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몇 차례 모래 폭풍이 지나간 뒤였거든. 폭풍이 지나가면 온갖 쓰레기들이 쓸려 오곤 해. 대부분 쓸데없고 더러운 것들이긴 하지만…. 아마 폭풍에 쓸려 어디선가 날아왔겠지.”
번쩍이며 빛을 내기에 처음엔 금이나 은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칼날을 칭칭 감은 마른 줄기들을 풀고 나니 반쯤 땅에 박힌 장검이었다.
“그땐 지금처럼 칼날이 예리하지 않았어. 녹슬고 무언가에 그을려 있었지. 몇 날 며칠 그것을 벗겨 내느라 애를 좀 먹었지만, 때를 벗겨 내고 나니 제법 근사하더군. 그래서 갖기로 했어. 마음에 들었거든.”
그것은 어떤 운명 같은 거였다. 검이 그를 찾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르낙은 하게너 가문의 장자를 죽였다. 예리한 칼날에 그렇게 처음 피를 묻힌 후 검은 언제나 피를 불러왔다.
얼떨결에 살기 위해 휘둘렀던 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견고하고 날카로워져 바람을 가를 때마다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러면 카르낙은 마치 춤을 추듯 그것을 휘둘렀다. 그렇게 무아지경에 빠져들면 누구도 그를 함락시킬 수 없었다.
“그 검은 그럼 어디서 온 것일까요?”
“모르겠어. 모래 폭풍이 서쪽에서부터 불어왔으니… 더 먼 서쪽일 수도 있고… 다른 곳일 수도 있고.”
“더 먼 서쪽이요?”
“사막의 끝 말이야. 거긴 여전히 불길이 치솟는대. 땅이 숯덩이처럼 까맣게 타서 붉게 달아올라 있다더군. 너무 뜨거워 감히 그 근처에도 발을 들일 생각도 할 수 없지.”
“그렇다면 거긴… 누구도 가 본 일이 없겠네요.”
“망자의 영혼조차 녹아 버린다더군. 태고의 저주겠지. 신의 손이 닿지 않은 곳.”
어쩌면 그것은 누군가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막에 버려둔 악마의 물건일지도 모른다. 자주 받은 것들이 모여 사는 곳에 던져 버린 것이 마침 저를 미혹하였고 그렇게 저주에 홀려 죽을 때까지 그 운율에 춤을 추듯 사람을 베며 핏물을 뒤집어쓰고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여도 카르낙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지금의 삶은 사막에서 벌레처럼 짓밟히던 때보다 훨씬 더 사람다운, 그야말로 이제야 인생을 살게 되었으니 말이다.
영혼조차 녹인다…. 릴리는 카르낙의 말을 곱씹었다. 카르낙의 검이 그 불지옥의 너머에서 폭풍을 따라온 것이라면 특별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 너머에서 온 검이라면… 그곳에도 문명이 존재한다는 뜻이겠죠?”
“글쎄, 그럴까. 저 불길 너머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지. 끝없는 사막이 펼쳐져 있을 수도 있고, 엘버그 같은 왕국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영원히 타오르는 불길이 이어져 있는 땅일 수도 있고…. 어쨌든 엘버그에서 주장하는 대로라면 신의 손길이 닿지 않은 저주받은 땅이니 버려진 곳이겠지.”
“엘버그는 정말 광대하고 신비로운 땅이에요. 어떤 곳엔 사시사철 눈이 녹지 않고 어떤 곳엔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장벽처럼 서 있잖아요. 언젠가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요. 북쪽의 얼음도, 투로의 사막도. 그 너머의 세상도요.”
“잘 되었네. 어차피 북쪽으로 떠나야 했는데 말이야.”
“떠나야 한다고요?”
카르낙은 잔에 가득 포도주를 따라 릴리에게 건넸다.
“곧 에나의 즉위식이 있을 거야. 내가 그의 머리에 삼중관을 씌워 주어야 하거든.”
