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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5화 (5/231)

5화

“…제가 보기엔 불에 타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아요, 다이옌. 우리는 모두 그렇게 대지로 돌아가잖아요. 그런 뜻 아닐까요? 제가 불꽃에 휩싸인다는 건 결국 제가 행복해진다는 이야기 아닐까요?”

“그럴 수 있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어쨌든 그라타에서 불은 죽음과 연결되어 있었다. 모두에게 필요하지만 생명을 앗아갈 만큼 무자비한 것. 그것은 인간이 아닌 신의 도구였다. 사람에게 생명을 주고 또한 앗아가는 것. 그것은 선인 동시에 악이었고, 생명인 동시에 죽음이니 해석은 중의적이다.

그래서 부르테는 어떤 꿈도 의미를 단정 짓지 못했다. 신이 그녀에게 보여 주는 장면은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읽을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지만 릴리에 대한 꿈은 더욱 그랬다. 실로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녀에 관한 꿈은 늘 신이 보내는 경고처럼 여겨졌다.

그렇기에 부르테에겐 늘 릴리가 특별했다. 도저히 저는 읽을 수 없는 무언가를 그녀는 가지고 있었다. 오로지 신만이 아는 무언가를 말이다.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해, 릴리.”

부르테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선택을 해야 한다. 들이닥친 운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불행이든 다행이든, 기쁨이든 절망이든 반드시 선택해야 했다.

무엇도 선택하지 않기를 선택한다면, 그렇다면 저의 운명을 송두리째 남에게 맡겨야 한다. 그것은 부르테의 정신과 사상에 가장 위배되는 일이었다. 누군가의 꼭두각시로 사는 것은 기꺼이 대지가 부여한 제 삶과 영혼을 버리는 일로 부르테는 빛을 잃은 영혼은 영원히 평안을 얻지 못한다 했다.

영혼이 빛을 잃은 육신은 타지도, 심지어 흙 속에서 썩지도 않아 산송장 그대로 바다에 던져 넣는다고 했다. 아주 깊은 심연에서 천년만년 썩지 않은 채로 암흑 속에서 고통받는다고 했다. 릴리는 그런 부르테와 그라타의 아주 오랜 믿음에 대해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것만 알아 다오.”

부르테가 릴리의 손을 꼭 잡았다. 산 세월만큼 굽은 등과 노송처럼 거친 피부를 가졌으나 누구보다 맑은 현자의 눈을 지닌 노인이었다. 그녀가 릴리에게 보여 준 조건 없는 헌신과 믿음은 분명 사랑이었다. 부르테를 만나지 못했다면 받아 보지 못했을 사랑. 릴리는 저를 올려다보는 부르테의 빛나는 눈을 슬픈 빛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너를 위해 무엇이든 기꺼이 할 거다. 너를 처음 품에 안을 때부터 난 그렇게 선택했단다. 너를 위해 무엇이든 기꺼이 바치기로.”

“…….”

릴리는 작고 포근한 오두막을 눈으로 훑었다. 진흙을 구워 빚은 작은 물 항아리, 루가 좋아하는 색으로 염색하려고 항아리 가득 모아 둔 붉은 꽃잎들, 부르테를 위해 양털로 짜기 시작한 손목과 발목 보호대. 영원히 이곳에 머물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부르테가 죽으면 릴리는 제 손으로 부르테를 화장하고 이곳을 떠날 생각이었다. 루나도, 그녀도 성인이 되기 전 월경을 시작했으므로 둘은 다이옌이 될 수 없었다. 대지의 선택을 받은 이는 성년이 되어도 달거리를 하지 않았다.

아이를 품을 수 없는 몸은, 그렇기 때문에 모든 생명을 품을 자격이 주어졌다. 부르테의 자리는 다른 다이옌이 채우든가 아니면 완전히 비워져야 했다. 릴리는 그때가 되면 선택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곳에 좀 더 머무르며 새로운 터전을 탐색할지 아니면 루를 데리고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떠날지. 그래서 릴리는 부르테를 떠나는 날이 지금으로부터는 조금 더 멀리 있을 것이라 여겼다. 적어도 부르테의 임종은 지킨 후 떠날 것이라 생각했다. 설마 이토록 급작스럽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때를 맞닥뜨릴 줄은 몰랐다.

