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새로운 에나는 누구로 정했어?”
“베오르토.”
베오르토. 일찍이 카르낙은 지금의 에나를 제거 후 그 자리에 앉힐 만한 가문들을 여럿 가늠해 왔다. 베오르토는 그중 하나로 라미레스 가문과는 거리가 멀지만 엘버그 내에선 제법 명망이 있는 가문이었다.
대대로 가문에 사제가 한둘은 꼭 있을 만큼 신앙심은 깊지만 에나를 배출해 낼 만큼 재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으며, 가난한 덕에 마땅한 기반이 없어 늘 위태롭기까지 한 데다가 그 가문의 장자이자, 현재 베오르토 가문에서 배출한 유일한 사제인 하마스 베오르토란 놈은 뒤가 구리기로 유명했다. 멍청한데 겁은 많아서 쥐고 흔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수월한 장난감이었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어. 그렇다고 쉬웠단 이야긴 절대 아니야.”
핀이 뒤 문장을 강조했다. 그래, 네놈이 일을 잘해 준 덕이지. 그것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핀이 말을 이었다.
“자신이 누구의 뒷배로 거기까지 올라간 건지 잘 알고 있을 테니 이제 베오르토 놈이 기어오르지 못하게 잘 밟아 주기만 하면 된다고.”
아무렴. 주기적으로 밟아 줘야지. 감히 디셋 신부나 에나처럼 더러운 술수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아주 납작하게 만들어 놓으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베오르토의 즉위식에는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
그곳에서 새까만 옷을 입은 채로 모두의 앞에서 에나의 머리에 관을 씌워 줄 것이다. 감히 조아린 머리를 들 수 없으리라. 이제 카르낙 발투만은 단지 투로들만의 왕이 아니게 되었다. 미천한 벌레 카르낙 발투만에게는 알기어스 가문의 유일한 핏줄인 파니릴리가 있으니 말이다. 생각만 해도 전율이 일었다. 미친놈처럼 한바탕 웃어 젖히고 싶은 것을 참느라 턱이 절로 꿈틀거렸다.
“그나저나, 왜 잔칫집이 이렇게 초상집 분위기야? 즐겨 볼까, 하고 한걸음에 달려왔건만 술도 없고 음악도 없고 헐벗은 무희도 없잖아.”
“더럽기 짝이 없는 엘버그의 관습 때문이야.”
관습?
“무슨 관습?”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은지 카르낙이 떫은 표정으로 고개만 저어 보였다.
“무슨 관습 때문인지는 몰라도 오늘 밤 내가 품어야 할 계집들보다 중요하진 않지. 설마 모두 다 내쫓은 건 아니겠지? 무희들이 아니라면 어느 고관대작 댁의 미망인, 아니면 그 딸, 그게 아니라면 그냥 부인이라도….”
“옆방에 로리아나란 여자가 있어.”
“…누구?”
핀이 설마, 하는 기세로 다시 물었다.
“로리아나라는 계집. 유명한 창녀라고 하던데.”
“보통 로리아나는 계집이 아니라 마담이라고 불려. 부나비라는 캘던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업소를 운영한다고. 웬만한 귀족들보다 돈이 많을걸.”
이야기만 들어도 열이 후끈 오르는지 핀이 제 가슴께의 블리오 자락을 펄럭여 댔다.
“그런 여자에게 내 병사들이 돈을 퍼 주고 있다는 거야? 돈이라고는 쥐꼬리밖에 없는 거지새끼들이?”
어휴, 하며 핀이 카르낙의 어깨를 탁 짚었다.
“너 같은 놈은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들의 세계란 것이 있단다, 카르낙 발투만. 높은 산일수록 오르고 싶어 하는 욕망 같은 게 있어. 너처럼 하나의 산도 다 정복하지 못한 남자는 알 리가 없지.”
핀은 거드름을 잔뜩 피웠다. 카르낙은 휘장 너머의 릴리를 떠올렸다.
“네 주색이야 잘 알고 있지만 말이야, 핀. 여인을 산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숲이라고 생각해 봐. 그럼 정복하는 대신 탐험하고 싶어질 테니.”
뭐야. 핀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계집 이야기만 나오면 방귀 뀌듯 성만 내던 놈이 이젠 아주 훈계를 한다. 겨우 결혼한 지 반나절밖에 안 된 주제에. 아내가 생겼으니 이제 자신이 어른이라도 되었다 싶은 건가.
배알이 뒤틀리는 한편 그의 자신감 넘치는 눈빛에 기가 눌렸다. 늘 생각해 왔다. 저 황소만 한 놈이 여자를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세상 모든 계집을 제 손에 넣고 떡 주무르듯 주무를 것이 뻔했다.
여인을 모를 때에도 여자들은 그만 보면 침을 질질 흘렸으니 놈이 색을 알게 되면 빨간 머리에 주근깨투성이인 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너 나 할 것 없이 그의 3,219,345번째 여자가 되려 할 것이 뻔했다.
그나마 핀이 여인들에게 남들보다 많은 점수를 얻을 수 있었던 건 근위 대장이라는 멋진 타이틀과 왕의 가장 최측근이란 사실 때문이다. 왕이 계집을 멀리하니 그의 가장 가까운 이에게 더 호감을 보인 것이다.
그때마다 생각했다. 과연 한 여자가 저놈을 감당할 수 있으려나. 저놈이 한 여자에게 만족은 하려나. 그리고 지금 카르낙 발투만은 대단히 자신감에 차 있었다. 새로운 세계에 눈 뜬 이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 핀의 시선이 닫혀 있는 휘장으로 저도 모르게 향했다.
