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그것에서는 바다 내음이 났다. 짭조름하고 신선한 향. 필시 배를 타고 이동하며 스며든 향이리라. 사내아이는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이토록 형편없는 복장을 한 여자는 지금껏 본 일이 없었다.
특히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맨 듯한 차림새는 꼭 화장하기 직전 깨끗한 리넨 천으로 둘둘 말아 놓은 시체처럼 보였다. 드러난 것이라고는 망토의 그림자 아래로 유려하게 흐르는 턱선과 사내의 것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작고 도톰한 입술뿐.
엘버그 왕국의 여느 귀부인 같은 여자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약혼녀의 모습은 확실히 그의 예측을 빗나가긴 한 것 같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 있으랴. 비루한 행색이든, 박색의 계집이든 어차피 명분뿐인 결혼이었다. 그러니 그 명줄이 끊어지지만 않고 시녀들의 극진한 보살핌이나 받으며 살면 되는 거다.
카르낙이 망토에 손을 대자 에이가가 재빠르게 나섰다.
“이제 막 바다를 건너오셨어요. 지치고 피곤해 보이니 일단 충분한 휴식을….”
그러나 이미 망토는 카르낙에 의해 완전히 벗겨진 뒤였다. 에이가는 황망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은 카르낙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예상에 들어맞지 않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이게 뭐야.”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에이가는 잘근 입술을 씹으며 눈을 감았다. 로로의 시선은 물론이거니와 루이스의 시선도 허공이나 땅으로 향했다.
고집스러운 회색 눈동자가 집요하게 저를 쳐다보고 있었으나 카르낙은 그녀와 눈을 맞추지도 않았다. 대신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을 뻗어 그녀의 맨들맨들한 정수리를 만져 볼 뿐이다.
이게 뭐야. 혼자 속으로 몇 번이나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손바닥에 느껴지는 까끌까끌하고 파르스름한 감촉에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그야말로 박장대소였다.
에이가는 속이 타들어 갔다. 간신히 로레인의 핏줄을 찾았는데 하필… 하필 민머리라니! 물론 파니릴리에게서 자초지종은 들었다. 낯선 이방의 땅에서 함께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노라고.
그 땅에서는 종종 종교적인 이유로, 혹은 그 외에도 고귀한 명분을 들어 제 머리를 모두 밀기도 한다고. 그 가르침을 따라 머리와 눈썹을 모두 밀었고 그 덕에 이질감 없이 그곳에서 함께 살 수 있었노라고.
그러나 그것은 카스티 제도의 일이었다. 이곳 엘버그 왕국에서는 누구도 자신의 머리를 밀지 않는다. 하물며 비천한 노예조차도 모두 긴 머리를 고수한다. 이곳에서 길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은 곧 자신의 정체성이었다.
각양각색의 윤기 나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은 그 사람의 신분과 재력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모두 밀다니. 머리카락도 모자라 눈썹까지 몽땅. 알기어스 왕에게서 물려받은 회백색 눈동자가 아니었다면 그녀가 왕의 핏줄이라고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파니릴리가 알기어스 왕의 자손임을 확신할 수도 없었다. 알기어스 왕의 핏줄이라면 두 가지를 모두 다 가지고 있어야 했다.
“엘버그 왕국의 말을 아주 잘해요.”
에이가가 말했다.
“그리고 회색 눈동자를 지니고 있고요. 폐하께서도 보셔서 아시겠지만 로레인 아가씨를 많이 닮았어요. 물론… 눈썹이 있다는 가정하에서….”
카르낙은 배를 잡고 웃다가 눈물까지 흘렸다. 뭐가 그토록 재미난 것인지, 그가 웃을수록 에이가의 심기는 더욱 불편해졌다.
“아가씨께서는 사정이 있으셨어요. 우선 폐하께서 돌아오시면 그 이야기부터 하려고 했어요. 이렇게 들이닥치시기 전에요.”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이 계집이 정말 알기어스의 사생아인지 말이야.”
“…….”
이야기의 주인공은 분명 저인데 릴리는 어쩐지 이 상황에서 저 혼자만 동떨어져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에이가가 말한 로레인이 자신의 어머니라는 것은 잘 안다. 또 자신이 왕의 사생아라는 것 역시 유모에게 들어 알고 있다.
그래서 백금의 머리와 회색 눈동자를 물려받은 그녀를 버리듯, 숨기듯 오지 산간 깊은 성에 방치하고 외면했다는 것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얼굴을 본 적도 없고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지금은 그저 가엽다고 생각한다. 올라가 늘 그들을 가엽게 여기라고 해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올라가 살아 있을 땐 그녀가 오래 살아 주기만을 바라왔고 올라가 죽고 난 후에는 바다를 건너 그녀의 고향에 갈 수 있기를 소원해 왔다. 그리고 부르테를 만나고 난 이후에는 올라의 고향에서 루나와 부르테와 함께 오래오래 살 수 있기를 바랐다.
저가 원하는 것은 비록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릴리는 누군가를 원망하지도 저를 미워하지도 않았다. 다만 정처 없이 흐르는 삶도 언젠가 목적지에 다다를 것이라고 믿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은 이곳이 그 목적지가 아니길 바라고 있다. 제발 이곳이 인생의 목적지만은 아니길.
“아가씨의 얼굴을 좀 보세요. 로레인 마님과 판박이라고요.”
에이가가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러나 카르낙의 고개는 의아함으로 기울었다. 로레인을 닮았나? 그녀와는 자주 대면한 일이 없었지만 눈에 띌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기억한다.
