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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77화 (77/231)

77화

“아흣!”

릴리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가 시트로 나풀거리며 추락했다. 절정의 여운으로 파르르 몸을 떨며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카르낙의 혀가 제 클리토리스를 지분거릴 때마다 몸이 절로 움찔거렸다. 릴리가 이마에 달라붙은 제 머리카락을 쓸며 더듬더듬 말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칼, 이제 됐… 됐어요. 그만… 그만해요.”

“…….”

“칼… 그만, 내 말 들었어요?”

릴리가 그의 머리카락을 쥐고 당겼다. 열중하던 라일락 빛깔 눈동자는 그제야 제 아내의 말간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엔 아직도 생기가 넘쳤다. 아침 일찍부터 단장에, 결혼식에, 그 와중에 반역자 색출에, 연회에, 첫날밤까지 그 많은 일들을 겪고도 지치지도 않는지 도저히 그에게서 피곤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릴리는 달랐다. 그녀는 하루 종일 많은 일들에 시달리느라 노곤했다. 남편과 살을 비비고 즐거움을 나누는 것은 더없이 기쁘지만 이젠 희열에 들떠 몸을 뒤트는 것보다 따듯한 이불에 파묻혀 곤히 잠드는 것이 더 필요했다. 그러니 이제 그만 제 몸을 놔주었으면 싶었다.

“들었어.”

카르낙이 씩 웃으며 한참 만에 대답했다. 릴리는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웃었다.

“그럼 이제….”

“좀 더 하면 더 좋을지도 모르잖아.”

“뭐… 칼!”

그가 다시 얼굴을 묻으려는 걸 릴리가 턱을 붙잡아 당겼다. 그러자 카르낙이 웃음을 터트렸다.

“짓궂으시네요.”

릴리가 곤란한 얼굴로 핀잔을 주었다. 카르낙은 아내의 샐쭉한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진심이었어, 릴리. 네 신음 소리는 듣기 좋거든.”

“저는 목이 아플 뿐이랍니다. 폐하.”

“그게 더 흥분되더라.”

릴리는 사색이 되어 그의 아랫도리를 확인해 보려 시선을 내렸다. 설마 또!

“하하.”

웃고는 골리는 대로 반응하는 모양이 귀여워 카르낙이 와락 제 아내를 안았다. 그러고는 귓가에 농담이라 속삭였다. 릴리는 ‘휴’ 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따듯한 남편의 품에서 안도감을 느낀 탓인지 무거운 눈꺼풀이 느리게 내려앉았다.

“미안해요, 칼. 너무 아파해서….”

잠이 오는 듯 말하는 릴리의 목소리가 몽롱하였다. 카르낙은 그녀가 제 가슴에 기댈 수 있도록 자세를 바꿔 누웠다.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팔베개를 한 손으로 가느다란 은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카르낙은 그녀의 사과를 곱씹었다.

두 번째 삽입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릴리가 너무 아파했고 카르낙도 그렇게까지 그녀의 몸 안을 헤집고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사실 그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았다. 그녀의 구멍도 좋았고 그녀가 손으로 수음해 주는 것도 좋았다.

또 그녀의 몸을 만지는 것도 좋았고 그녀의 가랑이 사이를 맛보는 것도 좋았다. 그 모든 것이 너무 신기하고 새롭고 흥미로울 따름이었다.

“로리아나에게 어떻게 하면 빨리 좋아질 수 있는지 물어볼게요….”

“여러 번 하면 익숙해진댔어.”

“…….”

“적어도 세 번 정도는 아프대. 그러다가 조금씩 괜찮아지면서 여자도 좋아하게 된대.”

“…….”

“그러니까 많이 하면 할수록 더 빨리 괜찮아지겠지. 안 그래? 릴리?”

“…….”

“릴리?”

별다른 동의가 없었다. 또한 이렇다 할 기척도 없었다. 카르낙은 제 아내의 얼굴을 흘깃 쳐다보았다. 길고 예쁜 속눈썹이 그녀의 뺨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규칙적이고 낮은 숨소리가 새근거리며 그의 가슴팍에 간지럽게 내려앉았다.

