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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05화 (105/231)

105화

카르낙은 릴리를 제 말에 태우고 한참 동안 산등성이를 올랐다. 광활하고도 드넓은 육지에는 풀과 나무가 빼곡했다. 릴리는 내내 들뜬 채 꼭 그라타에 온 것 같다고 말했다. 그녀는 폭포수의 굉음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카르낙을 재촉했다.

“칼, 조금만 더 속력을 내봐요!”

“엉덩이에 불났던 여자 맞아?”

카르낙이 혀를 내둘렀다.

“내 엉덩이는 마차에서만 불이 붙어요! 그리고 지금은 폭포수를 빨리 보고 싶다고요!”

“그놈의 엉덩이는 참 선택적으로 구네. 후회나 하지 말라고.”

카르낙은 발을 굴러 말의 가슴을 찼다. 히히힝, 하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말은 쏜살같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릴리는 본능적으로 칼의 몸을 껴안고 비명을 내질렀다.

조금 속력을 줄여 볼까 하는 마음이 잠깐 들었지만 제 가슴에 안기는 릴리의 감촉이 좋아 카르낙은 더 속력을 올리기를 택했다. 그는 쉼 없이 발을 굴렀다. 그럴수록 더욱 기분은 흡족해졌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카르낙이 말고삐를 당겼다. 정신없던 말발굽 소리가 다른 거대한 굉음에 완전히 파묻혔고 흑마는 제자리걸음을 하기 시작했다.

“봐! 릴리!”

카르낙이 소리 질렀다. 릴리는 그제야 비로소 남편의 가슴팍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막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 이제 멈추라고 할 찰나였다.

새하얀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곳엔 분명 무지개가 보였다.

카르낙이 그녀를 안아 바닥으로 내려 주었다. 릴리는 정신없이 제 눈앞에 도래한 풍경을 살피며 걸음을 내디뎠다. 하늘 위로 새가 날아갔고 수평선은 삐죽 솟아 나온 나무나 바윗덩어리 하나 없이 마치 끝없는 지평선처럼 평화롭고 광활하였다.

그 아래, 까마득한 아래로 폭포수가 쏟아졌다. 아찔한 구덩이로 쏟아져 내리는 용광로처럼 거대한 물줄기는 굉음을 내며 계속해서 쏟아졌다. 그곳에서부터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그것으로 무지개를 만들어 냈다.

릴리는 지금껏 본 적이 없는 광경에 완전히 압도당하여 숨조차 쉴 수 없었다. 평화와 혼돈이 뒤섞인 이 폭포수는 그 자체로 생명이고 자연의 모든 진리였다. 아름답고 아찔하고 두려운 동시에 경외감이 들었다. 이 거대한 물줄기 아래 인간은 얼마나 보잘것없고 하찮은 존재인가. 나약하여 곧 부서질 존재였다.

“굉장해요.”

릴리가 넋이 나가 중얼거렸다. 카르낙은 제 말 고삐를 잡고 잔뜩 인상을 찡그렸다.

“뭐라고!? 릴리!? 잘 안 들려!”

이게 다 폭포의 굉음 때문이리라. 릴리는 웃음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정말 굉장하다고요, 칼! 저기 무지개 좀 봐요!”

그러며 릴리는 반원을 그리며 뜬 무지개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래. 만일 이 세상의 모든 소리가 차단된다면 분명 눈앞의 풍경은 그야말로 아름답고 평화로우며 더없이 훌륭한 광경일 것이다.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그러나 굉음과 바람과 들이치는 폭우를 맞으며 카르낙은 그 광경이 아주 아름다운 재앙이라 생각했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더욱 그랬다. 특히나 이 폭포수의 아래에 서면 꼭 모래 폭풍에 휩싸였을 때처럼 두렵고 무방비해지고는 했다. 그는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거대한 힘이 싫었다. 가능하면 그것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 어떤 것의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으리라, 무릎 꿇지 않으리라 스스로에게 맹세한 후 행여나 그 거대한 힘 앞에 무너질까 두려운 까닭이었다.

그러나 릴리는 쏟아지는 물방울도, 고막이 찢어질 듯한 굉음도,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거세고 아찔한 물줄기도 두렵지 않은 것 같았다. 계속해서 앞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허리를 카르낙이 붙잡았다.

