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그 간극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투로들에게 잔인했고 비난받아 마땅했다. 엘버그의 어떤 문화는 그녀조차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모두를 죽일 수는 없다.
부르테는 세상을 흑과 백으로 나눌 수 없다 하였다. 만물은 서로 맞물려 있어 어떠한 것이 균형을 깨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하였다. 릴리는 그런 부르테의 밑에서 한순간의 이기와 분노가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똑똑히 목격하고는 했다. 증오의 땅에는 승리자가 없었다. 모두가 패배할 뿐이었다.
그런 까닭에 릴리는 카르낙을 이해하면서도 그의 분노에 따라 줄 수는 없었다. 릴리는 에이가나 스코크처럼 엘버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엘버그인들에 대한 애틋함 같은 것도 없었다. 다만 생명을 존중할 뿐이었다.
릴리에게는 차라리 카르낙이 더 중요했다. 누군가를 구해야 한다면 단언컨대 그녀는 카르낙을 구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신의 선택이 그에게 고통이 된다면 과연 그를 어떻게 구할 수가 있는가. 그의 곁에 있을 필요가 없다.
“그분은 당신이 원하지 않는 이에게는 절대 곁을 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캘던성 안에서 근무하는 관료들의 수는 아주 적지요. 예배당을 비워 두신 것도 같은 이유랍니다.”
노인의 단정한 어조에 힘이 실렸다.
“폐하는 성미가 급하고 불같지만 아가씨는 늘 침착하고 온화하시지요. 폐하는 뛰어난 장수이지만 글은 멀리하신답니다. 하지만 아가씨는 책을 아주 좋아하시지요. 그분은 유혈이 낭자하는 전쟁을 좋아하시지만 아가씨는 평화를 사랑하시고요. 그래서 저는 아가씨가 그의 곁에 있어 주시길 바랍니다. 꼭 페하께 필요한 분이니까요.”
“저에게 조언해 주실 수 있나요? 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폐하를 도울 수 있는지요”
아아, 하며 로로가 웃었다.
“그거야 아주 간단하답니다, 아가씨. 그저 지금처럼만 해 주시면 됩니다.”
릴리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지금처럼? 그래서 카르낙을 화나고 슬프게 만들었는데도?
“저는 그분이 아주 어릴 때부터 보아 왔지요. 그래서 장담할 수 있답니다. 발투만 왕의 안에 있는 작고 연약한 칼은 아가씨와 아주 많이 닮았다는 것을요.”
“…….”
“보이고 싶지 않아 숨겨 두었을 뿐 어린 칼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늘 다른 이에게 헌신하며 누구보다 상냥하고 작은 것에서도 행복을 느끼는 아주 사랑스러운 아이랍니다. 언젠가 그가 나타날 거예요, 아가씨. 분명 나타날 겁니다.”
그러니 그저 기다려 주기만 하면 된다. 겁 많은 그가 비로소 제 안의 어린 카르낙을 보여 줄 때까지, 껍데기를 벗을 때까지 인내하면 되는 것이다. 파니릴리는 인내심이 강한 이였다. 그러니 당신이라면 카르낙에게 믿음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가 그의 진심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로로는 분명 그렇게 믿고 있다.
“고마워요, 로로. 덕분에 힘이 나네요.”
“별말씀을요. 그럼 편안히 주무십시오, 릴리 아가씨.”
로로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잘 자요, 로로.”
릴리도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늦은 밤까지 음악실에서는 레벡의 현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왕은 목욕과 식사를 마친 후에는 내내 음악당에 머물렀다.
원형 테이블 위에는 값비싼 와인 대신 여러 가지 곡류를 섞어 만든 싸구려 에일이 놓여 있었고 연주가는 끊임없이 같은 구절을 반복하여 연주하였다. 왕이 싫어하는 찬송가는 빼놓고 구전으로만 전해져 오는 민중 음악만 연주하자니 곡목이 적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왕은 음악을 듣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침묵이 싫어 그것을 채우는 소리를 원할 뿐. 내내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만 잠겨 있었다.
“여기 계셨군요.”
현을 잡은 손이 더는 움직이지 않으려 할 때쯤 때맞춰 에이가가 음악당에 들어섰다. 연주가는 안도하는 빛으로 재빨리 연주를 멈추었다. 혹여나 계속하라는 명령이 떨어질까, 왕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에이가는 나가 보라는 듯 턱짓을 했고 연주가는 아주 감사한 마음으로 쏜살같이 홀을 떠났다. 에이가는 왕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명하신 대로 창고는 잠갔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쫓아냈고요.”
“…….”
카르낙은 대답 없이 잔을 들었다. 에이가는 벌컥벌컥 술을 들이켜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빈 창고는 카스티 제도에서 수입해 오는 식료품으로 채울 계획입니다.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결국은 원상 복구될 거예요.”
가만히 듣고 있던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릴리를 위해 변명하러 온 거라면 그만둬.”
에이가는 그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폐하가 없는 동안 릴리 아가씨가 이 성을 지키셨어요. 가장 먼저 폭풍이 온다는 것을 아시고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가축을 가두고 문이란 문은 모조리 닫도록 지시하셨죠. 술 저장고에 불이 나 다친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당신도 깨진 유리에 상처를 입으셨으면서도 리쿠스를 보내 치료하게 하셨어요.”
