕은 시종들이 문을 열어 주기도 전에 발로 문을 차 버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깃국이 창가에 놓여 있었고 그곳에 앉은 릴리에게선 전혀 예전 같은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색이 바랜 인형처럼 볕 아래 앉아 있을 뿐이었다.

카르낙은 성큼성큼 다가가 고깃국부터 집어 던졌다. 곁의 시녀 몇은 비명을 지르고 몇은 그것을 삼켰다. 쨍그랑, 하고 쇠붙이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국과 건더기는 허공으로 날아간 지 오래였다. 왕은 태연한 낯빛으로 씨근덕거렸다,

“제대로 된 음식을 가져와.”

지금껏 매번 제대로 된 음식을 내왔었노라 억울함을 토로하고 싶었다. 매번 비 전하께서 물리셔서 하는 수 없이 그녀의 건강이 걱정되어 고깃국이라도 가져와 독촉하는 중이라 하소연하고 싶었다. 그러나 행여 왕의 심기를 거슬러 혀를 건사하지 못하게 될까,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무작정 집어 던지기 전에 내게 왜 먹지 않는지 묻는 것이 마땅하지 않나요?”

릴리는 차분하다 못해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더러는 비난조로 들리기도 하였다. 카르낙은 제 아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대답은 안 들어도 뻔해.”

“제가 무슨 대답을 할 줄 알고?”

“사람들을 풀어 줄 때까지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겠다고 날 협박하고 있는 거 다 알아.”

“…대단히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이로군요, 폐하. 마치 내 머릿속엔 폐하밖에 없는 듯이 말씀하시네요.”

왕의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열이 치미는 것이 보였다. 여차하면 난장을 피울 기세에 사람들은 바들바들 떨었다.

“나가.”

그러다 왕의 명령에 쏜살같이 밖으로 사라졌다. 목숨은 부지하지 못할지언정 왕과 왕비의 기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보고 있노라면 숨이 막혀 고통스럽기 그지없었다.

“넌 내 아내가 되기 위해 엘버그에 왔지, 릴리.”

“…….”

“내 선생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

“내가 왜 추밀원도 캘던의 예배당도 채우지 않는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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