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에이가, 사실 오늘 예배당에서의 일은….”
“알고 있습니다, 전하.”
에이가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파니릴리의 손을 꼭 잡았다.
“선뜻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어요.”
“나이를 먹을수록 아집이란 것이 생기지요. 전하께서 무엇 때문에 고민하셨는지 압니다. 그러나 심려치 마세요.”
파니릴리라면 필시 이 일에 있어 에이가가 방해된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리고 에이가는 감히 그녀의 생각이 틀렸다고 할 수 없었다. 만일 그 계획을 사전에 알았더라면 에이가는 필시 처음엔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다가, 사실임이 밝혀진 이후에는 믿을 수 없어 전전긍긍하다가, 그 이후에는 사사건건 엘버그의 정신을 빌미로 그들의 계획을 저지했을 것이다. 에이가는 차분히 말을 끝맺었다.
“옳은 결정이셨습니다.”
자신의 신념은 꽤나 맹목적이었다. 신앙심을 지키는 데는 그간 많은 고비가 있었지만 에이가는 아주 오랜 세월 그 신앙에 의지해 살아왔다. 그녀의 인생을 차지하는 것은 로레인과 신에 대한 믿음이 전부였다.
그것을 잘 알기에 릴리는 에나의 반역을 숨겼던 것이다. 에이가에게 알리고 그것을 납득시키려 진땀을 빼느니 아예 그녀를 사건에서 배제함으로써 모든 것이 신속하고 매끄럽게 흘러가길 택했다..
에이가는 파니릴리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같은 위치에 있었어도 그와 같이 결정했으리라. 릴리는 선하나 순한 여인은 아니었다. 그녀는 카르낙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자신이 릴리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듯이.
“저에겐 여전히 에이가, 당신이 필요해요. 당신의 그런… 그런 고집이요. 당신은 나와 반대편에 있는 추와 같아요. 당신이 있어야만 비로소 모든 것에 균형이 잡히지요.”
“전 늘 아가씨의 뒤에 서 있고 싶었는데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군요.”
“당신이 없으면 난 무너질 거예요. 어디에서든지요. 그러니 부디 지금처럼 제 곁에 있어 주세요.”
“싫다 하셔도 곁에 있을 겁니다. 어디에 계시든지요.”
에이가는 웃으며 릴리의 뺨에 다정히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세일린에게 당부했다.
“세일린, 폐하가 오시기 전 왕비님의 샌들을 벗겨 드리렴. 예쁜 머리카락도 한 번 더 빗겨 드리고.”
“네, 에이가 님.”
“신선한 과일과 질 좋은 포도주를 미리 준비해 두었습니다.”
에이가가 시선을 주는 곳을 따라 릴리도 고개를 돌렸다. 은은하게 불이 지펴진 벽난로 근처, 진줏빛 보가 깔린 탁자 위에 딱 한입에 집어 먹기 좋은 과일 접시와 동으로 만든 잔 두 개, 포도주가 담긴 화려한 병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으니 분명 새벽녘엔 추워질 거예요. 신혼 첫날밤엔 함부로 들어올 수 없으니 미리 준비한다 하여 나쁠 것은 없지요.”
신혼 첫날밤. 처음엔 모든 것을 쉽게 생각했었다. 무지하기 때문에 결혼과 출산이라는 것을 그저 여자가 태어나 자라며 당연히 겪어야 하는 성장과 진배없을 것이라 가볍게 여겼다.
한 여인이 사내를 만나 이루는 가정이란 생명을 가진 것들이라면 마땅히 하는 일들이 아닌가. 그래서 릴리는 그것이 특별하다 여기지 않았다. 응당 누구나 거쳐야 하는 일임에도, 보는 시선에 따라서는 별다를 것이 없는 삶의 과정 중 하나일지라도 그것이 당사자들에겐 얼마나 중요하고 특별한 일인지 릴리는 이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떨리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결혼을 하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신혼의 첫날밤은 막상 당사자에겐 심장이 뛰고 호흡이 가빠질 만큼 특별하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그럼 편안한 밤 되십시오, 전하.”
에이가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자꾸만 호흡이 가빠져 릴리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켜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조금 더 머물러 달라고 하고 싶었다. 혼자 있으면 두려우니 함께 있어 주면 안 되겠냐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런 나약한 모습은 보일 수 없었다. 안 그래도 고단했을 사람에게 괜한 걱정을 끼칠 순 없었다.
“아가씨, 신발을 벗겨 드리겠습니다.”
세일린이 의자를 당기며 말을 붙이자 릴리는 손으로 먼저 더듬더듬 그녀를 찾았다. 세일린이 얼른 릴리의 두 손을 잡았다. 긴장으로 눅눅해진 손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세일린이 릴리의 안색을 살폈다. 하얀 옷을 입어서인지 릴리는 유난히 창백했다. 고개를 돌려 얼굴을 마주하자 숨을 내쉬는 주인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불을 조금 더 땔까요?”
날이 추워서 한기를 느끼시는 걸까 싶어 묻자 릴리가 도리질을 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그냥 잠시 이렇게 있어 줄래요?”
이렇게 떠는 릴리를 보는 것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네, 전하.”
그러나 세일린은 그런 빛을 숨기고 릴리의 차가운 손을 잡아 열심히 문질러 주었다. 세일린은 파니릴리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면 서둘러 포도주를 한 잔 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술기운이 그녀의 한기를 조금은 녹여 주리라.