엘버그의 왕은 반드시 즉위식에 참석해 새로운 에나에게 백금으로 된 화려한 삼중관을 씌워 주어야 한다는 것은 그녀도 책에서 읽어 알고 있다. 그러나 새 에나가 탄생하려면 기존의 에나가 물러나거나 혹은….
“그럼… 현재 에나는….”
“뒈졌지.”
무성의한 대답이었다. 자신의 빈 잔에 포도주를 따르는 모양새조차 느긋했다.
“에나가 죽었다고요? 언제 어떻게요? 저는… 아무런 기별을 받지 못했는데요.”
에나의 죽음만큼 중대한 일이 따로 왕에게만 밀지로 전해질 리는 없었다. 만일 그가 죽거나 물러나게 되었다면 필시 왕국 전체에 공표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엘버그의 왕비인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것이 통상적이고 상식적인 절차로 이루어진 일이라면 말이다.
카르낙은 대답하는 대신 잔을 입에 물었다.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 로레인의 죽음을 물었을 때와 똑같았다.
“혹시 제가 알고 있어야 할 것이 있을까요?”
“아니. 없어.”
“단 하나도요?”
릴리가 강한 어조로 되물었다. 카르낙은 조금 망설이다가 곧 대답했다.
“응.”
“…그렇군요.”
그녀의 단념하는 듯한 어조가 몹시도 신경 쓰였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더 말하고자 했을 땐 이미 릴리가 침대에 누운 뒤였다.
“…벌써 자는 거야?”
“피곤하네요.”
릴리가 혼몽한 목소리로 답했다. 카르낙은 떨떠름한 동작으로 잔을 채웠다. 그녀가 자신에게 실망했다는 생각이 들어 몹시도 목이 탔다.
***
다음 날 아침. 거짓말처럼 성전에서 비보가 날아들었다. 에나의 사인은 ‘돌연사’. 북쪽에서 에나의 소식을 가져온 전령은 연회소 바닥에 엎드려 비통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경사스러운 때에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 송구합니다.”
“그리 강건하시던 분이 돌연 병사라니….”
에이가는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마땅히 보여야 할 슬픔을 연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안타까운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자리에 적절한 모양새였다. 그녀의 침통한 언성은 시큰둥하다 못해 뚱해 보이는 카르낙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희석해 주었다.
“새로운 에나는 뽑혔나요?”
릴리가 물었다.
“예, 전하. 새롭게 에나가 되실 분은 베오르토 가문의 타마르 님으로 전 에나님의 영면식을 치른 후에 즉위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그 전에 국왕 폐하께 즉위식의 참석 여부는 물론, 식을 치를 날짜를 받아 오라 하셨습니다.”
“석 달”
“…….”
전령은 되묻지도 못하고 멍하게 고개만 들었다. 에이가가 전령을 대신해 물었다.
“…폐하. 즉위식을 석 달 후에 열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노인의 낯빛이 파리하게 굳었다.
“석 달… 석 달이나 에나의 자리를 비워 둔 채 기다리란 말씀입니까?”
“그렇다니까.”
“…….”
연회소에 있는 자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절반은 이 일의 중대함을 알았고 절반은 이 일의 중대함을 몰라 어리둥절하였다. 에이가는 전자에 가까워 어금니를 아득아득 갈았고 핀은 후자에 가까워 눈알만 굴렸다. 또한, 전자도 후자도 아닌 릴리는 에이가의 낯빛과 태연한 카르낙의 사이에서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에 침조차 삼키지 못했다.
카르낙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덩달아 릴리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누가 저자를 데려가 술과 음식을 대접해라. 다시 먼 길을 돌아가려면 충분히 먹어야 할 테니.”
그 말을 남기고 왕은 성큼성큼 회의소를 빠져나갔다. 에이가는 내내 어금니를 물고 있다가 치맛자락을 붙잡고 왕의 뒤를 쫓았다. 시종 하나가 전령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고 릴리도 곧 그 둘의 뒤를 따라 연회소를 나왔다.
“석 달이라니요!”
아니나 다를까 에이가가 카르낙을 쫓으며 성마른 소리를 냈다.
