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카르낙도 보기 드물게 잘생긴 사내였다. 로로도 늙은이치고는 제법 건장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 엘버그의 여성들은 투로를 대상으로 난잡한 욕망을 품고 있다고 들은 기억이 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엘버그의 남성들도 투로의 여성들에게 같은 욕망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유독 사창가로 잡혀가는 투로의 여성들이 많은 것처럼 말이다.
“투로의 여자들이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아가씨만큼은 아닐 겁니다.”
로리아나가 말했다. 인사치레임이 분명한 말에도 진심이 담겨 있는 듯하였다. 역시. 릴리는 그녀가 수완이 좋은 사업가라고 생각했다.
“앉아요, 로리아나.”
릴리는 제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로리아나는 그녀의 명령에 따랐다. 곧 세일린이 그녀에게 포도주를 건넸다.
“입에 맞을지 모르겠어요. 얼마 전 모래 폭풍으로 와인 저장고가 폭발했거든요. 덕분에 질 좋은 술을 꽤 많이 잃었죠.”
“아아.” 하고 로리아나가 릴리의 말에 알은체했다.
“그 덕에 저도 아가씨 셋을 잃었어요. 그나마 건물이 무사하다는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런, 마음이 아프시겠어요. 아가씨들의 시신은 무사히 수습하였나요?”
“네, 시신을 모두 불에 태워 주었죠.”
릴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버그에서는 시체를 땅에 매장한다 들었는데요.”
“엘버그에 투로를 위한 땅은 없답니다, 아가씨. 누구도 죽은 투로의 시신을 매장할 땅을 내어 주지 않아요. 사막에 버려 독수리 밥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깊은 밤중에 남몰래 아궁이에 불을 지펴 태워 버리는 수밖에 없죠.”
“저런….”
안타까움에 우울한 낯빛을 한 것도 잠시, 릴리는 다시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있잖아요, 로리아나. 그라타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거나 아니면 조장을 해요. 육신이 빨리 사라질수록 영혼이 더 빨리 자유를 찾는다고 믿거든요.”
“아, 들어 본 적 있어요. 그라타는 카스티 제도에 있는 아주 작은 농경 국가라고 하던데 아가씨께서는 그곳에 계셨던 건가요?”
“네, 함께 지내던 유모가 죽은 후에는 그곳에서 지냈어요. 유모의 고향이거든요.”
그랬군. 그래서 카르낙이 알기어스들의 씨를 말릴 때에도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군. 대체 어떻게 혈혈단신 혼자 살아남았을까? 그것도 이토록 튀는 외모와 튀는 머리색을 가지고. 지금껏 무슨 수로 들키지 않을 수 있었는지 궁금했는데 카스티의 시골 촌구석에 처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라타 언어에 아주 능숙하시겠네요.”
“네, 저에겐 엘버그 언어보다 더 익숙해요. 아직까지는요. 아무튼, 그라타에서는 그렇게 믿으니 로리아나의 방법이 나쁜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다른 문화적 관점으로 보자면 망자에 대한 최고의 예의를 보인 거죠.”
애써 저를 위로해 주려는 모양새가 진지하여 로리아나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알기어스의 핏줄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덕분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네요.”
사막에서는 늘 사람이 죽으면 태웠다. 척박한 사막의 땅에 시체를 묻을 곳은 없었고 그대로 두면 새들에게 파먹힌 채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지니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로리아나에게도, 다른 투로의 창녀들에게도 화장은 익숙한 관습이었지만 그녀는 릴리 앞에서 구태여 그런 부연 설명을 붙이지 않았다. 어쨌든 마음을 써 주는 것이 예쁘니 괜한 사족으로 그녀의 친절함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릴리는 슈미즈 위에 입은 가운을 매만지며 물었다.
“생활하는 데 불편함은 없나요? 아직 폭풍으로 인한 피해에서 완전히 복구되진 않았을 테죠?”