에이가를 따라 파니릴리가 먼저 연회장을 빠져나간 후 카르낙은 연거푸 술잔을 들이켰다. 간절하게 핀이 그리웠다. 이 덜떨어진 멍청이는 왜 여태껏 돌아오지 않는가. 그놈이 옆에서 헛소리나 살살 해 주면 좋을 것을. 필요 없을 땐 진절머리 나게 떠들더니 막상 그것이 필요할 땐 없다.
하객들은 슬슬 왕을 곁눈질하며 저들끼리 은밀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왕이 언제쯤 이 연회장을 벗어나 왕비의 침실에 들지 내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안색을 하고 있으려니 과음은 필수였다.
그러나 연거푸 술잔을 들이켜도 엉덩이에 뿔이라도 난 것인지 가만히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다리를 떨고 손가락으로 불안하게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폐하, 지나치게 폭음하십니다.”
잠자코 뒤에서 지켜보던 로로가 훈수를 두었다.
“나도 알아.”
카르낙은 성의 없이 답했다. 다시 잔을 채우라는 명령에 시종이 병을 들고 다가왔다. 그러나 로로가 손을 들어 그것을 제지했다. 늘 온화하여 카르낙을 반하는 일이 없는 늙은이는 이렇게 한 번씩 단호해지곤 한다. 그런 때가 되면 카르낙은 로로를 꺾을 수 없었다.
“이러다 취해 여기서 뻗으시면 모두의 웃음거리가 됩니다. 신부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십시오.”
누구는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어 이러나. 이 자리에서 침실에 있을 파니릴리에게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누가 뭐래도 자신이었다. 거기서 그녀가 저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이토록 불안한 것이다.
단둘이 된 적은 많았다.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두려움이 엄습하고는 했으나 이제는 그 도가 지나쳐 무서울 지경이었다. 내가 릴리를 어떻게 해 버리면 어쩌지? 상처를 주거나 아프게 하면? 정신을 잃고 그녀가 싫어하는 짓을 해 버리면? 싫다고 해도 듣지도 못하면? 망아지처럼 미쳐 날뛰다가 도망이라도 가면?
파니릴리는 너무 연약했고 자신은 그녀에게 너무 거대했다. 짐승처럼 변하면 어떻게 하지? 머릿속을 혼탁하게 만들던 욕망들을 제어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그녀에게 못 볼 꼴을 보이면? 그러다가 망가뜨리면?
자신이 잔인해질까 무서웠다.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은 더 무서웠다. 참아 온 욕망이 어떻게 터질지 알 수 없어 불안했다. 그녀를 만지다가 부숴 버릴까 봐 겁이 났다. 그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이 막막했다. 무슨 짓을 해도 용납이 되는 밤이라는 것이 말이다. 누구도 뛰어 들어오지 않고, 누구도 자신을 말리지 않으며, 누구도 그 상황을 제어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무서웠다.
누군가 제게 목줄을 채워 주었으면 싶었다. 그래서 릴리가 싫어할 만한 행동을 하면 그걸 죄어 당겨 주었으면. 그러면 조금 마음이 편안해질 거다. 조금은 덜 불안하고 덜 복잡한 마음으로, 그만큼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릴리에게 향하리라. 하지만 없잖아! 아무도 없잖아! 그걸 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
“폐하.”
로로가 한 번 더 지긋이 독촉했다. 하는 수 없이 카르낙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하객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고 휘파람을 불고 손뼉을 치고 테이블을 두드리며 야단을 떨었다.
몇몇이 본때를 보여 주라며 소리를 쳤고 몇몇은 살살하라고 다그쳤다. 그러고는 저들끼리 웃고 떠드느라 난리였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그 역시 이런 난잡함을 즐겼으리라. 그들 사이에 껴 같이 저급한 농담을 하며 손뼉을 쳤으리라.
왜냐하면 남이 당하는 것은 즐겁거든. 얼마나 재밌고 유쾌했던가. 그러나 막상 당사자가 되자 곤욕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속이 뒤틀려 모두 주둥이를 닥치라고 하고 싶었지만 이미 한 차례 예배당에서 피를 보았으므로 참아야 했다.
하객들을 또 공포에 몰아넣을 순 없었다. 그래서 카르낙은 하객들의 짓궂은 환호성을 뒤로하고 연회장을 나섰다. 로로가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악사가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하객들은 무엇이 그토록 좋고 신이 나는지 한층 더 왁자지껄하게 떠들었다.
복도를 지나 회랑을 돌고 로로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환한 횃불이 밝혀진 방 앞에 에이가와 세일린이 보였다. 둘은 카르낙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왕비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차라리 안 기다렸으면 좋겠다. 기다리지 않고 뭐라도 하고 있었으면, 아니면 과음에 곯아떨어져 있었으면. 그럼 맘 편히 그녀의 옆에 누워 자는 얼굴을 지켜보고 어루만질 수 있을 텐데. 자는 여자를 상대로 뭘 하진 못할 테니 저 역시 마음껏 릴리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잠들어 버리리라. 그러면 서로 무안할 것도, 두려울 것도, 겁이 날 것도 없다.
세일린과 에이가가 옆으로 비켰다. 이제 카르낙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단단한 나무 문뿐이었다. 황금색 손잡이와 경첩이 달려 있는 무겁고 튼튼한 나무 문. 그러니 남자답게 굴어 카르낙. 남자답게 굴지 못하겠거든 그럼 적어도 왕답게는 굴어라. 지켜보는 눈들에 비소가 차오르게 하지 마라. 카르낙은 제 어금니를 꽉 물고 손잡이를 잡아 힘껏 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