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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93화 (93/231)

93화

릴리의 대꾸에 카르낙이 걸음을 멈췄다.

“그걸 고스란히 뒤바꾸면 투로들이 죽어 나갈 때 엘버그가 평화로웠다는 것도 똑같이 존중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그럼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될 거 아냐. 나처럼."

"그리고 에이가가 걱정하는 게 바로 그 지점이고요. 평화를 원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 일관적이고도 확실한 주관이지요. 폐하는 고집쟁이시고요.”

“…….”

할 말 없게 만드네. 이 여자랑 지내려면 지금처럼 책을 멀리해선 안 될 것 같았다. 책이라면 진저리가 났지만 맞받아치지 못하는 자신의 무지와 화술에 성질이 나는 것보단 나으리라. 하여간 꼬장꼬장하긴. 차라리 에이가처럼 발끈해서 쏘아붙이는 게 낫지 이 여자는 차분하게 사람을 조져서 더 분하다.

“됐어. 더는 이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카르낙은 머리를 털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릴리도 지지 않고 바짝 따라붙었다.

“방식이 한결같으시네요.”

“무슨 소리야.”

“에이가는 화나게 만들어 이야기를 피하고 저에게는 입을 다물어서 이야기를 피하고.”

카르낙의 걸음이 다시 멈췄다. 아내를 돌아보는 얼굴이 제법 싸늘하였다.

“로로는 알고 있나요? 에나에 관해서요.”

“…….”

“로로라면 폐하께서 믿을 수 있는 분이잖아요.”

“에두르지 말고 똑바로 이야기해, 릴리. 네가 뭘 말하고 싶은 것인지 도통 모르겠으니까.”

“저는 폐하께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 하셨지요. 그래서 제가 필요하다고요.”

“…….”

“그러나 폐하께서 저와 아무것도 나누려 하지 않으시면 제겐 폐하를 도울 수 있는 길이 없어요. 저를 믿을 수 없다면, 그렇다면 믿을 수 있는 이와 이야기를 나누셔야 해요. 에나의 일에 대해서요.”

“요점만 똑바로 말해. 릴리.”

“그의 죽음에 관여되어 계시잖아요.”

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에나의 죽음과 즉위식을 미리 알 수 있었겠는가. 설마 그 정도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둔한 여자로 알았던가. 그것이 아니라면…

“폐하를 비난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릴리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위태로웠다. 아픈 비밀을 들킨 어린 소년처럼 하염없이 떨렸다.

“걱정되기에 하는 이야기예요.”

어떤 것이? 내가 에나를 암살했다는 사실이? 아니면 내가 그를 죽이기 위해 비열한 방법을 쓴 것이?

“그는 날 죽이려 했어. 내 성 안에 제 뱀들을 풀고 나를 모욕했어. 똑같이 대갚음해 준 거야.”

아니. 거짓말이다. 설령 그가 날 죽이려 하지 않았대도 나는 그를 죽였을 것이다. 그가 만에 하나 내게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어도, 설령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했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무엇이 먼저인지 따져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옳은 일을 했어. 내가 살기 위해 죽였어. 내가 옳았어. 무수히 그 말만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그러나 아무리 주문처럼 되뇌어도 릴리의 맑은 눈동자는 모든 것을 날것 그대로 비추어서 자신의 추한 모습을 마주하게 만든다.

너는 나를 초라하게 만들어, 릴리. 꺼내 보이고 싶지 않은 것들이 꼭 네 눈에는 보이는 것만 같아. 어떻게 해야 내가 네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네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너에게 간절히 닿고 싶지만 그것이 고통스러울까 두렵다. 내가 산산조각 나 부서질까 봐. 그 고통을 이길 수 없어 나는 무너지고, 끝내 나를 보는 너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할까 봐. 더는 네가 나를 찾지 않고, 걱정하지 않고, 나를 위해 주지 않을까 봐. 그것이 무엇보다 무섭다. 이런 나라도 받아 줄 수 있겠냐고, 안아 줄 수 있겠냐고 감히 물어볼 수조차 없어.

“반스와 디셋이 어떤 일을 꾸몄는지 밀고한 사람이 저예요. 디셋의 뒤에는 에나가 있었으니 폐하께서 그것을 알고도 잠자코 계실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폐하께선 그 일에 대해 아무것도 말씀해 주시지 않았어요. 저는 그저 어림짐작만 하며 불안해할 뿐이고요.”

카르낙은 다시 한번 릴리의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저에게 숨기는 것이 더 있으세요?”

“너와 이런 이야기 나누고 싶지 않아.”

“…그럼 저와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신지요?”

묻는 목소리가 처연하여 낯빛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슬픈 얼굴이었다.

“아니면… 저와는 그 어떤 이야기도 나누고 싶지 않으신가요?”

그렇지 않아. 그렇지 않다고 대답해야 한다.

“저는 폐하께 어디까지 다가가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

“그 역시 제가 부족한 탓이려나요?”

릴리는 희미하게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것을 보는 카르낙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리쿠스에게 가 보아야겠습니다. 에이가에게 향초가 필요할 테니까요.”

릴리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지더니 카르낙에게서 완전히 몸을 돌려 버렸다.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고, 이름을 부르면 다시 돌아볼 것이란 걸 안다. 그러나 미련한 몸뚱이는 말을 듣지 않는다. 아둔한 혓바닥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

“폐하께선 신을 멀리하시면 안 돼요.”