“넉넉히 출발한다 해도 한 달이면 충분할 거리를 무엇 때문에 석 달이나 기다리란 말씀이세요?!”
“로로를 하게너 성에 데려다줄 거야. 그리고 겸사겸사 리오에 반스 놈 시체가 정말 걸려 있나 확인도 할 거고.”
“로로 님은 근위대가 알아서 잘 모셔 가겠지요! 폐하는 명령만 내리시면 되잖아요! 그리고 유랑은 즉위식이 끝난 이후에 하시면 되잖습니까!”
“내 마음이지.”
카르낙은 펄펄 뛰는 에이가에게 가당치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대체 왜 이렇게 청개구리 같으세요!”
“언성 좀 낮춰. 화통을 삶아 드셨나. 건강해 보여서 좋긴 한데 말이야.”
“에나의 즉위식은 왕의 대관식만큼 중요하다는 거 아시잖아요! 폐하께서 에나를 탐탁지 않아 하시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미 그는 병사했어요. 엘버그에서 왕권과 신권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사이이니 새로운 에나와 척을 져서 좋을 것이 뭐가 있겠어요. 이번 기회에 그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셔야죠!”
카르낙이 부러 귀를 팠다. 그러자 에이가가 파들파들 떨기 시작했다. 저러다 곧 목덜미를 잡고 넘어가지 싶어 릴리가 얼른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손을 뻗어 그녀를 위로하기도 전에 에이가의 사자후가 터졌다.
“폐하께선 그저 사람 목을 베는 것 말고는 무엇에도 관심이 없으세요!? 왜 사태를 수습할 기회가 오면 그것을 일부러 들쑤셔 일을 키우세요!? 울퍼의 일만 해도 그래요! 그런 무식하고 잔인하기 그지없는 작자가 영지의 처녀들을 함부로 겁간하고, 아이고 어른이고 가리지 않고 죽여 대는데 그저 방관만 하라 하시니! 울퍼에 대한 사람들의 증오는 곧 폐하에 대한 증오로 변할 거란 걸 대체 왜 모르세요!”
“에이가….”
릴리가 에이가의 어깨를 짚었다. 그러자 에이가의 마른 어깨가 아래로 축 처졌다.
“다시 없을 좋은 기회를… 언제 또 올지 모르는 좋은 기회를… 왜 매번 이럴 때마다 악수를 두시려 하는지…. 저는 정말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래요.”
“누가 에이가 좀 방으로 데려다주지 그래. 아무래도 안정을 좀 취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야.”
릴리가 세일린을 향해 설핏 고개를 돌렸다. 세일린은 즉각 그녀의 뜻을 알아채고 에이가의 어깨를 부축했다.
“에이가 님. 제가 방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세일린은 에이가를 데리고 반대편 복도로 향했고 릴리는 위태로운 그녀의 뒷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보다 벌써 저만큼 멀어져 버린 카르낙의 뒤를 쫓았다.
“에이가가 원하는 답을 안 주실 거면 그냥 함구하는 게 어떨까요?”
카르낙은 릴리가 제 뒤를 따라 걷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보폭을 줄였다.
“입을 다물면 다문다고 화낼걸. 틀림없다니까.”
“그걸 즐기시잖아요.”
흠. 카르낙이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뭐. 절반 정도는.
“그녀는 온건한 사람이에요. 끊임없는 전쟁과 위태로움이 싫을 때도 되었지요. 그걸 누가 나무랄 수 있겠어요.”
“여기가 언제부터 평화로웠다고. 죄다 뜬구름 잡는 소리야.”
“그러니 더 간절히 원하는 것 아니겠어요?”
“에이가가 원하는 것은 다시 예전의 엘버그로 돌아가는 거야. 투로들이 짓밟히던 때로. 평화라는 건 결국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거라고. 상대적인 거지. 그거 알아? 울퍼의 입장에서 멀루아는 지극히 평화로울걸? 그리고 난 그걸 존중하기로 한 것뿐이야.”
“외람되지만 폐하, 그건 궤변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