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발 아래 은빛 눈-100화 (100/231)

100화

“…전.”

“들었어요. 고뿔에 걸렸다고…. 그렇게 아파 보이진 않는데 말이죠.”

세일린은 어색하게 어깨에 걸친 숄을 올렸다. 거짓말은 못 하는 성격인가 보지. 눈치 빠른 스탠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뭐, 내가 알 바는 아니죠. 보던 거나 마저 보세요. 나도 왕비 전하를 보러 왔으니까.”

세일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직접 뵙고 인사를 드리면 될 텐데요.”

스탠의 얼굴이 뾰로통해졌다.

“그러고 싶은데 국왕 폐하가 내 껍질을 벗겨 낼 기세이셔서….”

‘쳇’ 하며 그는 뒷말을 흐렸다. 그의 시선은 벌써 저 멀리 파니릴리에게 가 있었다. 왕비님을 좋아하는구나. 그의 빛나는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다. 행복함과 기쁨으로 반짝거리는 눈을 보면.

하지만 어떻게? 어쩜 저렇게 행복해 보일 수 있단 말인가. 마음에 품어 놓은 애정을 표현할 수도, 보여 줄 수도 없는데. 심지어 어떻게든 그것을 꾹꾹 밀어 넣어 숨겨야 하는데. 그것이 괴롭지 않나? 가질 수 없는 이를 염원하는 마음이 고통스럽지 않은 걸까?

자신이 발투만 왕을 사모하는 것보다 왕비에 대한 그의 정은 깊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자신이 비틀린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감정도 이토록 괴롭고 어두운 것일까.

“그건 왕비님이 세바스탠 님을 귀하게 여기셔서 그럴 거예요.”

“아아, 그건 나도 알아요. 왕비 전하는 대장간을 좋아하시죠.”

파니릴리는 대장간에 드나드는 것을 좋아했다. 그곳에서 격의 없이 대장장이들과 어울렸다. 대장간의 뜨거움과 사내들의 거친 소음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가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이는 스코크일지 몰라도 그녀가 가장 허물없이 즐겁게 어울리는 이는 세바스탠이었다.

세바스탠과 있을 때의 릴리는 생기가 넘쳤다. 싱그럽고 발랄한 그 또래의 처녀, 그 모습 그대로였다. 때때로 세일린은 그런 둘의 모습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세바스탠은 릴리를 끊임없이 웃게 했으니까.

이제 와 돌아보면 내심 파니릴리 왕비님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가 세바스탠이길 바란 적도 많았던 것 같다. 특히나 발투만 왕이 대장간에서 릴리를 발견하고 질투에 못 이겨 씩씩거릴 때면 더욱 그랬다. 그런 모습에 위안을 받았던 것 같기도 했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누군가를 향한 외사랑에 불행하고 가슴 아픈 게 자신뿐만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당신은 싫어하죠, 세일린.”

“…….”

세일린이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탓할 마음은 없어요. 엘버그인들은 모두 불을 싫어하니까. 그걸 다루는 사람들을 무서워하는 것도 당연하죠.”

“불을 다루는 사람들은 영혼을 두고 악마와 거래를 한다고 들었어요.”

하하하, 하고 스탠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눈은 이제 막 마차 위에 오르는 릴리에게 고정되었다.

“정말이에요.”

세일린이 다시 한번 강조했다. 강하고 단단한 쇠붙이를 만들수록 악마가 그의 영혼을 잠식해 간다고 했다. 그래서 대장장이들은 실력이 좋을수록 단명한다고. 엘버그인들은 대장장이들을 존경하면서도 또한 두려워했다.

강하고 예리한 검을 만들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내어 주는 용기는 아무나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알아요. 모두가 그렇게 말하죠. 하지만 난 그 말을 믿지 않아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미신일 뿐이죠. 당장 스승님을 봐요. 수많은 명검을 만들어 냈어도 아직 잘만 살아 계시잖아요. 누구보다 건강하게.”

그렇긴 하지. 그러나 스코크는 제법 일찍부터 얼굴에 주름이 생기기 시작하여 30대 무렵 이미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들었다. 젊음을 일찍 주고 생명을 더 얻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혹시 그런 오해 때문에 대장간을 멀리했다면 안심해도 좋아요, 세일린. 아직 우리 캘던의 대장간에서 악마와 계약서를 작성한 대장장이는 아무도 없으니까.”

