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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51화 (51/231)

51화

밤이 깊어질수록 골목의 불은 더 밝아졌다. 어둠이 내리고 나서야 활기를 띠기 시작한 사창가의 골목에는 가게마다 여자들이 나와 호객 행위를 했다. 그들은 드레스를 반쯤 벗어 내려 훤히 드러난 가슴과 어깨를 유혹적으로 흔들어 댔다. 요란하기만 한 싸구려 드레스를 매만질 때마다 짙은 분 냄새가 퍼졌다.

개중 유난히 화려한 조명 아래 창녀들이 아닌 검을 든 사내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는 집이 있었다. ‘부나비’라 불리며 캘던성 일대를 통틀어 가장 화려하고 규모가 큰 유곽이었다.

부유한 상인이나 고관대작이 아니라면 감히 발을 들여놓을 수도 없는 곳으로, 소유자인 마담 로리는 특유의 아름다움과 기교로 사창가에서 명성이 드높았다. 그 명성을 무기로 사내들의 주머니를 털었고 이제는 캘던에서 가장 부유한 창녀가 되었다. 이런 걸 자수성가라 칭할 수 있다면 확실히 그녀는 자수성가한 여자임이 분명했다.

부나비의 실내에는 은은한 미약의 향이 퍼져 있었다. 벽 곳곳에는 붉은색의 이국적인 양탄자가 걸려 있었고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진귀한 술과 과일이 놓여 있었다. 가게에서 가장 큰 홀에서는 야릇하면서도 적당히 흥을 돋워 줄 연주에 맞추어 선정적인 복장의 무희가 느릿하게 몸을 움직였다.

로리아나는 홀의 끝에 앉아 이국에서 들여온 기다란 대롱을 물고 있었다. 시종이 대롱의 끝에 불을 붙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얀 연기가 꼬리처럼 퍼졌다. 로리아나는 길고 숱이 많은 속눈썹을 몇 번 깜빡이다가 게슴츠레 눈을 들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오뚝한 콧날 아래 도톰하고 잘 익은 과실 같은 붉은 입술이 매혹적인 선을 그렸다. 로리아나는 턱을 들며 긴 연기를 내뿜고 제 어깨를 좌우로 한두 번 흔들었다. 캘던에서 제일가는 창부답게 진주를 개어 바른 듯 윤기가 흐르는 젖가슴이 푸딩처럼 넘실거렸다. 루이스는 그 색정적인 광경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우리 애송이가 여긴 어쩐 일이야?”

로리아나는 덩치가 산만 한 사내를 아이 다루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로리아나는 풋내기에 불과했던 용병 루이스를 사내로 만들어 준 여인이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그녀가 루이스의 동정을 떼 준 것이다.

누구에게나 다른 이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은 치부쯤이 하나씩은 있다. 루이스에게 로리아나와의 첫 섹스는 잊고 싶은 치부였다. 그가 얼마나 조급하고 서툴렀으며 한심했는지를 떠올리면 자다가도 발작할 지경이었다.

“로리아나, 여전히 아름답네. 다행이야.”

로리아나는 손끝을 입술에 대고 키득키득 웃었다. 길게 뺀 눈꼬리를 따라 가늘게 접힌 눈매가 요염하였다.

“그거 알아 루이스? 투로들은 말이야, 아주 오랫동안 젊음을 유지해. 어지간히 나이 들기 전에는 피부의 탄력을 잃지 않지. 이것이야말로 신의 축복이 아니겠어?”

그러면서 그녀는 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루이스가 듣기로 마담 로리가 캘던에 자리를 잡은 것은 십여 년 전, 그 이후 가게를 차리고 소문을 타기 시작한 것도 십여 년 전, 로리아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어느 것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고 했다. 미모도, 젊음도, 체격도 지금과 같다 했다. 그때가 스무 살 남짓이라 치면 지금은 30대, 그럼에도 20대 초반의 젊음과 미모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마담 로리는 사내들 사이에서 ‘검은 진주’라 불렸다. 건강하고 윤기 넘치는 피부와 육감적인 몸매, 사내를 홀리는 화술과 표정은 엘버그인이 꿈꾸는 요부 그 자체였다.