“구제소에서 먹을 음식을 나누어 주고 있어서 다들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서는 벗어났어요. 정말 감사한 일이죠. 캘던의 돈 많은 귀족 자제들이 자발적으로 구제소를 후원하는 것은 제 평생 처음 봤어요. 무언의 압박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는 있지만…. 그저 추측일 뿐이지요.”
“그러게요….”
귀족들도 자발적으로 후원을 하고 있다니. 그런 이야기는 릴리로서도 처음이었다. 루이스는 알고 있을까. 알고 있었어도 릴리가 궁금해하지 않으니 말하지 않았으리라. 괜스레 더 골치 아파질 거라 생각했겠지.
“이런 때에는 아무리 값비싼 금은보화를 가지고 있어도 소용이 없어요. 그것을 먹을 수는 없으니까요. 고통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더군요.”
“맞아요, 로리아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제법 말이 잘 통했다. 로리아나가 투로이기 때문일까. 엘버그인이라면 치를 떠는 카르낙이 용케 이 여자를 죽이지 않고 곱게 살려 둔 거로도 모자라 결혼까지 할 정도라면 아마도 릴리는 엘버그인보다 투로에 더 가까운 사고방식을 지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리아나는 와인 잔을 매만지며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이곳에 오는 내내 궁금했답니다. 무슨 이유로 이토록 귀하신 분이 나같이 천하디천한 계집을 보자 하셨을까. 지금도 그 궁금증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그러자 릴리는 테이블 위에 놓인 제 와인 잔을 들었다. 잠시 와인을 입에 머금으며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말했다.
“로리아나도 알겠지만 이틀 후에 저는 폐하와 혼인을 해요.”
“네, 물론 알고 있습니다.”
모를 리가 없다. 캘던뿐 아니라 엘버그 전체가 그 소식으로 들썩거리고 있으니 말이다.
“폐하는 원치 않으십니다만 저에게는 후계를 생산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어요.”
그러고는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로리아나에게 도움을 구하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제가….”
“아이를 가질 수 있냐고요?”
릴리가 적당한 단어를 찾느라 말을 끝맺지 못하자 로리아나가 대신 말을 끝맺어 주었다.
“네…. 맞아요.”
“그거야 아주 쉽죠. 섹스를 하면 아이야 언젠가는 생기지 않겠어요?”
릴리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로리아나의 고개도 덩달아 기울어졌다. 설마…?
“섹스 말입니다. 아가씨.”
“…….”
“섹스… 모르십니까?”
“…비슷한 단어를 들어 본 적은 있는 거 같은데요.”
“…….”
대체 성안의 여종들은 뭘 했단 말인가. 성안에 처녀들만 있는 건 아닐 텐데 결혼을 앞둔 신부에게 아무것도 안 알려 주었다고? 그것도 당장 내일모레 혼인을 치를 사람에게?
사창가에 팔려 온 어린 계집에게는 필수적으로 섹스와 임신에 대해 가르친다. 섹스는 해야 하고 임신은 피해야 하니 몸을 팔기 전에 아주 잘 교육을 시켜 준비가 되면 손님을 받게 한다. 로리아나는 내내 그런 환경에서 자라 왔기 때문에 도저히 성안의 정숙함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제가 듣길 첫날밤에는 남편이 무슨 짓을 해도 피하지 말고 비명도 지르지 말아야 한다고 들었어요.”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아니에요, 아가씨.”
“아니라고요?”
“네. 전혀 아니에요.”
로리아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니까 남편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란 건 알겠어요. 하지만 지금 아가씨의 말을 들으면 꼭 첫날밤에 살인이라도 일어날 것 같잖아요. 첫날밤에는….”
그때 갑자기 잠자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세일린이 울음을 터트렸다. 얜 또 왜 이래?
릴리도 당황했는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세일린, 왜 그래요?”
그러자 세일린은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가씨… 아무것도….”