세바스탠은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제법 잘생긴 젊은이였다. 발투만 왕과는 전혀 다른 외모와 분위기. 파니릴리가 왜 그를 그토록 아끼는지도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친절하고 유머러스하며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아, 저기. 이제 떠나시네요.”

세바스탠의 말에 세일린이 국왕 부부의 긴 행렬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막 발투만 왕이 제 흑마에 오르고 있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망토를 휘날리는 그의 모습은 흡사 죽음과 비슷했다. 압도적인 위용을 보고 있자면 배덕한 마음이 든다. 위험하고 비정해 보여 더 탐하고 싶은 욕망 같은 것이.

그러니 잘되었다. 여기에 남아 있게 된 것은 정말이지 잘된 일이다. 왕과 왕비가 긴 여행을 할 동안 자신은 이곳에서 차분히 마음을 정리하며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면 된다.

그들이 돌아올 즈음엔 왕을 향한 저의 사랑도 괴로움도 모두 사라져 평안한 마음으로 왕비를 보필할 수 있길 바랐다. 부디 모든 것이 정리되기를. 괴로운 마음으로 파니릴리를 대하지 않기를. 더할 나위 없이 절실하게 바랐다.

릴리는 차창 밖으로 말을 타고 마차와 속도를 맞춰 달리는 카르낙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말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은 왕좌에 앉아 있는 것보다 더 편해 보였다.

“폐하는 언제부터 말을 타기 시작했나요?”

그녀는 맞은편에 앉은 로로에게 물었다. 기력이 쇠하여 앙상해진 그는 콜록, 하고 새어 나오는 마른기침을 손수건으로 가리며 대답했다.

“하게너성을 점령한 직후부터이니 3년이 조금 더 되었을 겁니다. 폐하.”

“꼭 태어날 때부터 말을 탔던 사람 같아요.”

릴리의 말에 로로는 카르낙의 옆얼굴을 보았다. 말고삐를 느슨하게 잡고 있는 그는 평온하다 못해 지루해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본래 영특하셔서 뭐든 남들보다 빨리 배우셨지요. 특히나 머리를 쓰는 것보다는 몸을 쓰는 것에 더 탁월하시답니다.”

릴리가 살풋 소리 내어 웃었다. 로로는 그녀가 카르낙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배필이라 생각했다. 그녀가 옆에 있으면 카르낙의 냉혹함과 비정함은 잦아들고 그 대신 따스함과 부드러움이 자리 잡았다. 로로는 그것이 본래 카르낙이 가졌어야 할 풍모라 여겼다.

“카르낙은 투로로 태어나서는 안 되었어요. 적어도 엘버그의 평범한 서민으로라도 태어났다면…. 그는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도 능히 엘버그의 훌륭한 위인이 되었을 겁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요.”

평범한 사람. 어떤 이에게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평범하게 태어나 평범하게 자라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 그러나 저나, 카르낙 같은 이에겐 한없이 어렵다. 평범해지는 것은 그저 꿈이나 바람일 수도 있었다.

한참을 달리던 행렬이 숲길에서 멈추었다. 근위대의 종자들이 냉큼 냇가의 양지바른 평지에 왕과 기사들이 쉴 수 있는 천막을 만들었다. 간이 테이블 위에는 테이블을 깔고 빵과 치즈 몇 점을 와인과 함께 놓고 왕과 왕비가 앉을 의자는 푹신한 짐승의 털가죽을 덧씌웠다.

카르낙은 자신의 흑마를 물가에 매어 놓고 제 발아래를 살피며 풀밭을 걷고 있는 릴리에게 다가갔다.

“릴리.”

릴리는 고개를 들어 제 남편을 보았다. 그러고는 방긋 웃었다.

“폐하.”

“뭘 찾고 있는 거야?”

“어떤 풀이 있나 살펴보는 중이었어요. 혹시 눈에 익은 것이 있나 하고요.”

카르낙도 릴리를 따라 제 발아래를 살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이름 모를 잡풀뿐, 그중 눈에 띄는 것은 엄지손톱만큼 작고 하얀 구절초. 카르낙은 몸을 굽힘과 동시에 릴리가 물었다.