복숭앗빛 뺨에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몇 가닥 어지럽게 붙은 채였다. 몸의 열기가 식기도 전에 아내는 벌써 깊은 잠에 빠져 버린 것이다. 카르낙은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와 베개 사이에서 제 팔을 빼내고 헐벗은 릴리의 몸 위에 깃털처럼 부드럽고 따듯한 공단을 덮어 주었다.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떼어 낸 후에는 아예 자리를 잡고 모로 누워 단잠에 빠진 릴리의 얼굴을 감상했다.

많은 이들이 카르낙의 곁에 있지만 그가 완전히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아주 오래전 이스바가 그의 곁을 떠난 이후에는 저와 영혼이 이어져 있다고 믿을 만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핀도, 로로도, 에이가도 모두 소중하지만 언젠가 모두 놓아주어야 할 타인이었다.

자신의 성공이나 행복이 그들에게도 행복이 될지 확신할 수 없고 반대로 저의 고통이나 불행이 그들에게도 같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니 남이었다.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곁에서 잠이 든 이 여자는 저와 많은 것을 공유하며 자신의 불행은 그녀의 불행이, 자신의 기쁨은 그녀의 행복이 될 것이었다. 그러니 릴리, 너는 내 것이지. 완벽하고 무해한 나의 것. 카르낙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릴리의 유려한 턱선을 따라 그리듯 쓰다듬었다.

똑똑.

누구도 두드려선 안 되는 시각에 두드려선 안 되는 문을 두드렸다. 혹여 제 아내가 잠에서 깰까, 손바닥으로 그녀의 귀를 누르는 카르낙의 눈빛이 돌연 날카로워졌다.

“폐하.”

떨리는 듯한 저음의 목소리는 분명 로로의 것. 카르낙은 릴리의 귀를 감싼 채 고요히 침묵했다. 그러자 로로가 말을 이어 갔다.

“근위 대장 핀이 돌아왔습니다.”

드디어. 카르낙은 릴리가 깨지 않게 아주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 번 더 공단 이불을 꼼꼼히 덮어 주고 침대의 휘장을 내렸다. 양탄자에 아무렇게나 구겨진 가운을 집어 걸쳐 입고는 허리끈을 묶으며 그는 밖의 사람들이 확인될 만큼만 문을 열었다.

이윽고 카르낙의 보라색 눈이 나타나자 로로가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곧장 핀의 전신이 카르낙의 앞에 드러났다.

카르낙은 집게손가락을 세워 제 입술에 붙여 조용히 하란 신호를 보내고 고개를 까딱였다. 핀은 입 닥치고 조용히 들어오라는 그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미약하게 열린 문 틈새로 아주 조심스럽고 민첩하게 몸을 미끄러트려 들어간 후 딸깍 소리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문을 닫았다.

미미하게 피워진 벽난로 때문인지, 아니면 여전히 흐트러지고 난잡한 기운이 감도는 카르낙 때문인지 방 안이 후끈했다. 핀은 휘장이 쳐진 침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카르낙이 포도주가 든 잔을 건네며 말했다.

“자고 있어. 조용히 말해.”

핀은 단번에 잔을 비웠다. 푹 젖은 탓에 오한이 들었다. 그는 카르낙을 따라 벽난로 근처로 걸음을 옮기며 속삭였다.

“일단 축하의 말은 건네야겠지. 성혼을 축하드립니다. 발투만 폐하.”

핀은 장난스레 무릎과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카르낙은 집어치우라는 의미로 그에게 과일 한 움큼을 던졌다. 핀은 낄낄 웃으며 망토를 벗고 제 가슴팍에서 작은 천 주머니를 꺼냈다.

“자, 결혼 선물이야.”

