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발 아래 은빛 눈-8화 (8/231)

8화

“두갈은 분명 ‘여자아이’라고 했어요!”

그러더니 두갈에게 한 번 더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러고는 다시 루이스에게 말했다.

“맞대요. 계집이래요. 그라타로 흘러들어 온 이방인은 저 아이 하나뿐이랍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파니릴리는 머리에 뒤집어썼던 망토를 뒤로 젖혔다. 그녀의 새하얀 얼굴이 완연하게 드러났다. 그럼에도 루이스는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두갈을 향해 욕을 지껄였다. 대체 무엇 때문에 장정 둘을 데리고 이 더럽고 미개한 시골 마을에 머물렀단 말인가. 고작 저런 시궁창 쥐새끼 같은 놈을 찾자고.

“내가 찾는 건 이런 덜떨어진 계집이 아니라고, 이 빌어먹을 새끼야!”

루이스가 두갈의 배를 향해 검을 꽂아 넣었다. 아아악, 하고 두갈의 목구멍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남편의 배가 검으로 꿰뚫리자 두갈의 아내는 아이들이 보지 못하도록 그들의 위로 몸을 덮으며 곡을 했다.

“내가 맞아요!”

멀리서 파니릴리가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에 로넨과 레이네도 살육을 멈췄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 보는 엘버그의 언어였다. 그것도 계집에게서나 들을 법한 곱고 높은 미성으로 지껄여 제 사타구니를 근질거리게 만드는, 분명 그것이었다.

루이스는 두갈의 배에서 검을 뽑아내고 놈을 떨구었다. 풀썩 바닥으로 쓰러진 두갈을 그의 아내가 받아 제 머리에 두른 리넨 천으로 복부에 번지는 핏물을 덮으며 울었다.

저벅, 저벅, 악귀 같은 루이스가 고운 음성을 지닌 파니릴리를 향해 다가갔다.

“뭐라고 했냐, 꼬마야?”

얼굴이 제법 선명하게 각인될 정도로 다가가니 비로소 파니릴리의 회백색 눈동자가 보였다. 가늘게 뜬 루이스의 눈두덩이가 미세하게 떨렸다.

“왕의 사생아를 찾고 있다면 제가 맞다고 했어요.”

“…….”

루이스에게서 비릿한 피 냄새가 풍겼다. 손끝이 바르르 떨려 와 주먹을 말아 쥐었을지언정 눈동자는 지지 않으려는 듯 고집스레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라고?”

듣고 있던 레이네가 미간을 구기며 다가왔다. 릴리는 다시 또박또박 대꾸했다.

“내가 왕의 사생아라고요.”

“…….”

대답을 듣고 나자 레이네의 시선은 루이스에게로 향했다.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네가 왕의 사생아라고?”

어느새 다가온 로넨마저 다시 물었다. 대체 몇 번이나 같은 대답을 반복해야 하는가. 릴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로넨을 한번 쳐다보았다가 다시 루이스를 보았다. 로넨의 시선도 루이스를 향했다. 그는 파니릴리의 회백색 눈동자를 보며 언뜻 무언가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것을 확신할 수 없어 제 상관을 향해 물었다.

“이 계집이, 알기어스 왕의 핏줄이란 말입니까?”

루이스는 어금니를 물었다. 화염 빛에 반사된 그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러더니 지체하지도 않고 칼을 휘둘러 제 수하인 로넨과 레이네의 목을 모조리 베었다. 그 순간은 누구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아무도. 심지어 다닥, 다닥 불타오르던 화염 소리마저 멈춘 것 같았다.

루이스는 생사고락을 함께 나눈 제 부하들의 핏기가 흐르는 검을 다시 검집에 넣으며 릴리를 향해 경고했다.

“다시 누군가의 머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거든 그 입은 꼭 다물고 있는 게 좋을 거다, 꼬마.”

“…….”

