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발 아래 은빛 눈-40화 (40/231)

40화

“…….”

마른 입술을 쓸고 카르낙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가 이미 돌아선 등을 보고는 고개를 바로 했다. 한숨을 쉬고 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댔다가 잔이 텅 비어 있음을 깨닫고 어색하게 내려놓았다.

그는 무수히 혼재되어 있는 상념에 빠진 채 제 어금니만 씹다가 곧 정리하기를 포기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애초에 불가능한 것을 잡고 있다고 달라질 것은 없으니 차라리 모조리 비워 버리는 것이 나으리라. 차라리 단순해지는 것이 편했다. 그간의 아주 많은 경험으로 때로는 그것이 정답임을 안다.

카르낙은 음악당에서 나와 긴 연회장을 지나 아치형 계단을 올라갔다. 시종이 초를 들고 그의 뒤를 따라가다가 왕이 향하는 곳이 릴리의 침실임을 확인하고 문 앞에서 멈추었다. 카르낙은 홀로 릴리의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그의 방문에 릴리는 벗으려던 가운을 다시 걸쳤다. 막 자기 위해 침대에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폐하.”

릴리는 그의 등장에 퍽 놀랐다. 이 밤중에 어찌하여 저를 찾아왔을까. 그의 어두운 낯빛을 보니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일순 걱정이 되었다.

카르낙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침대 곁에 켜 둔 촛대를 들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그러더니 손으로 릴리의 턱을 들었다. 그 탓에 릴리의 질문이 뚝 끊겼다. 대신 턱이 잡힌 채 눈을 양옆으로 천천히 굴리고만 있었다. 기꺼이 순응은 하나 이유를 몰라 미심쩍은 듯이.

카르낙은 초를 릴리의 얼굴에 더 가까이 가져갔다. 노란 불빛에 붉은 상처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제야 릴리는 카르낙이 저의 상처를 살피러 왔다는 것을 깨닫고 조심스레 입을 뗐다.

“리쿠스의 말로는 그리 상처가 깊지 않아서….”

카르낙의 손끝이 릴리의 오른쪽 뺨 위에 살짝 닿았다. 따끔함에 릴리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흉터는 많이 남지 않을 거라고 했어요.”

카르낙은 촛대를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려 놓았다. 그러느라 릴리의 어깨에 그의 단단한 가슴팍이 스쳤다. 그에게서는 좋은 향이 났다. 분명 목욕을 한 탓이리라. 어쩐지 릴리는 손끝이 곱아들어 제 배꼽 근처에 두 손을 포개어 단단히 말아 쥐었다.

“어쩌다 다친 거야?”

이제야 내내 궁금했던 것을 묻는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가장 먼저 알고 싶었던 것을 이제야.

릴리는 방수포로 덮어 둔 창문에 시선을 주었다.

“바람에 못 이겨 창이 깨졌어요. 덧창까지 망가질 줄은 몰라서 미처 피할 수가 없었어요.”

“그냥 바람이 아니니까. 모래뿐 아니라 돌덩이들도 실어 나르곤 하지. 지하가 가장 안전해.”

“네. 로로가 때마침 지하로 데려다주었어요. 그나마 그가 있어 주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요. 덕분에 모두가 무사했답니다.”

릴리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다. 원망할 법도 한데, 그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불편할 법도 한데 그런 감정은 단 한 톨도 내보이질 않는다.

“심려를 끼쳤습니다, 폐하. 하지만 저를 포함하여 성안의 사람들은 모두 무사하니 염려치 않으셔도 된답니다.”

브롱힐즈를 목전에 두고 돌아왔다. 그곳에서 에나가 저를 기다리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캘던으로 말 머리를 돌렸다. 릴리의 말이 맞다. 내내 걱정했다.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내내 불안했다. 혹여 무슨 일이 있다면, 에나를 만나고 난 이후에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한순간도 지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파니릴리, 만일 네가 캘던성에 없었다면 나는 분명 근심하면서도 말 머리를 돌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마 늦지는 않을까 두려워 쉬지 않고 달리지도 않았을 거다. 왜 내가 이토록 너를 걱정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직 너를 잘 모르는데. 아직 네가 내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에게 익숙지가 않다. 널 만나 알아 간 시간이 너무나 짧다. 그런데 네가 신경이 쓰인다. 네 흉터뿐 아니라 네 마음의 상처에도 신경이 쓰인다. 그러니 네가 괜찮다고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렇지 않다고 애써 웃는 것이라면 말이다.

“어째서?”

“예?”

“내가 염려하면 안 되는 건가?

“…….”

“오히려 그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그거야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해도 릴리는 원하지 않았다.

“저는 폐하께 근심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늘 그랬듯이 제가 폐하께 드리고 싶은 것은 폐하의 평안과 행복이랍니다.”

“몰라. 그런 거.”

네가 주려는 것은 너무나 모호하다, 파니릴리. 행복 같은 거…. 늘 그랬듯이 그런 것 따윈 모른다.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감정이다. 그러니 네가 그것을 준다 해도 깨닫지 못할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너는 내게 근심이다. 그것만은 분명해.”

릴리의 얼굴이 제법 침울해졌다. 그렇다 해도 변하지 않는다. 원하지 않는 것이라 해도 어쩔 수가 없다. 한참을 생각하다 릴리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빛이 제법 처연하여 보는 이의 심기를 건드렸다.