“릴리! 너무 가까이 가지 마!”

행여 자신의 아내가 그 물줄기에 홀려 까마득한 폭포수 아래로 떨어질까 봐 겁이 났다. 그러나 릴리는 남편의 조바심은 아랑곳하지 않고 흥분으로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눈동자가 환하게 빛났다.

“정말 멋져요! 칼! 살면서 이런 풍경은 처음이에요!”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 위로 맺힌 수많은 물방울들이 꼭 작은 다이아몬드 같았다. 카르낙은 그 모습에 눈이 멀 것만 같았다.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쁘지만! 더 젖기 전에 여기서 벗어나야 해!”

캘던에 비해 낮이 길고 밤이 짧긴 했지만 그래도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숲이 우거진 폭포수 근처에는 밤이 되면 사냥을 나서는 이름 모를 날짐승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특히 무리 지어 사냥하는 맹수들과 맞닥뜨리기라도 한다면 자신이 파니릴리를 온전히 지켜 낼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카르낙은 제 망토를 벗어 젖어 있는 릴리의 어깨에 둘렀다. 지금이야 흥분되어 모른다지만 그것이 가라앉고 나면 분명 한기를 느끼리라.

“가자, 릴리!”

그녀의 손을 잡아끄는데 릴리가 멈칫, 그의 손을 당겼다.

“칼!”

카르낙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내는 기쁘고도 단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부드럽고 한없이 다정한 얼굴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곳에 데리고 와 주어서요!”

카르낙은 와락 자신의 아내를 안았다.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이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몇 번이라도,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한 손에는 말고삐를 쥐고 한 손으로는 릴리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피어오르는 물안개에 젖어 그의 흉갑과 팔뚝에서 뜨거운 김이 피어올랐다.

“정말 울창하네요. 그라타에선 보지 못하던 식물들도 정말 많아요.”

릴리는 걸음을 옮기면서도 고개를 돌려 사방을 훑느라 정신이 없었다. 못 보던 나무, 못 보던 풀, 못 보던 꽃. 릴리는 이곳에서 캘던을 느낄 수 있었다.

초록빛을 띠기보다는 흙색에 더 가까운 도시이나 캘던 성의 거대한 주목이 살아 있을 때에는 분명 이 같은 모습을 했으리라. 지금은 깊은 구덩이가 되어 버린 해자에도 물이 넘쳐흘렀으리라. 아득히 먼 강줄기는 캘던성의 바로 아래에서부터 흘렀을 것이다. 그때엔 모든 것이 풍요로웠겠지. 적어도 주린 배를 움켜쥐고 모래 폭풍을 견뎌야 하진 않았으리라.

“이곳에도 전갈이 있나요?”

“아마도. 폭포수에서 조금 벗어나면 있을 거야. 여긴 너무 습하니까.”

“약에도 쓰인다고 했죠? 몇 마리 잡아다가 리쿠스에게 선물해 주면 좋을 것 같아요.”

“괜찮겠어? 보면 비명부터 지르잖아.”

“전 멀찍이 떨어져 구경만 하고 잡는 건 폐하께서 잡으면 되잖아요. 다 잡은 건 죽여서 꼬챙이에 끼워 폐하께서 들고 가면 되고요.”

“…지금껏 살아 있는 생명은 모두 귀중히 여기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끔찍한 말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나오네.”

“이것도 자연의 섭리 중 하나예요, 칼. 먹고 먹히는 관계요. 거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죄책감은 안 드는데요. 그리고 이곳엔 반드시 캘던성에서 사람을 보내야 해요. 모든 풀과 열매를 관찰하고 기록할 사람이요. 효능과 제조법을 연구하면 많은 도움이 될 거에요.”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파발을 띄우지. 곧바로 사람을 보낼 수 있도록. 그리고 이미 전갈은 리쿠스의 수중에 들어갔을 거야. 핀에게 부탁하는 것을 봤거든.”

“그는 여기 머물고 싶겠어요. 그에겐 보물 창고 같을 거예요.”

