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잘난 자할 영주님께서 우릴 추방했단 말이지! 왜냐하면 하게너성의 영지는 밀려 들어오는 투로들을 모두 품기엔 개미 똥구멍만큼 작다나 뭐라나!”
카르낙은 혼란스러웠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무기를 들고 나타난 자들은 모두 일곱. 이들이 전부일까. 아니면 이 숲에는 더 많은 투로들이 이런 모습으로 숨어 사는 것일까.
그렇다면 모두 하게너성에서 쫓겨난 자들인가. 하게너의 영지는 매우 넓다. 수도인 캘던보다도 더 넓을 것이다. 비록 모든 땅이 비옥하진 못하더라도 메마른 사막보다야 훨씬 살만하다. 그럼에도 투로들을 모두 수용하지 못한단 말인가.
검을 들고 있음에도 그들과 싸우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모두 형제였다. 검은 피부와 검은 머리를 가진. 카르낙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캘던이 있어. 이 숲에서 벗어나 조금만 가면 엘버그의 수도 캘던이 있어. 그곳에 가면 기회가 있을 거야.”
“캘던? 이 샌님이 캘던에 가면 기회가 있다는데?”
그러자 모두가 웃었다. 말도 안되는 농이라도 들었다는 듯. 우두머리의 표정에 잔인한 광기가 감돌았다.
“그래. 투로 중 한 놈이 엘버그의 왕이 되었다지? 그 캘던인가 뭔가 하는 곳에서 아주 질펀하게 즐기고 있겠지. 아무렴 그렇고말고. 캘던의 모든 계집들을 따먹으면서 말이야! 하지만 꼬맹아.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단다. 세상은 여전히 좆 같거든! 여전히 사람들은 우릴 경멸하고 우린 여전히 주린 배를 움켜쥐고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발버둥 쳐야 하지! 너같이 반반하게 생긴 놈이야 계집질을 해도 잘 살겠지만, 우리처럼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벌레들에게 기회란 없어. 하루 벌어 하루 연명하는 게 다란 말씀이야.”
“그래서 택한 게 노상 강도질인가? 그것도 같은 동족에게?”
“너는 그냥 사냥감일 뿐이란다 꼬마야. 그저 살기 위해 해칠 뿐 악감정은 없어. 그러니 너도 부디 우리에게 악감정은 품지 말려무나. 사는 게 다 이런 거 아니겠어?”
그는 이죽 웃었다. 썩은 내가 풍기는 새까만 이빨이 환히 드러났다.
“보아하니 그동안 아주 행복한 인생을 산 것 같으니 생에 미련은 없겠지.”
그가 품에서 칼을 빼 들었다. 카르낙은 흑마의 고삐를 꼭 쥐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릴리, 말에 올라타.”
“…네?”
말이 투레질을 하기 시작했다. 불안함과 흥분이 놈의 몸을 달구고 있는 것이다.
“말이 길을 알아. 최대한 빨리 일행에 합류하도록 해.”
“…그럼 폐하는요?”
놈들 중 하나가 화살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자신은 남아 릴리를 태운 말이 이들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날 만큼의 시간을 벌어 주어야 했다.
“걱정 마. 릴리. 내겐 익숙한 일이니까.”
네가 있다는 것만 뺀다면.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던 때에는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누구든 간신히 목숨만을 구하면 그것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장님이 되어도, 절름발이가 되어도, 혹은 반신불수가 되어도 목숨만 붙어있다면.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온전히 파니릴리를 지키고 싶었다. 상처 하나 없이, 털끝 하나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두려웠다. 혹여 그녀를 지키지 못하게 될까 봐, 혹여 그녀의 몸 어딘가에 상처가 날까 봐. 고삐를 쥔 카르낙의 손은 그런 이유로 떨렸다. 그는 이성을 잃지 않으려 제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그는 다시 검을 검집에 넣고 파니릴리의 허리를 안아 훌쩍, 말 위에 올렸다. 놈들은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고삐를 쥐어! 릴리!”