그러고는 파니릴리를 비켜 마을의 입구로 향했다. 어느덧 까매진 하늘에는 달이 떠올라 있었다. 마을을 집어삼킨 불꽃이 별빛처럼 피어올랐다. 다음 날 그라타에는 장대비가 쏟아졌다. 파니릴리가 막 국경을 넘은 시점이었다.

***

아침나절부터 성안이 소란했다. 기약 없는 약혼녀를 기다리느라 지루하던 카르낙은 막 핀과 몇몇 병사들을 데리고 나가 커다란 멧돼지와 사슴 몇 마리를 싣고 오는 길이었다. 웅성대며 몰려 있던 사람들은 카르낙의 말이 다가오자 빛을 본 바퀴벌레처럼 흩어졌다.

카르낙은 고삐를 당겨 말을 세웠다. 그러고는 다가오는 시종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오셨습니까, 폐하.”

카르낙은 말에서 내리고 장갑을 벗었다. 시종이 그것을 받아 든 후 공손히 그에게 물수건을 건넸다.

“로로와 에이가는 어딨나?”

“예배당에 있습니다.”

카르낙의 얼굴이 언짢게 찌푸려졌다. 알기어스 왕이 강박적으로 남겨 둔 그의 동상과 상징을 파괴할 때 그는 성내 교회의 성물과 상징들도 모조리 파괴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저를 도와준 에나(교황)의 심기를 거슬러선 안 된다며 막아선 에이가 덕에 교회는 아직 제구실을 하고 있었다.

물론 본디 그 구역을 차지해야 할 사제와 수도사들은 없지만 말이다. 그 덕에 에이가는 늘 은밀하게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누구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예배당 안쪽의 제의실에 숨어들었다. 다른 이들이 보기엔 신실한 믿음을 가진 신자로 보일 테지만 사실 그녀는 주인이 없는 제의실을 제집처럼 드나들 만큼 신앙심이 없었다.

“오늘 저녁은 멧돼지 요리다, 핀!”

카르낙은 바로 뒤에서 그를 따라 내리는 핀을 향해 소리쳤다.

“에이가가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모양이야.”

“그게 에이가의 일이잖아.”

핀은 저의 장갑도 벗어 시종에게 건네며 대꾸했다.

“글쎄, 뭐든 내게 좋은 일은 아니지.”

카르낙이 따라오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핀은 병사들에게 쉬라는 말을 남기고 왕의 뒤를 따랐다.

회랑을 지나 거대한 아치형 기둥을 돌자 곧바로 예배당이 보였다. 입구부터 즐비한 사람들은 카르낙이 나타나자 길을 비켜 주며 허리를 굽혔다.

“폐하.”

“무슨 일이야?”

카르낙은 아무 남자나 붙잡고 물었다. 그의 억센 손에 팔이 붙잡힌 사내는 식은땀을 쏟으며 도리질을 했다.

“모, 모르겠습니다, 폐하. 보시다시피 병사들이….”

그의 말에 카르낙은 입구를 지키고 선 병사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창과 방패,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촘촘히 예배당 입구를 메우고 있다가 카르낙이 보이자 곧 창을 거두고 몸을 좌우로 비켰다.

카르낙이 지나가고 그 뒤를 핀이 따르자 병사들은 창을 교차해 그의 앞을 막았다. 핀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두 손을 들고 고압적인 눈빛으로 오른쪽 병사를 쳐다보았다. 병사의 목젖이 꿀꺽, 하고 힘겹게 움직였다.

“아…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에이가 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내가 아무나는 아니지, 병사. 네놈의 앞날을 죽느니만 못하게 해 줄까?”

“그쯤 해 둬, 핀.”

개처럼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자 카르낙이 끼어들었다.

“나 보고 아무나라잖아.”

“난 왕이고, 넌 아니니까. 그러니 얌전히 기다려. 잘 기다리면 맛있는 걸 줄게.”

그 말에 핀은 발끈했다. 주먹을 꽉 쥐고 눈을 부라렸는데 혀끝까지 올라온 욕설은 차마 뱉지 못해 ‘잇’ 하고 이 물린 소리만 났다.

