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엘버그에서 온 세 군인은 무엇이 그토록 우스운지 낄낄 소리를 내며 웃는데 카스티 제도를 떠난 적이 없는 하자르만이 잔뜩 겁을 먹은 채 몸을 움츠렸다. 엘버그의 새로운 왕이라면 바다 건너의 땅에도 소문이 파다하다.
벌레들의 왕이라 불리는 그자는 반역을 시작하고 채 1년이 되지 않아 신의 아이를 죽이고 왕좌를 차지한, 말라비틀어진 모래사막 같은 피부에 벌레처럼 새까만 머리를 가지고 있다 들었다
흉측한 몰골만큼 성정도 흉포하여 그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도륙된 사람의 시체들로 피비린내가 진동한다고 하였다. 그가 죽인 알기어스 왕의 시체는 흙더미 속에서 다 썩지도 않았을 텐데 한때 그를 섬기던 왕의 근위병들은 벌써 새로운 왕에 대해 농을 지껄이며 낄낄거리다니.
무역상인 아버지는 돈을 섬겨 그를 배반한 적이 없는데 칼을 두고 피로 충성을 맹세했던 자들은 손바닥 뒤집듯 맹세를 바꾸다니. 그뿐 아니라 왕의 잔인한 성정을 빗대어 농담을 하고 있지 않나. 그것이 자랑거리라도 되는 양 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하자르는 환멸감이 치밀어올랐다.
바다 건너 대륙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땅. 신이 선택하여 가장 먼저 얼음으로 자신의 아이를 빚어내었다는 그 땅은 카스티 제도의 사람들에겐 신비로운 곳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비록 언어와 종교와 문화는 다르다 하여도 누구나 한 번쯤 신이 선택하였다는 그 땅에 가 가장 먼저 빚어내었다는 엘버그의 왕족의 아름다움을 목격하고 싶어 했다. 벌레가 왕좌를 차지한 이후론 모두 헛꿈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분은 어떤 분입니까?”
하자르가 물었다.
“누구를 말하는 거야?”
“그분 말입니다. 엘버그의 왕.”
셋은 다시금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불안한 기색은 없었다. 하자르의 질문에 누가 대답해 줄지, 무슨 대답을 할지 저들끼리 가늠하다가 루이스가 못 이기는 척 입을 열었다. 여전히 입가에는 장난스러운 웃음이 가득한 채였다. 아무래도 그에겐 왕에 대한 두려움이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아아, 경애하는 발투만 폐하 말이지?”
‘폐하’를 발음할 때 일부러 입을 크게 벌려 강조하는 모양새가 비아냥인지 무엇인지 헷갈려 하자르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주 무서운 분이라고 들었는데요.”
“아, 맞아. 그렇지. 그렇지 않고는 어떻게 신의 아이를 죽일 수 있겠어.”
그 말에 로넨과 레이네가 다시 낄낄거렸다. 하자르는 그것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대체 이치들은 나라의 운명이 뒤엎어진 반역에 대해 아무런 고민이나 두려움이 없는 것일까. 그들의 신앙과 근본을 뿌리째 뒤흔든 사건이 아니던가.
적어도 그에 대한 괴로움이나 슬픔 따위는 조금 내보여야 하지 않나. 그러나 여기 있는 자들 중 누구도 그 일에 대해 깊게 사고하지 않았다. 마치 그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그렇다면 애초에 엘버그의 사람은 맞는 것일까.
하자르는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던 그들의 생김새와 차림새를 눈으로 훑었다. 잔뼈가 굵어 보이는 단단한 몸과 전쟁터에서 그을리고 부르터 거칠어진 피부, 적색과 흑색이 섞인 각양각색의 오묘한 금발. 지금껏 보아 왔던 엘버그의 사람들과 같았다.
다만 좀 더 그을리고 다부진 피부를 뺀다면. 당연하다. 그들은 군사들이지 않나. 하자르는 한 번도 엘버그의 군사들을 본 적이 없었다. 오로지 그가 본 엘버그인이라고는 상인들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알지 못했다. 엘버그의 군사들은 모두, 다른 엘버그의 무역 상인들처럼 그을린 적이 없는 창백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제대로 햇빛조차 보지 않은, 그저 황금으로 치장해 보기만 좋았던 엘버그의 군사들은 모두 벌레들에 의해 참수당했다는 것을 말이다.