“하게너의 영지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카르낙은 제 손으로 꺾은 구절초를 릴리의 귀에 꽂고 저를 볼 수 있도록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요정 같은 외형에 그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쉬지 않고 달리면 3일. 지금 속도라면 그 두 배는 걸리겠지.”

“로로가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안 그래도 쇠약한데.”

“그를 위해 하게너성에 가는 것이니까. 견뎌 주지 않으면 곤란해.”

어머니가 살던 성은 어떤 모습일까. 그녀는 나와 비슷할까. 그곳에서 올라의 흔적을 찾을 수는 있을까. 자신이 태어난 곳은 어떤 곳인지 궁금했다.

만일 로레인이 자신의 사생아를 올라와 함께 멀리 보내기로 결정하지 않았다면 자신이 태어나 내내 살았을지도 모르는 곳. 투로의 사막과 가장 가까운 곳이라 하니 무척 덥고 척박한 땅이겠지.

그리고 그곳에 로레인 하게너의 무덤이 있다고 했다. 카르낙 발투만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른 유일한 엘버그인의 무덤이.

“하게너 영지에 가까울수록 울창한 숲은 멀어질 거야. 대신 대륙을 가로지르는 아주 큰 강줄기와 엄청난 높이의 폭포를 만날 수 있어. 수많은 야생동물과 맹수들, 캘던은 물론 그라타에서도 볼 수 없는 것들이 가득할지도 몰라, 릴리. 그만큼 위험해지겠지만 말이야.”

릴리의 얼굴은 호기심과 흥분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정말 기대되네요, 칼. 무척이나 궁금해요. 하게너의 성도 투로들의 사막도 전부요.”

카르낙이 살아온 환경을 살피면 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겠지. 어쩌면 그가 가진 마음의 벽을 허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네가 즐거웠으면 좋겠어.”

부드럽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편안하면서도 진중했다. 이럴 때면 그는 극악무도한 반역자이자, 왕위 찬탈자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별명들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저 혈기 넘치는 청년, 눈빛과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와 온기를 담은 미남자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릴리는 다정하게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손가락 사이에 벨벳처럼 보드라운 손가락이 감기는 느낌이 황홀하였다. 그래. 너와 손을 잡으면 이런 기분이었지. 따듯하고 보드랍고 한없이 평안해지는 기분.

한차례 포도주와 와인으로 허기를 채우고 말도 충분히 휴식을 취한 뒤 그들은 해가 어두워질 때까지 남쪽으로 계속해서 이동하였다. 다시 행렬을 멈추고 쉬어 갈 준비를 시작한 것은 날이 아주 어두워진 직후였다.

핀은 근위병 몇 명과 함께 산짐승을 사냥해 왔으며 시종들은 커다란 불을 지펴 놓고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왕과 왕비의 막사 안에도 작은 모닥불이 지펴졌다. 파니릴리는 따듯하게 데운 물과 젖은 수건으로 간단히 손과 얼굴을 씻었다.

오랫동안 딱딱한 마차에만 앉아 있었더니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그녀는 채소가 들어간 수프로 간단하게 배를 채운 뒤 곧바로 침대에 널브러졌다. 차라리 말을 타고 싶었다. 그럼 지금처럼 삭신이 쑤시진 않겠지.

차라리 고되더라도 남들보다 빨리 달려 먼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나았다. 그럼 거기선 푹 쉴 수 있겠지. 더운 물에 목욕도 할 수 있을 테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 온종일 잠만 잘 수도 있을 거다. 오랫동안 한 자세로 앉아 있느라 발이 퉁퉁 붓거나 허리가 아플 일도 없을 테지.

“릴리.”

잠시 천막 밖으로 나갔던 카르낙이 제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안으로 들어왔다.

식사를 마친 직후 그는 핀과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더니 그대로 천막 밖으로 나가 버렸다. 릴리는 아무 말 없이 나갔던 연유가 궁금해 몸을 일으켰다.

“받아.”

별안간 카르낙이 무언가를 그녀에게 던졌다. 릴리는 뭣도 모르고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아 들었고 제 주먹만 한 크기의 까만 물체를 보고는 까무러쳤다.

“꺄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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