“제가 어떻게 하면 폐하를 도울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그를 거스르지 않고도 그를 따를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그도 즐겁게 하면서도 그에게 보탬이 되는 방법은 없을까? 아무리 스스로 그 해답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다. 파니릴리는 결심한 바가 있다.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었다. 이곳에 있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뿐이다. 카르낙의 완벽한 반려가 되어 주는 것. 그리하여 그의 안에 평화가 자리 잡는 것. 늘 열심히 그 방법을 찾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의 마음을 여는 것조차 쉽지가 않다. 완벽한 반려는커녕 믿음직한 친우가 되는 것조차도 어렵다. 그러니….

“무엇이라도 좋으니 알려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카르낙의 손이 릴리의 뺨을 스쳤다. 바람 한 점 없는 침실 안에 꼭 바람이 부는 것 같이 뺨을 스친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감아 그의 품으로 당겼다. 분명 순식간에 일어난 일임에도 매우 느리게 느껴졌다. 단단하고 따듯한 그의 가슴팍이 얼굴에 닿았다. 귓가에 그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카르낙이 속삭였다.

“지금은 이것뿐이야, 릴리.”

“…….”

갑작스러운 포옹이었다. 그럼에도 따듯하여 릴리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등에 팔을 둘러 마주 안았다. 사내의 품에 안기는 것은 처음임에도 낯설거나 불편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따듯하기만 하여 안락하였다.

오히려 저도 몰랐던 긴장감이 풀리는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귓가에 들리는 카르낙의 숨소리도 듣기 좋았다. 목덜미에 내려앉는 따듯한 숨결도 마찬가지로 좋았다. 이것이 그를 돕는 일이라면 기꺼이 몇 번이고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래 여자들은 이렇게 가느다란가. 릴리의 목덜미에 닿은 손에 조금만 힘을 주면 그녀의 목을 꺾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카르낙은 그녀의 등에 닿아 있는 손을 내려 허리를 안아 보았다. 마찬가지였다. 이것도 힘을 주면 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대로 꽉 안으면 갈비뼈를 바스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품에 안으니 기분이 좋았다. 왜 안고 싶은 욕구가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기분이 좋은 것이니 그런 것이 아닐까 여겨졌다.

그녀의 목덜미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카르낙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셔 제 안에 가득 담았다가 길게 토해 냈다. 그러자 릴리가 제 등에 손을 둘렀다. 뭐지? 뭐가 이렇게 느낌이 부드럽지? 핀이나 로로와도 심지어 에이가와도 다른 감촉이다. 심지어 에이가는 같은 여자인데 왜 다르지? 나이의 많고 적음의 차이인가?

카르낙은 고개를 들며 입술로 그녀의 목덜미와 귓가를 쓸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녀의 피부가 너무 보드라웠고 그걸 좀 더 느껴 보고 싶어서 몸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든 것뿐이었다.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 릴리의 입에서 신음과 비슷한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가 무슨 영문인지 제 등줄기를 지끈거리게 만들었다.

카르낙은 릴리의 어깨를 붙잡고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기 위해 몸을 떼어 냈다. 말간 면부에 붉은빛이 감돌았다. 그것은 흉터로 인해 생긴 붉은 자국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탐스럽고 투명한 빛깔이었다. 릴리는 아주 천천히 감겨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회색 눈동자는 꼭 무슨 마법이라도 걸린 듯 영롱한 빛을 냈다.

카르낙은 홀린 듯 그것을 보며 미간을 구겼다. 뭐지 이거?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뭘 해야 될지 모르겠다. 뭔가를 하고 싶은데 뭐가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계속 몸을 맞대고 있고 싶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동시에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욱신, 하고 제 하반신이 아파 왔다. 당황스러웠다. 때로 이유 없이 제 몸이 이러는 것은 알고 있다. 로로는 그것이 사내라면 당연히 겪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이상 깊이 알지는 못했다.

사내라면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일이라 해도 카르낙은 결코 자연스럽다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 느낌은 언제나 저를 아프고 불편하고 거추장스럽게 만들었다. 제 몸에 달린 것이 제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늘 분통이 터졌다.

뜻 모를 열이 올라 고통스러워지지만 않는다면 제 인생도 덜 고통스러울 거라고 생각했다. 한동안은 괜찮았다. 아니 아주 오랫동안 괜찮았다. 하게너를 죽인 후로 한참 동안 제 앞섶은 부풀지 않았다. 알기어스를 죽인 이후 왕좌에 오른 다음에는 완전히 그것을 통제하게 되었다고 믿었다. 불쾌하고 거추장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어떤 순간에도 말이다.

“폐하?”

릴리가 그의 표정을 살폈다. 미간이 일그러진 것을 보아 분명 어딘가 안 좋고 불편한 듯했다.

“괜찮으십니까?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당황하여 그의 몸을 살피려 하자 카르낙이 허리를 굽히며 뒤로 물러서서 그녀를 완전히 자신의 품에서 떨어뜨렸다. 몸이 불편한 것이 분명한 것 같았다. 허리를 굽히는 것을 보니 복통인가?

“리쿠스를 부를까요?”

카르낙이 제 복부 근처를 감싸며 도리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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