“발투만은… 아니, 발투만 폐하는 전사야.”
루이스가 빼꼼히 머리를 내민 호두의 알맹이를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왕에 대해 말하는 그치의 눈빛이 전에 없이 빛났다.
“태어날 때부터 전사였고 단 한 번도 전사가 아니었던 적이 없지.”
그러고는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자르는 그들에게서, 그들의 빛나는 눈빛에서 기이한 자부심을 읽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왕을 깔보는 듯하면서도 경애했고, 비웃는 듯하면서도 사랑하고 있었다.
그것은 충성이기 이전에 생사고락을 함께 겪은 전우에 대한 신뢰 혹은 믿음, 혹은 우정 따위와 같은 것이었다. 하자르는 그 팽팽하고 단단한 감정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리고 우리는 발투만 폐하께 이곳으로 숨어든 계집 하나를 잡아다 바쳐야 한단 말씀이야.”
그 이야긴 아버지에게 들어 알고 있다. 왕의 근위병들이 엘버그 왕국 출신의 여자 하나를 찾고 있다고. 하자르가 이 촌 동네까지 흘러들어 온 것도 그 여자를 찾는 데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엘버그에서 넘어온 계집을 찾는 것은 건초 더미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았다. 돈이 궁한 사람들은 사례금을 얻기 위해 온갖 거짓 정보를 쏟아 냈다. 근위병들이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뿔뿔이 쪼개 흩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자르가 귀동냥으로 얻은 정보는 십여 년 전 그라타로 흘러들어 간 꼬마 계집애에 대한 이야기였다. 열 살 남짓한 작은 계집 하나가 어디서 났는지 모를 값비싼 보석들을 가지고 있더라는. 그 소문이 빠르게 돌아 동네의 부랑배들이 계집을 찾아 헤맬 때쯤 그녀는 국경을 넘어 그라타로 사라졌다고 했다.
그 이후로는 누구도 그 계집을 본 일이 없었더랬다. 만일 다른 말이 없었다면 또 누가 사례금을 목적으로 지어낸 헛소리라 치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계집의 머리가 눈처럼 새하얗더라는 덧붙여진 말은 루이스와 그 일당들을 그라타의 땅으로 이끌었다.
카르낙 발투만이 단 하나 남은 알기어스 왕의 사생아를 찾는다는 이야기는 근위대 내부에서도 아는 자가 몇 되지 않았다. 근위 대장이자 발투만의 복속인 핀이 루이스를 비롯한 그의 심복 몇에게만 언급한 정보였다.
함부로 이야기가 새어 나갔다간 사생아를 찾지 못함은 물론, 안 그래도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반역자들에게 더 큰 반란의 빌미를 마련해 줄 수 있었다.
루이스는 그라타로 넘어오기 전 핀에게 해당 내용을 써 전령을 보냈다. 확실하다면 더는 이 말도 통하지 않는 촌구석에 병력을 낭비하지 않아도 될 호재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호기롭게 들어선 그라타의 땅에서 루이스 무리는 지금껏 겪어 보지 못한 복병을 만나고 말았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우거진 미로 같은 그라타의 숲과 정비되지 않은 부족 마을들은 둘째로 치더라도 설마 말도, 무기도 구할 수 없는 원시적 땅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상하수도까지 완벽하게 정비된 엘버그 왕국처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기본적인 무기와 군사는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심지어 평민보다 신을 섬기는 사제와 학자가 더 많다는 엘버그 왕국의 북쪽 땅에도 기본적인 방위병들은 존재한다.
그것은 국경이 그어지고 자신들만의 문화와 땅이 있는 국가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라타는 군사나 말도 없을뿐더러 식당도, 여관도,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상인도, 심지어 화폐도 통용되지 않았다.
하자르의 기지로 국경 지대에 남아 있는 단 하나뿐이라는 여관을 찾아내긴 했지만 말이 여관이지 건초 더미를 쌓아 놓은 마구간의 한편과 제집 부엌의 한편을 내줬을 뿐 여행자를 위한 시설이라 할 만한 것은 어느 것 하나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런 곳에서 과연 알기어스 왕의 사생아를 찾을 수 있을까. 아니, 살아 있기나 할까. 화폐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사례금을 담보로 정보를 얻으려는 시도는 무용했다.
