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여전히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에나와의 전면전은 말 그대로 국토를 완전히 둘로 가르는 대전쟁이 될 것이다.
지금껏 흘린 피보다 더 많은 피를 흘려야 할지도 모른다. 이제 막 평화를 찾았는데, 이제 막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하고 에이가는 낙담하였다.
“폐하께서 염두에 두신 게 있습니다.”
로로가 주변을 한 번 더 살피더니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염두에 두신 것?
“염두에 두시다니요? 무엇을 말인가요?”
“에나에게 집전 거절 편지를 받았을 때 이런 날이 올 것을 예감하시고, 그 이후로 계속해서 믿을 만한 자들을 포섭해 오셨지요.”
“…….”
에이가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려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그래, 그때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은 감지했었지. 그러나 에이가는 독실한 신앙심으로 그것을 무시했다. 설마 에나가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은 모르고.
그 빌어먹을 작자 때문에 신앙에 의문을 품게 생겼다. 그것만으로도 그놈의 멱살을 쥐고 끌어 내리고 싶어진다. 그 자식을 그냥 바닥에 패대기를 친 다음에 모든 권력을 몰수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보니.
“핀….”
그래. 핀이 없다. 왕의 오른팔이. 그때 에나를 만나러 카르낙과 함께 브롱힐즈로 향한 이후 왕은 홀로 돌아왔다. 핀의 행방을 묻자 카르낙은 놈은 할 일이 있다고 했다. 핀이 에나와 관련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분명해졌다.
그럼… 그럼 핀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가장 충직하고 믿음직한 자에게만 은밀히 시킬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에나를 암살할 계획인가요? 아무 대책도 없이요?”
로로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에이가의 어깨를 토닥였다.
“설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디셋의 반역이 입증된 마당에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디셋이 에나의 사주로 일을 꾸몄으리라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그것을 증언해 줄 디셋도 죽어 버렸고….”
“아직 반스 이드위너가 남아 있지요.”
“그가 과연 배후가 에나라는 것을 증명해 줄까요?”
“그거야 모르지요.”
반스 이드위너가 이 모든 일의 이면에 에나가 있음을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 악랄하기로 소문난 카르낙의 고문에 입을 열 수도, 또 굳건한 신앙심으로 입을 다문 채 죽음을 택할 수도 있다. 무엇이든 후자일 경우에는 좀 더 계획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에이가는 뾰족한 어투로 물었다.
“이번 일에서도 절 제외하실 생각인가요? 로로?”
“그럴 리가 있나요. 모든 것이 밝혀진 마당에 더는 숨길 것도 없답니다. 이제 모두가 에이가의 지혜를 빌려야 할 때지요.”
“저 같은 늙은이보다야 파니릴리 아가씨께서 더 현명하시겠지요.”
로로는 웃으며 에이가의 어깨를 다정하게 안아 다독였다.
“현명한 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에겐 더 많은 이득이 아니겠어요? 게다가 망아지 같은 폐하에게 발길질을 해 줄 사람은 당신뿐이랍니다, 에이가.”
로로의 말에 에이가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목청은 크지요.”
“이제 들어가 연회를 즐기십시다.”
어찌 되었건 축복받은 날이다. 기뻐 마땅해야 할 날이었다. 그러니 이 고귀한 결합을 마음껏 기뻐하고 즐겨야 한다. 그것이 엘버그의 국민이자 왕의 충성스러운 신하로서의 도리였다. 에이가는 로로를 따라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악사의 경쾌한 음악이 소란스럽고 활기찼다.
릴리는 가장 큰 테이블의 가운데에 카르낙과 나란히 앉아 하객들이 연주에 맞춰 쉴 새 없이 춤을 추며 빙글빙글 도는 것을 구경했다. 카르낙은 춤을 추지 못한다 했다. 결혼 준비를 하며 배우긴 했지만 릴리 역시 남녀가 어우러져 추는 춤은 낯설었다.
춤을 즐기긴커녕 선생의 발을 밟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러니 차라리 카르낙이 춤을 추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몇 번이고 왕의 발을 밟고 말았을 테니.
하지만 함께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도는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터질 만큼 흥겨웠다. 사내들은 드레스를 한껏 차려입은 숙녀의 허리를 번쩍 들었다가 내려놓곤 했다. 그럴 때마다 숙녀들은 웃음을 터트렸고 릴리 역시 몇 번이고 그들을 따라 웃음을 터트렸다.
“저 여자는 취한 게 틀림없어.”
카르낙이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릴리는 카르낙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주었다. 그의 말대로 기껏 장식한 머리가 격렬한 춤으로 흐트러지고 있음에도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음을 터트리며 빙글빙글 돌았다. 릴리가 물었다.
“이런 자리에서 왕보다 먼저 취하는 것도 반역이 되나요?”
카르낙은 입술에 잔을 가져다 댄 채 피식 웃으며 제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충정이라 할 수 있지. 날 웃겨 주잖아.”
릴리는 키득키득 웃었다.
“폐하를 위해서라면 저도 어서 취해야겠군요.”
“마시고 테이블에 드러눕지만 마. 수습하기 힘들어지니까.”
“장담하기가 힘드네요. 취할 만큼 많이 마셔 본 적이 없어서 저의 주사가 뭔지 저도 모르거든요.”
카르낙이 릴리의 잔에 저의 잔을 한 번 부딪혔다. 그러고는 잔을 살짝 들어 올리며 미소 지었다. 하얀 이가 가지런히 드러났다.
“파니릴리 알기어스의 새로운 자아를 위하여. 건배.”