“하지만 그는 왕과 동행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지. 리쿠스보다 더 뛰어난 치료사가 나타난다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리쿠스는 폐하께서 성을 비우신 1년 동안 내내 방에 틀어박혀 있었어요. 이제 와 동행할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누가 납득하겠어요.”

“그렇다면 그는 왕비와 동행해야 하는 의무가 있어. 걸핏하면 앓는 소리를 하는 약골이거든.”

릴리는 기가 막혀 눈을 굴렸다.

“거기엔 동의 못 하겠는데요. 엘버그로 온 이후 그 흔한 감기 한번 걸려 본 적 없어요.”

“그건 건강보다는 엘버그가 지나치게 더워진 탓이겠지. 아마 더위가 조금만 더 지속되었어도 넌 열사병에 걸렸을 거야.”

그리고 그 덕에 캘던의 사람들은 릴리를 더욱 숭배하게 되었다. 그들은 아마네스가 자신의 아이를 축복하기 위해 캘던에 비를 뿌려 주었노라 믿어 의심치 않으니 말이다.

“엘버그 사람들은 옷을 지나치게 많이 껴입어요.”

“부유함의 상징이잖아. 허영심으로 불편함을 이기는 거야. 치렁치렁할수록 자신이 가치 있는 자로 느껴지지. 아마 당장 왕명으로 의복의 가짓수를 제한한다 해도 쉽게 따르려 하지 않을 거야. 엘버그에선 허영심이 곧 자신의….”

카르낙은 말을 끝맺지 않은 채 릴리의 뒷덜미를 잡아 아래로 찍어 눌렀다. 릴리는 중심을 잃고 바닥에 엎어졌다. 둔탁한 것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고 ‘퍽’ 하고 소리도 났다. 카르낙이 고개를 돌려 뒤편의 나무를 쳐다보았다.

기둥에 박혀있는 둔탁하고 날카로운 손도끼.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릴리는 카르낙이 사태를 파악하고도 한참 후에야 저를 향해 쇠붙이가 날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도 날카롭고 둔중한 것이 매우 빠르게.

카르낙은 일어서며 곧바로 검을 빼 들었다. 검집에서 나온 크고 견고한 검은 한동안 날카로운 진동음을 냈다. 잠잠하고 평화로운 숲속에 무겁고 위태로운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아스라이 들리는 폭포수의 마찰음과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소리에도 청각은 기민하게 반응했다.

카르낙은 침착한 얼굴로 사방을 살폈다. 몇일까. 한 명? 두 명? 아니 그보다 많았다. 우거진 나뭇가지와 수풀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여럿 보였다. 검은 피부에 검은 머리. 저처럼 크고 다부진 체격. 투로였다.

놈들은 투로답게 그다지 옷을 갖추어 입지 않았다. 질긴 가죽으로 제 사타구니만 가린 채 누군가에게서 빼앗았을 금붙이와 장식품들을 목과 팔에 주렁주렁 걸고 있었다. 날짐승들의 뿔과 송곳니로 만든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카르낙은 그가 이 무리의 우두머리일 것이라 생각했다. 가장 건장하고 가장 잔인한 눈을 하고 있었다.

“이것 좀 보라고 형제들! 누구는 숨어서 간신히 목숨만 연명하고 있는데 누구는 흉갑에 값비싸 보이는 검까지 차고서 계집과 시시덕거리기까지 하다니! 세상은 정말 불공평하단 말이지!”

저를 향하는 시선에 등골이 쭈뼛 섰다. 릴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더듬더듬 카르낙의 어깨를 쥐었고 그는 제 아내를 자신의 뒤편으로 밀어 넣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사실은 카르낙의 등은 사내들의 시선에서 릴리를 완전히 차단해 줄 만큼 넓다는 사실이었다.

“왜 여기 있지?”

카르낙이 물었다.

“뭐라고? 샌님아?”

우두머리는 귀를 파며 되물었다.

“바로 코앞에 하게너의 성이 있잖아.”

하게너성의 주인은 투로들이었다. 자할과 자파에게 성이 권력을 이양해 주었고 그곳에서만큼은 세상의 모든 것을 누리고 살 수 있었다. 돈과 권력과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이 무수히 열려 있었다.

“그 빌어먹을 땅덩어리 말이지.”

사내는 푸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조소가 가득한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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