에이가는 모포를 덮고 아직 불을 피우지 않은 난롯가에 앉아 있었다. 릴리는 리쿠스에게 받아 온 향초를 몸소 피우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에이가는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이 땅은 아마네스 님의 가호로 만들어진 나라예요. 그것을 부정하시면서 엘버그를 다스릴 수는 없어요.”

“폐하는 자신을 엘버그의 국민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설령 그렇다 해도 신에게 버림받은 존재라고 생각하시겠죠. 그러니 그분께 신이든, 에나든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혹시나 당신의 건실함에 감화되어 뒤늦게 각성이라도 하길 바라셨던 것은 아니겠죠, 에이가?”

그러자 에이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확실히 그녀는 지친 상태였다.

“에나에 대한 그의 적대감은 이해해요. 엘버그에 대한 증오도 이해하고요. 그러나 이젠 엘버그의 왕좌에 계시잖아요. 그렇다면 적어도 그런 시늉이라도 하셔야죠. 국왕 폐하 당신을 위해서요. 언제까지 저렇게 청개구리처럼 구시려는지….”

쉽고 바른길로 이끌어 주려 해도 카르낙은 의지가 없었다. 부러 더 삐딱하게 굴었다.

“저를 미워하시는 게 틀림없어요.”

“그럴 리가요. 그분이 당신을 좋아한다는 거 잘 알잖아요.”

“아니면 아직도 저를 못 믿으시는 거겠죠. 제가 폐하의 친우가 아닌 엘버그인이라 여기시는 거죠.”

“…….”

릴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생각이 많아져 깜깜한 난롯가로 시선을 옮길 뿐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시련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어요. 정말이지… 끔찍하리만치 많은 고난을요. 겨우,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폐하께서 한순간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릴까 늘 가슴이 조여요. 정말이지 이러다 제명대로 못 살 것 같습니다.”

그녀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카르낙의 옆에서 좀 멀어질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도저히 왕은 변할 것 같지 않으니까. 그에겐 아무리 애를 써도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벽이 있고 그것을 부술 자신도 없었다. 오랫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한 에이가조차 넘지 못하는 것을 이제 고작 함께한 지 몇 달이 된 자신이 어떻게 감히 넘을 수 있겠는가.

가까워진 것 같으면 그는 여지없이 멀어졌다. 늘 이렇게 곁을 맴도는 기분으로 살아야 하는 걸까. 욕심일지도 모른다. 그를 속속들이 알고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것은. 여기까지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계인데 말이다.

세일린은 부엌 하녀 둘을 데리고 음식이 차려진 쟁반을 든 채 분주히 회랑을 지나고 있었다. 멀리서 안뜰에 들어서는 카르낙이 보였다. 무엇을 하고 온 것인지 땀인지, 물인지 모를 것에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세일린은 고개를 숙이는 것도 잊고 멍하게 그것을 쳐다보았다. 젖은 블리오 밖으로 잘 그을린 흉곽이 선연하였다.

왕과 눈이 마주쳤다. 세일린의 호흡이 가빠졌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말을 더듬거렸다.

“저, 전하께서 오, 오늘은 에이가 님의 방에서 하… 함께 식사하시겠다고….”

“…물어봤던가?”

“죄… 죄송합니다. 폐하! 아… 아둔하여 큰 무례를…….”

세일린은 그제야 벌벌 떨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허리에 찬 장검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짚고 있는 카르낙의 힘줄이 불거진 손도.

“자, 잠시 제가 정신이 어떻게…. 어떻게 됐었나 봅니다. 무례하였습니다. 폐하께서 구… 궁금해하실 거라 멋대로…. 부디,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카르낙은 세일린이 든 쟁반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티 포트와 찻잔, 따듯하게 데운 야채수프와 빵 한 덩이, 모양과 색이 썩 신선하지 못한 과일 몇 점이 전부였다. 한 나라의 왕비가 먹는 식사라기엔 지나치게 초라한 행색.

“이게 전부야?”

“예?”

“이게 릴리가 먹는 전부냐고.”

“…예. 폐하.”

“…얼마 전에 리오에서 진상품을 잔뜩 싣고 왔잖아. 온갖 산해진미가 다 있을 텐데.”

오르티스가 준 황혼의 열매를 들고 눈을 반짝이던 것이 불과 며칠 전이다.

“그런데도 너는 네 주인에게 이런 말라비틀어진 것들을 가져다준단 말이야?”

불벼락이 떨어졌다. 뒤를 따르던 시종들이 잔뜩 몸을 움츠리고 덜덜 떨어 대기 시작했다. 세일린은 간신히 침을 한번 삼키며, 들고 있는 쟁반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애썼다.

“저… 저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뻐끔거리는데 뒷말을 이을 새도 없이 손에 들린 쟁반이 공중으로 들리며 뒤집혔다. 카르낙이 무자비한 손길로 쟁반을 들어 엎은 것이다. 와장창 접시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여종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누군가는 소스라치게 놀라 들고 있던 물그릇을 놓치고 말았다. 사방으로 음식과 도자기의 파편이 흩어졌고 놋그릇들은 신경질적인 마찰음을 내며 바닥을 굴렀다. 세일린은 자신이 비명을 지른 건지 아닌지조차 자각할 수 없었다. 눈앞이 흐렸고 귓가에는 멍한 소음만 들렸다. 다만 호흡하는 법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대로 숨이 멎어 버릴 것만 같았다.

“다시 가져와. 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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