카르낙은 제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핀의 얼굴을 주시했다. 작은 주머니는 피에 젖어 있었다. 붉은 주근깨가 가득한 핀의 얼굴은 기대와 농담으로 유쾌했지만 그런 핀을 살피는 카르낙의 표정은 건조하고 날카로웠으며 전에 없이 무거웠다. 일의 중대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왕은 망설이지 않고 핀의 손에서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뒤집어 몇 번 털기가 무섭게 기다랗고 차가운 것이 카르낙의 손바닥 위에 툭 떨어졌다.

늙고 쪼글쪼글한 손가락. 카르낙은 그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알아보았다. 라미레스 가문의 문장. 그렇다면 이 볼품없는 손가락의 주인공은 에나임이 분명했다. 카르낙의 얼굴에 비로소 광기에 찬 미소가 피어올랐다.

“놈의 손가락을 자르는데 애를 좀 먹었지. 시신을 훼손하면 안 된다나 뭐라나.”

“사인은?”

“복상사?”

카르낙은 짧게 웃음을 터트리고 죽은 에나의 손가락을 벽난로에 던져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살 타는 냄새가 방 안에 진동했다. 카르낙이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비소했다.

“더러운 놈에게 어울리는 더러운 죽음이군.”

핀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좆이 달린 사내라면 계집질을 마다할 리가 없잖아. 아무리 신앙심이 깊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카르낙은 코웃음을 치며 반지를 손안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곧 새로운 에나의 대관식이 있겠군.”

“물론이야. 곧 북쪽에서 전령이 올 거야.”

왕과 에나는 서로에게 뗄 수 없는 존재, 왕의 대관식과 결혼식을 에나가 주관하듯 에나의 즉위식과 장례식에는 왕이 참석해야 했다. 죽은 이의 장례는 새로운 에나의 즉위식 이후에 치를 테니 무엇보다 왕이 즉위식에 참석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만약 둘 중 하나만 참석할 생각이라면 말이다. 그리고 카르낙은 반역자의 장례식 따위에 참석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장례는커녕 그 자식의 시체를 독수리 밥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

“내 손으로 죽였어야 했는데.”

카르낙이 어금니를 짓씹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와 그런 소리 마. 사고사로 꾸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늙은 영감탱이가 의심은 왜 그렇게 많은지 자칫하다간 내 목도, 네 목도 날아가 버릴 것 같더라니까.”

카르낙은 씁쓸하게 웃으며 저 혼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핀을 시켜 놈을 은밀히 암살해 버리라고 시키지 말았어야 했다. 그 교활한 늙은이가 뒤에서 이런 계략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디셋 사제에게 그랬듯 군사를 끌고 가 성전의 앞마당에서 그의 머리를 잘랐어야 했다.

감히 나를 위협하면 이렇게 되노라고 선포하며 놈의 피를 그 새하얀 바닥에 뿌렸어야 했다. 그랬다면 에나 따위, 신의 대리자 따위를 없앨 수 있는 명분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더는 누군가와 권력을 나눠 먹거나, 나눠 먹는 척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터였다.

조금만 더 빨리 눈치챘더라면…. 아니, 아니다. 파니릴리가 아니었다면 에나와 리오의 일당들이 어떤 계략을 꾸미는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터. 그랬다면 지금쯤 저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진작에 목이 달아나 지옥의 구렁텅이로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놈이 언제부터 이 계략을 꾸몄는지 파악하기도 힘들었다. 디셋을 이곳에 보내 성혼식을 치르게 하는 계략은 필시 모래 폭풍이 일어나기 한참 전이었을 거다. 반스 이드위너와 협작하여 뛰어난 실력의 암살자를 매수한 것에는 분명 오랜 시간이 걸렸을 터였다. 정말이지 진절머리 난다.

이 엘버그라는 왕국, 그 안에 사는 모든 인간들. 간교하고 사악하고 불온하며 잔인하고 비열하기 이를 데 없는 뱀 같은 자들. 그들은 어디서나 똬리를 틀고 있다. 대체 어디까지 밟아야 제 발밑에 조용히 엎드려 살겠는가. 하나하나 제 발로 짓이겨 줘야 그제야 그 대가리를 조아릴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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