살아 있는 것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는 그라타의 사람들에게는 다른 이들은 군침을 흘리며 눈독 들이는 날카로운 검이나 뾰족한 화살촉 같은 무기도 무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루이스 무리에겐 가치 있는 것들이 이 마을에서는 모두 무용했다.
대신 그라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뜻밖의 것들로 루이스가 가지고 있는 허름한 가죽 주머니, 전령을 보내기 위해 지니고 있던 양피지 몇 조각과 허리에 찬 작은 단검 같은 것들이었다.
루이스는 사람들을 기다리라는 하자르의 말에 동의했다. 온갖 희귀한 벌레나 식물이 도처에 나 있는 이 지저분한 땅을 모험하고 싶지는 않았다.
천성이 땅을 점령하고 전리품이 될 만한 것은 뭐든지 약탈하는 자라고 해도 이 그라타의 땅은 탐험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기엔 이곳은 지형을 파악하기가 힘들었고 속을 알 수 없는 그라타의 사람들에게 괜한 공분을 사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양피지 한두 개를 건네주고 맛대가리 없는 술과 풀만 가득한 음식을 제공받으며 그라타인들은 남들을 속이지 않는다는 하자르의 말을 루이스는 믿어 볼 뿐이었다.
“로넨.”
루이스가 다른 호두를 집어 들고 날카로운 단도로 저미기 시작했다.
“네, 루이스 경.”
“너의 호박석을 달라던 그치 말이야. 이름이 뭐였지?”
“두갈 말입니까?”
“그자가 그것을 가져간 지 얼마나 되었지?”
로넨은 눈을 굴리며 날을 세었다.
“사흘째 되었을 겁니다.”
로넨의 호박석 목걸이를 가져간 자는 작은 돛단배가 재산의 전부라던 사내였다. 흙에서 나는 것을 주식으로 삼는 그라타인의 특성상, 그물로 고기를 낚는 것을 업으로 삼은 어부는 그라타가 아닌 다른 곳에 희귀종을 팔지 않으면 먹고 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래서 사내는 다른 그라타인들과는 좀 달랐다. 그는 화폐의 통용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대부분의 그라타 사람들과는 다르게 야심이 있는 사내였다.
어부는 로넨의 목에 걸려 있는 호박석을 요구했다. 지금은 차고 넘치는 전리품이지만 한때는 금화보다도 귀하던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대가로 백금 머리의 계집을 찾아오겠노라 호언장담하였다.
그러면서 의심하는 루이스에게 계집이 있는 곳은 누구나 알지만 아무나 함부로 발을 디딜 수는 없는 곳이라 했다. 루이스는 짐짓 그의 말투에서 그곳이 엘버그 북부의 성소와 같은 종교 구역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한 연유로 루이스는 로넨에게 호박석을 주라고 명령하며 사내에게 계집의 거처를 묻는 대신 사내가 사는 곳과 그의 신상을 물었다. 얼마간의 말미를 줄 터이니 반드시 계집을 데려오라는 말도 덧붙였다.
“벌써 사흘이란 말이지.”
루이스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사내에게 얼마의 시간을 주었던가. 사흘이었는지 닷새였는지, 아니면 그보다 더 짧았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아는 것은 이제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는 것이었다. 루이스는 탕, 하고 식탁을 내리쳐 호두 껍데기를 부쉈다. 하자르가 흠칫 놀라 ‘힉’ 소리를 냈다. 나머지 무리가 그의 모습에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루이스가 말했다.
“오늘 해가 질 때까지 오지 않으면 그라타는 사방에서 튀는 불꽃을 보게 될 거야.”
“…….”
하자르가 눈을 끔뻑였다. 루이스의 얼굴빛이 서늘했다.
“두갈의 식솔은 물론 그의 발길이 닿은 모든 곳을 도륙하고 불을 지를 거다.”
“…….”
하자르가 다시 히익 소리를 내며 로넨과 레이네를 둘러보았다. 피와 화염에 익숙해진 사내들에게선 하자르 같은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피 냄새를 맡은 짐승처럼 새하얀 이를 드러내고 숨죽여 웃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