들은 대로라면 그녀 역시 다른 투로들과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에 사창가로 팔렸을 터. 포주들의 손에 이용만 당하고 버려지는 다른 투로들과 다르게 자신만의 가게를 차리고 용병을 두어 부리니 그녀가 타고나길 창부인 것인지 아니면 투로이기 때문에 그저 창부에 머무를 뿐인지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나저나 어쩐 일이야? 우리 가게에 여자를 사러 오진 않았을 테고.”

로리아나에게 동정을 잃고 난 이후 루이스는 부나비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다른 업소에 비해 가격도 월등히 비쌌고 무엇보다 마담 로리와 마주하는 것이 껄끄러웠다. 왠지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 슬슬 피하게 되었던 것이다. 첫 경험은 엘버그에서 가장 예쁜 창녀와 하겠다며 기세 좋게 그녀에게 달려들었던 치기 어린 자신을 지금이라면 뜯어말렸을 거다. 보기 좋게 망신을 당하기 전에 말이다.

“귀한 분이 당신을 찾아.”

로리아나는 다시 한번 파이프를 길게 빨았다.

“귀한 분?”

“그래.”

솔깃한지 로리아나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몸을 기울였다.

“네가 말하는 귀한 분이라면…. 우리 카르낙 폐하라도 되는 건가? 드디어 창부들과 어울릴 마음이 생기신 거야?”

루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카르낙은 엘버그의 창녀 대부분이 투로의 여자들이란 것을 안다. 그래서 돈으로 창부들의 몸을 사는 이들을 누구보다 혐오했다. 고작 몇 푼으로 제 형제들의 몸을 유린하는 자들을 그가 어떻게 좋아하겠는가.

그들로 인해 수많은 아이들이 사막으로 버려져 목숨을 잃거나 다시 노예로 팔려 가 혹사당하기를 반복하는데 말이다.

카르낙이 왕이 된 이후 더는 투로들이 창부로 팔려 가는 일은 없었다. 캘던의 노예상들이 투로를 투로라는 이유 하나로 잡아다 팔아넘기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버린 탓이다. 대신 카르낙은 같은 엘버그인을 팔아넘기는 것은 허용했다.

패가망신하거나, 빚더미에 올라앉아 제 몸이라도 팔아야 하는 엘버그인들에게는 기꺼이 몸을 팔라고 허용하였다. 또한 사창가의 형제들이 돈으로 엘버그의 여인을 사 제 가게로 들이는 것도 허용하였다.

그리하여 마담 로리의 아래에는 수많은 금발 머리의 계집들이 있었다. 붉은 머리, 갈색 머리의 계집들도 있었다. 이제 그들은 투로의 밑에서 몸을 팔아야 했다. 확실히 마담 로리의 부나비는 그것을 기점으로 확연히 번창하기 시작하였고 로리는 더 많은 부와 지위를 얻었다.

그 때문에 마담 로리는 카르낙을 좋아했다. 투로가 왕이 되었다는 사실에 그녀가 고무되었을지는 잘 모르겠으나 좋아하는 것만은 확실했다. 하긴 그를 싫어할 이유가 없다. 다만 창부들을 찾지 않는 카르낙에게 섭섭해할 뿐. 언젠가 그를 융숭하게 대접하고 싶어 하는 로리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신의 병사들은 문지방이 닳도록 사창가를 드나드는데도 우리 순진하신 발투만 폐하께서는 평생 한 여자에 대한 정절을 지키시겠다니. 폐하께서는 여전히 넘어야 할 벽이 많네. 일단 그 거지 같은 투로 적 생각에서 벗어나셔야겠어. 왕이라면, 모두가 그랬듯 폐하께서도 아무 여자나 취하셔야지. 그래야 비로소 엘버그의 왕이 되는 게 아니겠어?”

로리의 나긋한 어조에는 냉소적인 농담이 섞여 있었다. 루이스가 잠자코 듣고만 있자 그녀는 자세를 고치며 말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사려거든 직접 가게로 찾아오라고 해. 폐하가 아니라면 굳이 내가 움직일 이유가 없잖아?”

“로리아나, 당신을 험하게 대하고 싶지 않아. 그러나 지금 순순히 일어나지 않으면 강제로 끌어낼 수밖에 없어.”

“왜?”

로리아나가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명령이라도 받았어?”

“그래”

“.....”

루이스는 근위대다. 근위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왕뿐이다. 만일 왕이 아니라면….

