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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01화 (101/231)

101화

지금껏 들어 본 적 없는 날카로운 비명소리. 릴리 자신도 생전 처음 내보는 초고음의 비명이었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벌벌 떨었다. 두 눈을 꽉 감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손을 바르르 떠는 것은 물론이요 새하얗게 질린 얼굴은 곧 졸도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만치 창백했다.

제 아내가 혼비백산한 가운데 카르낙은 짓궂게도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릴리는 카르낙의 웃음소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저 크고 혐오스러운 벌레가 제 눈앞에서 사라지기만을 절실히 바랐다.

그녀가 버둥거리는 바람에 간이침대로 떨어진 벌레를 보며 릴리는 침대의 머리맡까지 올라간 채로 발을 동동 굴렀다.

“살려 줘! 살려 줘요! 칼!”

“진정해, 릴리. 이미 죽었어.”

카르낙이 여전히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나 릴리는 그것이 죽었든 살았든 상관없었다. 여전히 소름이 돋고 꺼림칙하고 징그럽고 무서웠다.

“치워요. 제발 치우라고요….”

“봐. 릴리.”

카르낙이 저벅저벅 다가와 그 흉한 것을 손으로 집어 릴리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악!”

릴리가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혼비백산했다. 그러더니 침대에 철퍼덕 엎드려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봐. 죽었어. 안전하다니까?”

“…….”

엎어진 릴리가 말이 없었다. 어깨가 들썩거리는 것을 보니 우는 것 같기도 하고. 폭소 만발이었던 카르낙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어 갔다. 설마?

“릴리?”

“…….”

“설마 우는 거 아니지?”

“…….”

“울어?”

어색하고 싸한 분위기. 카르낙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눈동자만 좌우로 움직였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는데 슬슬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핀이… 근처에 그 전갈이 보인다기에 말이야… 그니까 전갈이 보인다는 것은…생각보다 하게너성에 꽤 가까워졌다는 뜻이거든… 그래서….”

“…….”

“그리고 이렇게 큰 전갈은 보통…독이 없어. 맹독을 가진 전갈은 원래 엄청 작거든. 그리고 색도 이렇게 까맣지 않고… 어쨌든 이렇게 보여도 이거 식재료로 쓰이는 거라… 깨끗하고 또…”

릴리가 ‘후우’ 하는 숨을 내쉬며 얼굴을 들었다. 코끝과 눈가가 붉은 것이 운 게 틀림없다. 주르륵 카르낙의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몸은 차가운데 왜 이렇게 땀이 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카르낙은 어떻게 해서든 그녀의 기분을 풀어 주고 싶었다. 설마 내가 아내에게 맹독이 있는, 살아 있는 전갈을 던질 리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든 알려 주고 싶은 것이다.

“봐. 릴리. 내가 이렇게….”

“치워요!”

‘꼬리도 잘랐어….’라고 말을 맺기도 전에 릴리가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어….”

어떻게 해야 하나 우왕좌왕하다가 카르낙은 천막을 들추고 밖으로 전갈을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어떻게든 릴리를 진정시키고 싶어 두 손을 펴 보였다.

“봐. 버렸어. 없어 이제.”

릴리는 흘깃 그를 쳐다보더니 제 가슴에 손을 얹고 긴 숨을 토했다. 그제야 긴장이 좀 풀리는 듯했다. 카르낙도 덩달아 안도했다. 물론 안도했다고 해서 그녀의 눈치를 안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괜찮아?”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릴리는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가 떴다. 동시에 제 마른 입술도 한번 깨물었다가 놓았다.

“뭐… 뭐라고요? 그게?”

“…전갈?”

아직도 입술을 바르르 떠는 것이 어지간히 놀란 게 아닌 둣 싶었다.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세상에.”

그녀는 아직도 몸서리가 쳐지는지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다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카르낙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로서는 놀라울 것이 없는 것이 그녀를 엄청나게 놀라게 했다는 사실에 카르낙을 더욱더 놀라게 했다.

“…그냥… 그냥 벌레 같은 거야. 릴리.”

“그라타에 수… 숨거미란 거미가 있어요. 새까맣고 아주 크고… 무리 지어서…. 개미처럼 무리 지어서 다니는데, 사람도… 사람도 먹는다고….”