언뜻 로레인의 실루엣이 비치기도 하지만 로레인만큼 아름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것이 알기어스의 피가 섞여서인지, 아니면 털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해괴한 생김새 때문인지….
“게다가 모근을 보아하니 분명, 분명 백금발 머리가 맞아요.”
“에이가, 당신은 노안 때문에 활자도 잘 못 보잖아.”
그런 주제에 저 동그란 머리통에 잘 보이지도 않는 모근은 어떻게 봤단 말인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루이스.”
“네, 폐하.”
“이 계집을 벗겨 봤나?”
“예?”
루이스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제 가슴팍을 손으로 짚었다.
“제가요?”
“그래. 여자의 몸에 난 털은 확인해 봤냔 말이야.”
“…아… 아니요. 저는… 어떻게 제가 감히….”
엘버그 왕국으로 오는 배에 태웠을 때부터 그녀는 왕의 약혼녀였다. 어떻게 감히 한낱 기사 조무래기들이 그녀에게 손을 댈 수 있겠나.
부두에 정박하자마자 파니릴리는 왕의 여자로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망토를 뒤집어쓴 그녀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혹여 왕의 여자를 눈여겨보았다가 카르낙이 무슨 사달을 낼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흐음.”
못 미더운 표정으로 파니릴리를 위아래로 가늠하는데 에이가가 그의 생각을 읽고 재빨리 앞을 가로막았다.
“제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건 절대로 안 됩니다.”
“달리 확인할 방법이라도 있어?”
“제가 증명해요! 이분은 로레인 마님의 따님이세요! 확신을 얻고 싶거든 제 목을 걸겠어요. 만일 아니라면 제 목을 자르십시오!”
“그놈의 목은 대체 몇 개인지 말이야.”
“한 스무 번쯤 됐습니다.”
옆에서 로로가 조용히 속삭였다. 카르낙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당장 이 계집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이봐. 엘버그말을 할 줄 안다지?”
카르낙이 릴리에게 물었다.
“아주 유창하십니다.”
루이스가 대신 대답했다. 카르낙은 제 앞에 앉아 있는 쪼그만 계집을 고압적으로 내려다보다 그녀의 의자를 발로 툭 찼다. 릴리의 몸이 놀라 움찔했다.
“폐하!”
에이가가 하얗게 질려 소리를 질렀다.
“알기어스의 사생아. 벙어리도 아닌 주제에 대답하시지.”
릴리는 회백색 눈동자를 빛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차분하고 신중하며 더없이 가라앉은 빛이었다.
“저에게 무엇을 물으셨는지요?”
“뭐?”
“무엇을 물으셨냐고요.”
“말을 할 줄 아냐고 묻잖아.”
“할 줄 아니까 대답한 것 아니겠어요?”
“…….”
카르낙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누구도 그에게 이렇게 말대답을 하지 않는다. 주제도, 형편도 모르고 어디서 감히.
“내 손으로 네 아비를 죽인 건 알고 있어?”
“…….”
아니. 그것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 한때 어머니의 시종이었다는 에이가는 그녀를 보자마자 놀라다가 이내 울음을 터트리며 제 발밑에 엎드렸다가 어떻게 지냈는지 연유를 묻다가 이내 로로라는 노인과 심각한 얼굴로 언쟁을 했다.
아마도 그녀의 행색이 문제가 된 것 같았다. 그라타에 있을 땐 아무런 문제가 없던 외형이, 엘버그 왕국에서는 무척 해괴한 모습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만큼 이 땅을 오랫동안 떠나 있었던 것이다.
이자가 내 아비를 죽였다고? 얼굴도 보지 못한 사이다. 저를 버린 어미나, 자식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아비나 저를 버린 것은 마찬가지이니 별다른 애정도 없다. 그러니 그자가 죽었다고 해서 그다지 슬퍼해야 할 이유가 없다.
검은 머리에 차가운 보라색 눈동자. 어떻게 봐도 저와 닮은 구석이 없는 이 남자가 왕가의 자손일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왕좌를 차지했다는 것은 알기어스 왕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앉았다는 말밖에 더 되겠는가.
엘버그의 땅에 있을 때도 떠날 때도 왕족에 관한 것들은 무엇 하나 그녀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그러니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었다. 그가 왕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좋아하거나 혹은 싫어할 이유도 없었다.
다만 거칠고 무례한 그의 행동거지에는 기분이 상했다. 사람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않는 자인가.
“내가 네 아비의 목을 베었지. 네 아비의 왕좌에서.”
“카르낙.”
로로가 조용히 그를 만류했다. 그러나 카르낙은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제 앞의 계집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혈육의 목을 베었다는 소리에도 눈 하나 깜짝하질 않았다. 누구의 성질을 닮은 것일까. 로레인? 아니면 알기어스? 그도 아니면 다른 누군가?
개중 누구 하나와도 엮이고 싶지 않다. 비로소 계집을 앞에 두고 카르낙은 깨달았다. 그가 결혼해야 할 여자가 알기어스 왕의 핏줄이라는 것을. 저가 가장 증오하여 베어 버렸던 자의 피가 그녀의 몸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차라리 문둥이나, 사내아이라면 좋았을 것이다. 차라리 반신불수나, 얼굴에 커다란 흉터가 있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벙어리, 귀머거리, 장님 그중 뭐라도 좋았을 것이다. 알기어스 왕과 같은 회백색 눈동자를 보는 것보다는 말이다.
“이 계집을 서쪽 탑에 가둬라.”
“폐하!”
에이가가 기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