와인을 단번에 털어 넣는 카르낙의 옆모습이 든든했다. 파니릴리는 그의 옆에서 깊은 안정감을 느꼈다. 그 안정감에서 솟구쳐 오르는 벅찬 감정은 생전 겪어 본 적이 없어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차마 무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 자꾸만 제 가슴을 뚫고 나오려 했다. 릴리는 진정하기 위해 크게 숨을 들이켰다 천천히 내쉬었다. 머릿속으로 몰려들어 오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몰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에이가가 그녀를 부르는 바람에 실패했다.
“전하. 이제 그만 침실에 드셔야 할 시간입니다.”
릴리는 에이가를 따라 침실로 향하며 얼마 전, 로리아나에게서 들은 말을 떠올렸다.
“처음엔 아주 고통스러울 거예요. 하지만 익숙해지면 견딜 만해요. 만일 폐하께서 남다른 사내라면 아가씨는 이 세상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쾌락을 알게 되실 겁니다.”
‘고통’이란 단어만큼 후술된 ‘쾌락’이란 단어도 신경 쓰였다. 릴리는 기쁨이나 즐거움, 행복이나 감탄 따위의 감정은 느껴 본 적이 있으나 ‘쾌락’이란 것은 경험해 본 일이 없었다. 그것은 어떤 감정과 비슷하냐는 릴리의 물음에도 로리아나는 웃으며 곧 직접 겪게 될 거라고 했다.
카르낙 발투만 왕은 훌륭한 사내이니 반드시 자신의 아내를 기쁘게 해 줄 것이라고 말이다. 로리아나의 말에 은밀한 농담이 숨겨져 있음은 눈치챘지만 정확히 카르낙의 어떤 면을 보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창부가 보기에 ‘아내를 기쁘게 해 주는 훌륭한 사내’란 무장이 훌륭한 병사를 알아보거나 현자가 뛰어난 책략가를 알아보는 것과 같은 이치일까.
로리아나가 말하는 아내를 기쁘게 해 주는 사내는 상냥한 마음과 건강한 몸을 지녀 사람으로서 덕을 갖춘 것과는 분명 다른 의미였다. 릴리는 그것이 몹시도 궁금했었다. 그것은 분명 그녀가 말한 ‘쾌락’과 연관되어 있으리라.
신방은 왕의 침실과 가까운 곳에 차려졌다. 사치스러운 알기어스 왕은 수많은 방을 사용했다고 들었다. 몇 개는 옷방, 몇 개는 신발과 화려한 장신구만을 위한 방이었으며 또 몇 개의 방은 거울로만 이루어진 방이었다.
알기어스는 대부분의 방을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하였으나 개중 몇 개는 성안의 여인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한 사내에게는 한 명의 여인만을 허락하는 것이 엘버그의 법이었지만 그저 허울에 불과한 규칙일 뿐, 부유한 권력가일수록 많은 여인과 사내들과의 연애를 즐겼다.
귀족들이 그럴진대 유난히 여색을 밝혔다던 알기어스 왕은 오죽했겠는가. 로레인 하게너처럼 성 밖의 유부녀를 탐하는 것은 물론 성안의 수많은 여성을 탐했으며 언제나 그들을 만날 수 있도록 성안에 자신만의 하렘을 만들었다.
반짝이는 대리석과 거울로 채워진 방들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왕은 자신의 침실 가까이에 수많은 애인을 두고 밤낮으로 내킬 때마다 찾아갔다. 어떤 여인들은 그런 왕을 사랑했으나 어떤 여인들은 그저 감옥에 갇혀 고통받는 죄수나 다름이 없었다.
릴리는 방 안으로 들어섰을 때 분명 이곳도 알기어스의 정부들을 위한 방이었을 거라 짐작했다. 비록 거울은 모두 뜯겨 나가고 반짝이는 대리석과 값비싼 장식품들은 전부 치워졌어도 향락의 잔재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방 안에 스며 있는 미향, 자극적인 붉은 양탄자,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는 뿔이 4개 달린 염소의 머리, 금빛 술이 늘어진 침대 휘장. 심신의 평온을 찾기 위한 침실이라기엔 지극히 자극적인 모양새였다. 파니릴리 제 손으로 꾸민 것도 아니요, 자신의 뜻에 따라 차려진 모양새도 아니었건만 낯빛이 홧홧하여 눈 둘 곳을 찾지 못했다.
에이가가 릴리의 심중을 눈치채고 애석한 듯 말했다.
“아시겠지만 발투만 왕가는 일손도 재정도 넉넉지 않아요. 돈이 될 만한 것들은 전부 팔았고 쓸 만한 것들은 보시다시피 계속해서 쓰고 있지요.”
에이가는 짧게 숨을 한 번 토하고 반듯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 이 성안을 새롭게 단장하는 것은 폐하의 권한입니다. 왕비의 의무이기도 하지요.”
참으로 묘한 일이다. 아비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 그 딸의 책임과 의무가 되었다니. 같은 핏줄임에도 어쩜 이렇게 취향 하나하나가 다른지 정말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침대며 커튼이며, 그 색상이며 재질까지 모두 다 말이다. 차라리 남이라 생각하면 편하리라. 남이라 생각하면 이토록 낯부끄러울 일도 없을 텐데. 피에 새겨진 부끄러움은 몰아내기도 힘들다.
“하루 종일 비가 내리네요.”
에이가가 덧문을 닫고 커튼을 치며 말했다. 빗줄기가 창문을 계속해서 두드렸다.
“분명 아마네스 님이 전하께 드리는 선물일 테지요. 파니릴리 알기어스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서요.”
릴리는 그저 웃었다. 엘버그의 모두가 아마네스를 찾는데 정작 신의 아이는 아마네스를 믿지 않는다. 오히려 신의 이름 아래에서 행해지는 엘버그의 모든 관습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자신을 과연 아마네스는 축복하고 싶어 할까. 정말로 자신이 그녀의 아이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