“어….”

카르낙은 자신이 점점 더 궁지에 몰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스승님이 숨거미는… 재앙과 같은 것이라 했어요. 대지에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을 갉아먹는다고…. 숨거미를 보게 되면 반드시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더더욱 궁지에 몰리기 전에 카르낙은 자신을 변호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니야, 완전히 달라. 생긴 게 비슷할진 몰라도 쟤는 심지어 음식으로 먹기도 하는 그러니까 말하면 사람에게 매우 이로운 벌레야.”

물론 맹독만 제거한다면.

“게다가 술을 만들어 먹기도 해. 로로는 그게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했어. 그러니까 뭐랄까. 치료제. 그래, 치료제처럼 쓰이기도 한다고 말이야.”

물론 그것도 맹독을 제거하고 난 후에.

“그러니까… 숨거미?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조금도 비슷하지 않아. 게다가 잘 못 봤겠지만 전갈은 집게가 달렸어. 봤어? 못 봤지? 양손에 집게가 달리고 꼬리가 아주 길지!”

그리고 그 꼬리에 맹독이 있지!

“그러니까 거미와 조금도 닮지 않았어. 정말이야. 내 말을 믿어도 좋아. 보고 싶다면 내가 다시 나가서….”

“아니요. 아니요. 지금은 말고요.”

릴리는 완강하게 손을 저었다. ‘알겠어, 알겠어’ 하며 카르낙은 괜스레 헛기침했다.

“…포도주를 한 잔 줄까?”

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라 건네주며 카르낙은 어떻게든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고마워요.”

릴리는 그것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카르낙은 꿀꺽꿀꺽 액체를 넘길 때마다 움직이는 그녀의 목울대를 신중히 쳐다보며 사과했다.

“미안해, 릴리. 사막에서는 흔하게 보이는 게 전갈이라 네가 생소할 거란 생각을 못 했어. 네가 그라타에서 온 것은 알고 있었지만…. 거기엔 사막이 없단 사실을 깜빡한 거지. 게다가 넌 풀에 대해서도 잘 알고 그러니 당연히 곤충이나 벌레 정도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줄 알았지, 뭐야.”

“저도 잠시 여기가 엘버그란 것을 깜빡했어요. 습하고 우거진 숲에서만 사는 숨거미가 여기 있을 리가 없죠.”

릴리는 ‘휴’ 하고 호흡을 가다듬은 후 방그레 웃었다.

“피곤해서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는 줄 알았는데 덕분에 아주 기운이 치솟네요. 감사해요.”

진심인가. 비꼬는 건가. 뭐가 되었든 그녀가 기분을 풀면 되는 거다. 카르낙은 릴리에게서 잔을 건네받아 그 안에 다시 포도주를 채웠다. 이번엔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가 한 말들을 되짚어 보던 릴리는 불현듯 궁금한 것이 생겼다. 그녀는 꿀꺽꿀꺽 포도주를 들이켜는 카르낙에게 물었다.

“그걸 먹었다고요? 전갈이요”

“응.”

그는 빈 잔에 포도주를 다시 채우며 대답했다.

“그래. 저렇게 큰 전갈을 너덧 마리 잡으면 그날은 아주 운이 좋은 거야. 한 끼 정도는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일 수 있으니까.”

“먹여요? 누구에게요?”

“로로… 아니면… 이스바. 이스바는 몸이 약했거든. 아주 현명했지만 형편없는 약골이었어.”

이스바. 스치듯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한 번도 그에 대해 물어본 적은 없었다. 늘 함께 해 왔던 로로는 곁에 있지만 이스바란 사람은 본 적도 다른 이의 입에서 들은 적도 없어서 혹여 아픈 기억일까 걱정이 되었다.

“이스바란 분은….”

“…….”

카르낙이 푹신한 가죽털이 깔린 의자에 앉아 우묵한 잔의 주둥이를 매만졌다. 손길은 느릿느릿했고 무겁게 내리 깔린 눈두덩이에는 불길이 어른거렸다. 그 끝에 매달린 기다린 속눈썹이 그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고 말았다.