“…….”
“모웨나에 전령을 보내고 폐하의 안위를 걱정해 브롱힐즈로 순찰병을 보냈는지 확인하셨어요. 놀란 사용인들을 달래고 성을 보수하도록 하셨고요.”
카르낙은 눈을 내리깐 채 잔의 주둥이를 매만졌다. 딴청을 피우지만 자신의 말을 모두 듣고 있다는 것을 에이가는 알았다.
“아가씨가 때때로 폐하의 심기를 거스른다는 것을 압니다. 어떨 때에는 저조차 그녀를 이해하기 힘들어요. 가끔 그분이 고집을 부리실 때면 정말 미치고 팔짝 뛰고 싶기도 해요. 정말로요. 하지만, 폐하.”
“…….”
“아가씨는 매 순간 옳은 결정을 하셨어요. 비록 서툴지언정 잘못된 결정을 하신 적은 없답니다. 비록 폐하와도 저와도 뜻이 맞지 않는다 하여도 그것만은 분명해요.”
카르낙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어 보이며 마른세수를 했다.
“페하께서는 릴리 아가씨가 무엇보다 폐하의 뜻을 따르기를 원하시지요. 그래야 마땅하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그렇지만….”
“릴리를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야.”
카르낙은 미간을 구기고 짜증 난다는 듯 말을 가로막았다.
“그 성격에 저러는 게 놀랍지는 않지. 인정 많고 자비심 넘치는 파니릴리 아가씨이니 말이야.”
그 여자를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다. 그 성격에 가진 것을 모두 털어서라도 남을 도우려 하겠지. 매번 그 여자가 저를 위하려 열심이었던 것처럼. 화내는 법도, 낙담하는 법도 없이, 겁을 먹거나 좌절하는 법도 없이 들풀처럼 서서 결코 꺾이지 않을 듯이.
“그 점이 날 화나게 해.”
툭 뱉어 놓고 그는 어금니를 씹어 댔다. 에이가는 왕의 고뇌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세상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다더니 너무 뻔해서 열 받는다고. 그럴 가치가 없는 자들에게까지 온정을 베풀어 주면서 그자들을 귀하게 생각한다는 것이 나를 화나게 해. 잔인하고 비열하고 세상에 도움이라곤 하나도 되지 않는 새끼들에게 그런 감정을 보인다는 게 그게 너무 답답하고 한심하다고. 그걸 위해 군용 창고를 털었다는 게 말이야.”
“사람들은 릴리 아가씨를 존경해요.”
“무가치한 감정이야. 한순간일 뿐 언젠가 사라질 의미 없는 단어야.”
뒤통수를 칠 것이 뻔하다. 얻어먹을 대로 얻어먹고 입을 씻겠지. 언제 그랬냐는 듯 뻔뻔하게 굴 것이다. 불행과 행복은 교환되지 않는다고? 아니.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 남의 불행을 보며 행복해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니까 끔찍한 것이다. 그러니 이토록 치를 떠는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사람들은 그렇게 선하지 않다. 세상 모두가 너 같지 않아, 파니릴리. 그걸 알 때쯤이면 너는 상처를 받겠지. 더는 지금처럼 인정 많고 자비가 넘치지 않겠지. 너는 무너지겠지. 와르르 무너져 다시는 원래의 너로 돌아갈 수가 없을 것이다.
“아가씨에게는 힘이 있어요. 저나 폐하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오직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것이요. 저는 그것이 폐하께 힘이 될 거라 확신해요.”
“…….”
“그 힘은 제가 거부하는 순간에도 저를 움직이지요.”
릴리는 그녀에게 선택을 하라고 했다. 죽은 로레인을 섬길 것인지 아니면 카르낙을 섬길 것인지. 에이가는 그런 릴리의 태도에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그토록 잔인하게 말할 수 있는지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잊고 싶을 때도 그 말은 에이가를 따라다녔다. 마치 죽은 로레인의 망령처럼.
그러다가 깨달았다. 지금껏 카르낙이 원하는 세상이 무엇인지 한 번도 그에게서 들은 적도 없고 물어본 적도 없었다는 것을. 카르낙은 로레인 하게너를 위한 장기짝일 뿐 그를 사랑한다 하여 저가 로레인을 사랑하듯 그를 사랑할 수는 없었다.
마땅히 로레인을 사랑하듯 사랑해야 하는 사람은 카르낙이 아니라 릴리였다. 어쩌면 릴리를 보살피기 위해 카르낙을 이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릴리 또한 로레인의 그림자를 쫓고자 이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붙잡고 있는 것은 죽은 로레인 하게너의 망령. 알면서도 그동안 모른 척해 왔다. 죽은 자를 섬기기 위해 산 자들을 이용하였다. 과거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러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파니릴리는 그런 에이가의 어깨를 흔들었다. 이제 그만 그 무용하고도 헛된 꿈에서 깨어나라고. 더는 외면할 수 없는 것을 이제는 마주하라고.
“폐하께서도 아실 겁니다. 아가씨의 마음은 엘버그의 사람들이 아닌 폐하께 향해 있다는 것을요,”
에이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것은 폐하께서 홀로 엘버그로 돌아오신 이유와 같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