릴리는 시키는 대로 고삐를 꽉 쥐어 당겼다. 말이 히히힝, 하고 울음소리를 내더니 머리를 틀었다. 카르낙은 품에서 사냥용 단검을 꺼내어 가장 가까이 다가온 놈의 이마를 조준하여 날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단검은 정확하게 그의 미간에 꽂혔다.
“칼!”
릴리가 남편의 이름을 외쳤다. 그들은 너무 가까웠고 너무나 많았다. 저에게 말을 줘 버리면 그는 대체 어떻게 저들을 피해 달아난단 말인가. 그는 혼자이고 저 건장하고 무장한 사내들은 이제 여섯이었다.
카르낙은 사정없이 말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찰싹, 하는 동시에 말이 앞발을 들며 울었다. 릴리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말의 목을 와락 안으며 비명을 질렀다. 달리기 시작했다. 발굽 소리가 정신없이 울렸고 바짝 엎드린 몸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칼!”
릴리는 두려움에 떨며 남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놈들 중 하나가 자리에 멈춰 서서 활을 꺼내 들었다. 촉은 말 위에 엎드린 릴리를 정확히 조준하고 있었다
카르낙은 나무에 박혀있던 손도끼를 빼내 그를 향해 던졌다. 도끼날은 정확히 놈의 두개골을 가르며 박혔다.
제 부하가 나자빠지는 것을 보며 우두머리는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그러니까 말고기는 처먹지 말자고 했잖아!”
진작에 타는 법을 배웠어야 했다. 그랬다면 저 계집이 도망가는 꼴을 넋 놓고 앉아 쳐다보고만 있진 않겠지. 이 고기라면 환장하는 거지새끼들만 아니었다면!
순식간에 제 부하 둘의 머리통을 박살 낸 벌레 놈이 드디어 다시 검을 빼 들었다. 대체 뭐 하는 샌님인지는 몰라도 쉽지 않은 상대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부하 둘을 잃었어도 여전히 놈은 혼자였다. 쓸 수 있는 무기도 이젠 검 한 자루가 전부일 테니 더는 놈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놈을 죽이면 저 판금 흉갑은 내 것이다.
‘페하의 말이다!’ 하고 누군가가 외쳤다. 차양 밑에 앉아 휴식을 취하던 핀이 멀리 말발굽이 일으키는 먼지 바람을 발견했다. 분명 그것은 카르낙의 말이지만 타고 있는 것은 파니릴리 혼자였다. 핀은 목을 축이고 있던 포도주 잔을 놓고 차양 밖으로 빠져나왔다. 로로 역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을 세워!”
핀이 소리쳤다. 병사 너덧이 질주하는 말의 앞에 뛰어들어 방패를 세웠다. 그러자 간신히 말은 앞발을 들며 자리에 멈춰 섰다. 말고삐를 놓친 파니릴리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전하!”
핀이 말에서 떨어지는 그녀를 간신히 받아 안았다. 푸르르, 말이 흥분을 가다듬지 못해 투레질을 했고 병사들은 그를 진정시키고 말고삐를 다시 쥐기 위해 안간힘이었다. 핀은 파니릴리를 무사히 바닥에 내려놓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린 탓인지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릴리가 덜덜 떨며 입을 뻐끔거렸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누가 마실 것을 좀 가져와! 어서!”
“피… 핀! 핀!”
릴리가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쥐어짜 내며 그의 멱살을 쥐었다.
“진정하세요. 전하. 이제 안전하십니다. 괜찮아요.”
아니야 괜찮지 않아 전혀 괜찮지 않아.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단어들이 엉켜 입 밖으로 튀어 나가지가 않았다. 고통스러웠다. 떨어지지 않는 입 때문에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칼, 폐하가… 도적… 도적을…. 산에 도적이… 가야 해요. 제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눈물부터 터져 나왔다. 이런 자신이 한심해 견딜 수가 없다. 릴리는 꺼이꺼이 울면서도 계속해서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가… 가야 해요 핀! 제발요! 숲이에요! 숲으로 가야 해요! 제발!”