“그라타에 있을 때 친자매처럼 붙어 다니던 친구가 있어요, 저는 그 아이를 룬이라고 불렀죠. 착하고 부지런하고… 호기심이 정말 많은 천진한 아이예요. 제가 엘버그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그녀는 온종일 울기만 했어요. 먹지도 자지도 않고요. 언젠가 돌아오겠다고 꼭 돌아올 거라고 몇 번이나 약속을 한 후에야 산막을 나설 수 있었죠. 그때까지도 룬은 계속해서 울고 있었어요. 그 모습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아파요.”

릴리는 발목을 가지런히 모아 손으로 끌어안았다.

“아마 지금쯤은 웃고 있을 거예요. 벌써 1년이나 지난걸요.”

카르낙은 여전히 시선을 내린 채 물었다.

“그 여자가 아직도 널 기다리고 있을까? 네가 돌아오기를?”

릴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희미하게 비치는 미소가 자못 행복해 보였다. 몸은 멀어졌어도 마음은 여전히 그곳을 그리고 있는 듯. 눈앞에 그 풍광이 펼쳐지는 듯, 카르낙은 본적도 들은 적도 느낀 적도 없는 세계로 그녀는 벌써 멀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네. 그럴 거예요.”

“그 여자랑은 얼마나 같이 지냈어?”

“10년 조금 넘게요.”

“난 이스바와 19년을 함께 했어.”

카르낙이 드디어 눈을 들었다. 라일락 눈동자에 붉고 푸른 불길이 일었다.

“기억이 없던 때부터 놈의 마지막 모습까지 전부 다 함께였지.”

릴리는 제 입술을 잘근거렸다. 묻고 싶은 것은 많지만, 묻기가 어려웠다. 또 그가 높이 벽을 쌓고 달아나 버리면 어쩌나. 그것으로 자칫 또 큰 말싸움을 일으키고 싶진 않았다.

“처음엔 내 몸의 반이 갈라져 나간 것 같았어. 눈을 떴을 때도 감았을 때도 괴로웠지. 그러다가 어떤 때는 생각나지 않기도 하고 어떤 때가 되어야만 생각이 나기도 하고…. 결국엔 깨닫게 되더군. 내게 더 이상 그리움이나 괴로움 따위가 남아 있지 않다는 걸.”

그것은 꽤나 잔인한 깨달음이었다. 정신없이 뛰다가 문뜩 뒤를 돌아보았을 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공허함.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지나 기어이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쓸쓸함. 많은 것들을 가졌다고 생각한 순간마다 사실 그는 매번 텅 비워졌다. 자신이 누구였는지 잊어버린 지도 오래되었다. 이스바의 얼굴이 희미해지는 속도와 똑같은 거리로 그에게서 멀어졌다.

“쉽더라고. 누군가 사라지고 영영 볼 수 없게 되는 것도, 그래서 잊는 것도. 마치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아무 잔상도 남기지 않아서 결국 내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지.”

“슬픈 이야기네요, 칼.”

릴리가 부드럽게 대꾸했다. 진심일까. 카르낙은 설핏 미소를 지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네.”

“그렇군. 슬픈 이야기로군. 처음엔 전갈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말이야. 전갈이 좋은 음식이었단 이야기 중이었잖아.”

릴리가 키득거렸다.

“맞아요. 그 이야기였어요.”

“그럼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전갈을 껍질째 불에 구우면 무슨 맛이 나냐 하면….”

그는 잔을 내려놓고 릴리의 곁으로 다가오며 진지하고도 심오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너무도 진지하여 도리어 우스갯소리인 것이 분명한 얼굴이었다.

“새우 맛이 나.”

“새우요?”

“그래. 새우. 리오에서 가지고 온 그 커다란 새우 말이야. 딱 그 맛인 거 같아.”

“…….”

릴리가 눈을 좌우로 굴렸다. 릴리의 입으로 들어갔어야 할 새우가 누구의 입으로 들어갔는지 안다. 몸조리 중인 주방 시녀의 입속으로 들어갔으리라. 그 크고 값비싼 새우들이 말이다.

“말해 봐, 릴리. 네가 누구에게도 빼앗기기 싫은 건 뭐야?”

“누구에게도?”

“그래. 아니면 빼앗아서라도 갖고 싶은 거라도.”

“…….”

빼앗아서라도. 릴리는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빼앗아서라도 갖고 싶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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