로리아나는 루이스의 진지한 눈을 한동안 주시하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파이프를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거 정말 재미있네. 좋아. 기꺼이 갈게.”

***

로리아나는 루이스를 따라 샛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왔다. 어두컴컴한 밤에도 곳곳에는 횃불이 밝혀져 낯선 자가 침입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경비가 삼엄했다.

“이쪽이야.”

루이스가 성벽을 따라 걷다가 좁다란 길로 안내했다. 로리아나는 계단을 오르기 위해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원형 계단을 얼마나 빙빙 돌며 올라갔을까, 제법 호사스러운 복도가 나타났다. 아치형 기둥마다 경비병이 서 있었다. 로리아나는 망토를 더 깊게 눌러썼다.

둘은 어느새 복도의 맨 끝 방에 다다랐다. 루이스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긴장감에 로리아나도 덩달아 숨을 깊게 내뱉었다.

똑똑똑.

루이스가 세 번 문을 두드리고 잠시 기다리자 달칵, 문이 열렸다. 루이스와 그 뒤에 선 로리아나를 은밀히 훑어본 뒤 곧 여자는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고는 제 주인에게 둘의 방문을 알렸다.

“아가씨. 루이스가 왔습니다.”

“들어오라고 해요, 세일린.”

“들어오세요.”

로리아나는 안으로 들어서며 망토를 벗어 내렸다. 루이스는 공손히 몸을 숙였고 로리아나도 그를 따라 몸을 숙였다. 성에 들어온 것도, 비록 왕은 아니나 그에 비견할 성의 주인을 만나는 것도 그녀로서는 처음이었다.

신분이 높은 이를 대할 때의 예법은 배웠으나 왕족을 대할 때의 예법은 배우지 못했다. 그것이 그녀가 가진 신분과 태생의 한계였다. 긴장감에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르는 데서 오는 어려움, 거기에 왕족에 대한 두려움이 더해져 점점 더 피가 식으며 심장이 펄떡이는 기분이 들었다.

“아가씨. 이쪽은 마담 로리입니다. 캘던의 유곽에서 ‘부나비’란 업소를 운영 중이지요. 제가 아는 한 가장 똑똑하고 사내를 다루는 데 능숙한 여인이랍니다.”

“마담 로리.”

앳된 미성이 그녀를 불렀다. 로리아나는 차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무릎을 더 굽히며 말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로리아나라 불러 주십시오.”

“로리아나.”

릴리가 그녀의 이름을 한 번 더 발음했다. 그러고는 약간의 틈을 두고 다시 그녀를 불렀다.

“로리아나, 얼굴을 좀 보여 줄래요?”

“.....”

그제야 로리아나는 얼굴을 들었고 비로소 릴리를 바라보았다.

과연. 알기어스의 핏줄이 살아 있다는 캘던 사람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태어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은백색 머리카락에 눈처럼 하얀 피부다. 정말이다. 투로의 왕 카르낙은 진실로 신의 아이와 결혼을 하는 것이다.

하찮은 벌레 놈이 결국 여기까지 올라왔다. 그 사실에 전율이 일었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그녀는 간신히 삼켰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목도하고 나서도 여전히 믿기가 어렵다.

“오느라 고생이 많았어요. 불편했을 텐데도 초대에 응해 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왔습니다. 저 같은 계집이 언제 성에 들어와 보겠어요. 큰 영광입니다.”

“저는 이만 물러가 봐도 될까요?”

루이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의 얼굴이 한 10년은 늙은 듯 피곤해 보였다.

“네, 루이스. 애써 줘서 고마워요. 푹 쉬도록 해요.”

“감사합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마치고는 릴리의 침실을 빠져나갔다. 딸깍, 하고 방문이 닫히자 릴리는 조용하게 서 있는 로리아나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호리호리하고 육감적인 몸매는 말할 것도 없고 생김새 역시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그녀는 모든 것이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오뚝하고 동그란 물방울 모양의 코, 크고 깊은 눈매며 광택이 흐르는 도톰한 광대뼈, 깨끗하고 반듯한 이마. 과연 사내들이 군침을 흘릴 만한 외형이었다.

“투로의 여인들은 모두 당신처럼 아름다운가요, 로리아나?”

릴리는 진심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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