그러더니 또 울음을 터트렸다. 잠시 후 세일린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왈칵 터져 나오는 눈물과 함께 그간 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대체 사내들은 왜 그런 짐승 같은 짓을 하는 거죠? 생명을 잉태하는 것은 고결한 일인데 왜 그렇게 더럽고 불결한 행위를 해야 하죠? 살인이 아니라지만 그건 살인과 진배없어요. 대체 어떻게 그런 더러운… 그 더러운 곳에…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쳐요. 어떻게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가 있어요? 그런 더러운 곳에 그렇게 흉물스러운 것을….”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세일린은 다시 울기 시작했다. 더러운 곳? 그러니까 거기가 더럽다고 생각하는 건가? 로리아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아가씨들. 여러분이 어떤 환경에서 지내 왔는지는 아주 잘 알겠네요. 엘버그의 귀부인을 포함해서… 얌전하고 정숙한 여성들은 모두 여러분과 같은 생각을 지니고 있는 거겠죠? 여성의 질은 더럽다?”
“어디요?”
세일린이 눈물을 훔치며 되물었다.
“질이요. 사내를 받는 구멍 말이에요.”
“…….”
세일린은 미간을 구기며 눈을 깜빡였다.
“창부들은 거기를 그렇게 부르나요? 질이라고요?”
“…그럼 엘버그의 여자들은 거길 뭐라고 부르는데요? 구멍?”
“비슷하긴 하지만….”
“…구녕?”
“아니요.”
“그럼요?”
“…항문이요.”
“…….”
로리아나는 입을 떡 벌렸다. 뭐라고?? 어디??
“항문? 지금 똥구멍을 말하는 거예요?”
“…네.”
세일린은 구슬픈 눈동자를 깜빡였다. 로리아나는 할 말을 잃었다.
세상에, 아마네스 님이시여. 부디 무지한 이 처녀들을 구원하소서.
***
성안으로 진귀한 선물을 실은 상자들과 하객들이 계속해서 밀려들었다. 폭풍이 다녀간 뒤 한동안 죽은 듯 고요하고 암울하던 캘던성에 모처럼 활기가 돌았다. 초대에 응한 귀빈들은 왕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알현실 앞에 길게 줄 섰다.
“폐하. 멀루아의 영주, 울퍼 백작이옵니다.”
서기관의 호명에 에이가는 신음을 흘렸다. 저놈이로구나. 아무 노예나 잡아 앉히고 보니 이름도 없는 벙어리였다는 그 멀루아의 영주가. 값비싼 옷과 보석으로 잔뜩 치장을 하였지만 돼지 목의 진주처럼 까무잡잡한 피부와 투박한 얼굴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카르낙은 그렇기 때문에 이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리라. 왕좌에 삐딱하게 앉은 카르낙은 손에 쥔 사과를 가볍게 던졌다 받으며 유쾌하게 웃었다.
“그래, 울퍼.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 멀루아는 지낼 만한가?”
왕의 물음에 울퍼와 같이 온 종자가 그에게 수어를 해 보였다. 울퍼는 반색하며 다시 손짓을 했다. 종자가 그의 뜻을 풀어 왕에게 아뢰었다.
“위대하신 왕, 카르낙 발투만 폐하의 덕으로 하루하루가 꿈같기만 합니다. 늘 배불리 먹고 자니 그저 폐하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아내는 얻었나?”
종자가 왕의 물음을 전하고 답을 받았다.
“딱히 아내는 없으나 자식은 벌써 여럿을 보아 사내아이만 넷입니다. 폐하.”
이런 천하의 호색한 같으니. 에이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과연 법도 도덕도 없는 비루한 이국의 노예 출신다웠다. 결혼도 하지 않고 벌써 사생아만 줄줄이 만들었다니…. 저렇게 무식하고 근본 없는 사내에게 자진하여 몸을 바칠 여자는 없었을 테고 강제로 취한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가의 얼굴은 끔찍하게 구겨졌다.
“울퍼, 네가 성을 비웠을 때 믿고 맡길 수 있는 자가 필요할 거야. 그러니 똑똑한 자를 골라 가족으로 만들도록 해. 그래야 네가 멀루아를 오랫동안 다스릴 수 있을 거다.”
카르낙이 충고했다. 울퍼는 넙죽 고개를 숙이며 절했다. 종자가 번역하였다.
“기꺼이 따르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