제발 가서 그를 구해 줘요. 제발요. 이럴 시간이 없다. 빨리 가야 한다. 핀은 흑마가 내달려 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하게너 영지의 근방에 있는 거대한 폭포수 밀림에 대해 잘 아는 이는 카르낙을 제외하고는 로로뿐이다.
그러나 쇠약한 로로를 데리고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길잡이도 없이 저 숲으로 뛰어드는 것은 자살 행위다. 들어갔다가 길을 잃을 것이 분명했다. 핀은 고개를 저었다.
“숲이 너무 깊어요. 들어갔다간 길을 잃고 말 겁니다.”
“칼의 말이, 말이 길을 알아요! 나를 데리고 여기까지 왔으니까 가는 길도, 가는 길도 아, 알 거예요!”
핀은 진정하지 못하는 카르낙의 흑마를 흘깃 바라보았다. 침착해야 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녀석은 파니릴리 왕비를 태우고 이곳까지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가다가 힘이 다해 주저앉을 것이다. 왕이 아끼는 그의 군마를 그런 식으로 무용하게 만들 수는 없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핀!”
릴리가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당신은 폐하의 근위대잖아요! 제발 뭐라도 해 줘요! 제발요! 칼은 혼자예요! 혼자라고요! 그들은 몸집이 아주 크고 모두 무장을 했어요! 도와줘야 해요! 제발요!”
“놈들이 몇이나 되던가요?”
그들이 몇이나 되냐고? 릴리는 기억해 내려 애썼다. 짐승의 가죽을 두르고 새까만 머리를 한 그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려 애썼다. 눈동자가 허공에서 흔들렸다.
“…다섯, 아니…. 아니 일곱….”
그녀는 눈을 꽉 감고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몇 명이었지 몇 명이었더라. 제대로 볼 수가 없었어. 제대로 보질 못했다. 제대로 봤어야 했는데. 뭐라도 했어야 했는데. 그가 죽으면 어쩌지. 안 돼. 안 돼 그럴 순 없어! 그는 엘버그의 왕이야! 이대로 죽으면 안 돼!
“가요, 핀. 군사들을 이끌고 숲으로 가요.”
“전하….”
릴리가 고개를 똑바로 쳐들었다
“명령이에요! 당장 숲으로 가요! 당장요! 가서 국왕 폐하를 모셔 와요! 어서요!”
핀이 제 어금니를 씹었다. 그의 턱이 꿈틀거렸다.
“숲을 뒤져 봐.”
대장의 명령에 무장을 한 보병과 기병들이 숲으로 향했다.
“나도, 나도 가겠어요. 어쩌면 내가 길을 기억할지도 몰라요.”
내내 떨어지지 않으려 말의 목을 껴안고만 있었다. 스쳐 간 풍경들은 모두 희미했고 기억에 남을 만한 특징들은 떠올릴 만한 것도 없었다. 온통 모르는 것들뿐이었어. 나무도, 풀도 온통 이름 모를 것투성이.
“그건 안 됩니다. 전하.”
“더 나은 대답은 없어요!?”
참을 수가 없어 소리를 질렀다. 안 된다, 안 된다, 계속 안 된다고만 하지! 카르낙의 근위대다. 측근이다. 그를 보호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자다. 나조차, 그와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한 적도 없는 나조차 그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데 그와 함께 전장을 누비던 전우는, 신하는, 그의 심복은 목숨을 버릴 각오조차 되어 있지 않단 말인가!
“전하께서 다시 숲으로 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저는 국왕 폐하께 만일의 경우 왕비 전하를 지키겠노라 맹세했어요.”
“헛소리야!”
릴리의 목에 핏대가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