무슨 탐험인지는 몰라도 저는 하지 못할 탐험일 것은 분명했다. 그는 카르낙처럼 잘생기지도, 정력적이지도, 건장하지도, 단단하지도 않으니 그저 자신의 생김새처럼 가볍게 즐겼다가 날렵하게 사라지는 것이 좋았다.
“탐험인지 탐색인지 하여간 적당히 해, 카르낙. 너는 너무 중간이 없어. 왕이 되었으니 이제 왕답게 중도란 것을 한번 지켜보라고.”
“옆방으로 가 봐, 핀. 로리아나에 대한 삯은 내가 지불하지. 발투만 왕가를 위해 지대한 공을 세운 데에 대한 대가다.”
“로리아나는 아무나 받지 않아. 괜히 부나비의 마담이 아니라고.”
“얼마가 되었든 로리아나가 부르는 값의 두 배를 지불하도록 하지.”
“…….”
핀의 눈이 의구심으로 가득했다.
“설마 그것으로 내 공을 퉁치겠단 말은 아니겠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임무였던가. 그것의 값을 다 받으려면 적어도 금화 몇 상자 정도는 내놔야 맞다.
“네가 원치 않는다면 같이 있는 루이스에게….”
“루이스?”
핀이 깔깔거렸다.
“그놈의 동정을 누가 떼 줬는지 알아? 바로 로리아나란 말이야!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놈은 로리아나의 ‘로’ 자만 들어도 거시기가 쪼그라든다구. 하하.”
그러니 둘이 몸을 섞을 리가 없다. 루이스는 제 거시기를 제대로 세우지도 못할 테니 말이다.
“꽤 오래전 이야기 아닌가?”
둘이 근위대가 아닌 방황하던 용병대 시절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못해도 4, 5년은 훌쩍 넘은 이야기일 것이다.
“글쎄, 내가 보기에 대단히 막역해 보이는 사이 같던데. 로리아나와 루이스말이야. 지금쯤 둘이서….”
“그걸로 내가 자극받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야, 카르낙 발투만. 설마 이 정도의 보상으로 내가 만족할 거라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일찌감치 넣어 두는 게 좋아.”
검지를 곧추세우고 경고를 하면서도 핀은 뒷걸음질 쳤다.
“난 받을 수 있는 거라면 모두 다 받겠어. 알겠지? 이것으로 끝이라 생각하지 마.”
주절주절 떠들며 문고리를 잡았을 때 카르낙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핀, 테이먼 테르조는?”
어쩌면 핀에게 가장 먼저 묻고 싶은 이야기였으리라. 제 정적이 아직 살아서 북쪽 땅에 있다. 그를 비호하던 에나가 죽었으니 다소 기세는 누그러지겠으나 놈에게는 여전히 강력한 추종자들이 존재한다. 그러니 그를 죽여야 비로소 이 엘버그는 카르낙 발투만의 것이 된다. 그렇게 되어야만 사방에 똬리를 틀고 있는 반역자들이 사라지리라.
“건재해. 아직까지는.”
“…….”
핀의 대답에 카르낙은 묵묵히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더는 궁금한 것도, 듣고 싶은 것도 없다는 듯이. 그러나 꾹 다물린 턱, 불꽃을 항해 있는 선연한 눈동자만은 그의 심정을 묵직하게 드러냈다.
“그럼, 좋은 밤 되십시오. 폐하.”
핀이 문을 열고 예의를 차려 인사를 건넸고 카르낙이 똑같이 예의를 갖추어 답했다.
“즐거운 시간 보내길, 핀.”
곧 문이 닫혔다. 카르낙은 의자에 털썩 앉아 잔을 채웠다. 에나라는 썩은 살은 도려냈고 알기어스의 핏줄과 결혼해 제 왕권의 정통성도 갖추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테이먼 테르조를 상대하는 일.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북쪽 땅으로 가야 하고 그렇다면 반드시 테이먼 테르조를 마주해야 했다. 에나의 땅에서는 엄격히 전쟁을 금지하고 있다지만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없다.
베오르토가 생각이라는 것이 있는 놈이라면 어떻게든 제 구역에서 테이먼 테르조를 쫓아 내려 하겠지. 발투만 왕가를 뒷배로 두고 있는 베오르토에게도 테이먼 테르조는 적일 수밖에 없을 테니.
카르낙은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가로 갔다. 꼼꼼하게 쳐 둔 휘장을 젖히고 이불속에 파묻혀 곤히 잠든 릴리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쩌면 파니릴리는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자유로워질지도 모른다. 이제 막 첫날밤을 함께 보낸 남편의 목숨은 언제 끊길지 장담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전쟁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길거리에서 반역자의 칼에 찔려 비명횡사를 할 수도 있다.
자신이 죽으면 파니릴리는 미망인으로 캘던성에 남아 새로운 남편을 맞이하거나 아니면 저 혼자 발투만 왕가를 이끌어야 한다. 그녀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하지만 릴리, 너에게 그렇게까지 가혹하게 굴진 않으마. 지금으로도 네겐 충분히 가혹할 테니. 자신이 죽으면 릴리는 그라타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살아남은 자가 누구든 릴리가 원한다면 그 누구든 태워 그라타로 달아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그곳에서 진정 그녀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리라. 그러니 릴리….
카르낙이 곱아든 릴리의 손을 다정히 잡으며 속삭였다.
“지금은 내 곁에 있어 다오.”
내가 죽을 때까지만. 그때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