예전의 카르낙은 어떤 문이든 모조리 열고 들어갔다. 그것이 아무리 거대해도, 아무리 육중해도 언제나 제 두 손으로 활짝 밀어젖혔다. 그렇게 그는 이곳까지 왔다.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치웠다.

그러다 왕이 되자 그는 제 두 손을 쓸 필요가 없었다. 누군가가 카르낙이 그 앞에 채 당도하기도 전에 활짝 문을 열어 주었다. 아무리 거대해도, 아무리 육중해도. 그 어떤 공간이라도 상관없었다.

제의실의 문이 열렸다. 그 어떤 고지도 없이 문이 활짝 열리는 기척에 너덧 명의 사람들이 그를 돌아보았다. 에이가와 로로 그리고 두어 명의 시녀와 근위대 소속 루이스였다.

“폐하.”

로로가 화들짝 놀라 그를 불렀다. 에이가는 카르낙의 시야에서 무언가를 가리려는 듯 그의 눈앞을 막아서며 다소 과장된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이야?”

카르낙이 물었다. 에이가는 어쩐지 숨결이 거칠어져 있었다. 그녀는 아마도 카르낙이 이토록 빨리 돌아오리라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벌써 사냥이 끝나셨나요?”

“무슨 일이냐니까?”

카르낙이 다시 물었다. 말 돌리기에 실패한 에이가는 부산하게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중얼댔다.

“어, 그게 그러니까….”

“루이스.”

“예, 폐하.”

에이가가 쉽사리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자 카르낙은 다른 이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

루이스 역시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카르낙은 슬슬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로로.”

“예, 폐하.”

“설명해.”

웬만한 일에는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을 하지 않는 점잖은 노인인 로로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루이스 경이 오늘 막 카스티 제도에서 ‘무언가’를 가지고 왔습니다만.”

무언가? 카르낙은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카스티 제도에서 가지고 올 것들이야 많았다. 엘버그 왕국의 배짱 좋은 상인들이 그곳에서 희귀하고 진귀한 물건들을 싣고 와 비싼 값에 팔고는 하니까. 연례행사로 그중 가장 값비싼 물건을 왕에게 바치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아직 카르낙은 받아 본 일이 없었다. 어지러운 정세 탓이리라. 아니면 벌써 반란군에게 가져다 바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카스티 제도에서 이곳, 성안으로 가져올 것은 딱 하나뿐이었다. 로로는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그것이… 생각했던 것과는 좀 달라서….”

“생각과는 다르다?”

카르낙이 로로의 뒷말을 따라 읊었다. 배운 것은 없지만 에이가가 좌불안석으로 숨기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만큼 아둔하지는 않다. 그녀는 카르낙에게 바다 건너 카스티 제도에 왕의 사생아가 있다고 했다.

그녀를 찾아와 결혼을 해서 치세를 안정시키라고도 종용했다. 그리고 카르낙은 절반은 객기로, 절반은 호기심으로 그녀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 물건에 하자가 있단 말이지? 이것 참 재미있는 광경이 아닌가. 카르낙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물러서, 에이가.”

“폐하, 먼저 따로 말씀드릴 것이 있어요.”

“사내아이?”

“예?”

“그러니까 내 약혼녀가 좆을 달고 있느냔 말이야.”

상스러운 말에 에이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격하게 도리질을 하면서도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아니요, 폐하! 그건 절대 아닙니다!”

저런. 그 편이 재밌을 텐데. 그렇다면 최소한 계집이긴 한 모양이군.

“문둥이?”

“아니요.”

“반신불수?”

“아닙니다!”

“흉측한가?”

“아니요! 아니에요, 폐하! 먼저 저와….”

이도 저도 아니란다. 기대한 것 중 하나도 들어맞질 않으니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카르낙은 에이가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는 밀려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으나 카르낙의 힘 앞에서는 무력했다.

에이가가 비켜나니 시종들도 그의 앞에서 물러섰다. 마침내 카르낙은 에이가가 감추지 못해 안달하던 것을 맞닥뜨렸다. 남루한 잿빛 망토를 뒤집어쓴 어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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