만일 이곳에 남기를 선택한다면 검은 그림자는 언젠가 이 오두막을 찾아올 것이다. 도망치기로 선택하더라도 저를 찾아 이곳을 거쳐 갈 것이 분명했다. 부르테는 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릴 터였다. 그렇다면 루나는, 그 아이는 어떻게 될까. 나와 함께 도망가기를 택할까, 아니면 이곳에 부르테와 남기를 택할까?

때마침 루나가 물동이 가득 물을 길어 왔다. 그러더니 불씨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아궁이를 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왜 아무도 불을 때고 있지 않았어?”

“미안. 깜빡했어.”

릴리가 퍼뜩 사과했다.

“저런. 살려둔다는 걸 나도 깜빡했구나.”

부르테도 덩달아 핑계를 보탰다.

“나와 봐요. 내가 할게요.”

루나는 삽자루로 아직 열기가 식지 않은 숯덩이를 꺼내어 반대편 화로로 옮겼다. 그러고는 마른 장작 몇 개를 집어넣고 입으로 후후 불어 불길을 키웠다. 릴리는 화력을 올리려 열심인 루나의 천진한 모습을 쳐다보았다가 다시 부르테와 시선을 맞추었다. 부르테는 여전히 말하고 있었다. 너는 선택해야 해, 릴리. 반드시 선택해야 해.

“…….”

루나에게서 안식처를 빼앗을 수 없다. 단지 두렵고 겁이 난다는 이유로 부르테와 루나를 알 수 없는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 이곳에서 부르테는 다이옌으로서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해야 하고, 루나는 부르테에게 안식을 준 뒤 마을의 어느 사내에게 정착하여 자신만의 행복한 가정을 꾸려야 했다.

천둥벌거숭이로 그라타에 도착해, 누구도 품어 주지 않는 기이한 외형의 아이를 기꺼이 저의 식솔로 받아들인 부르테와 루나에게 그 정도의 삶은 주어져야 마땅했다. 어떤 이유에서건 그들에게 해가 될 순 없다. 저로 인해 그들이 고통받아선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주저할 까닭이 없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여길 떠나겠어요, 다이옌.”

“…….”

루나가 생뚱맞은 소리에 몸을 돌려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뭐? 뭐라고 했어, 판?”

“제가 먼저 그들을 찾을래요. 그들이 저를 찾기 전에요.”

릴리는 루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를 쳐다보면 마음이 흔들릴까 부러 시선을 외면하여 어둠이 드리워지는 창밖으로 시선을 비꼈다. 품 안의 칼새가 꿈틀거렸다. 언젠가 새는 태어난 모습 그대로 치유된 날개를 펼치고 하늘로 비상할 터였다.

칼새가 새파란 하늘의 끝에서부터 끝까지 자유롭게 활공하는 모습을 상상하자 시릴 정도로 눈이 부셨다. 릴리는 품 안의 칼새를 더 꼭 안았다. 괜찮다. 비상하자. 열심히 어디론가 향하다 보면, 그렇게 날다 보면 언젠가 다시 세상을 돌아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오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 아무런 근심도, 그 어떤 두려움이나 죄책감도 가지지 않으려면 지금 이곳을 떠나 비상해야만 했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금은 그것들을 이고 지고 떠나야 할 때였다. 그러니 모든 것을 마음에 새겨 두고 이 아름다운 마을을 벗어나자.

“제 마음은 언제나 이곳에 있을 거예요. 다이옌”

아아. 언제라도 눈을 감으면 이곳을 그릴 것이다. 푸른 숲. 푸르른 하늘, 빛나는 별빛과 싱그러운 생명들이 언제나 제 안에서 살아 숨 쉴 것이다.

그것으로 되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보금자리를 마음속에 품고 간다. 충분하다. 분에 넘칠 만큼 많다. 부르테는 파니릴리를 제 품에 꼭 안았다. 노인에게서는 풀과 불에 그을린 나무의 향이 났다. 릴리는 눈을 감고 힘껏 그녀를 마주 안았다. 고맙고도 그리울 사람들의 온기를 평생 간직하기 위해서.

***

루이스는 그라타의 단 하나뿐인 여관이자 술집인 오뱅 부인의 오두막의 투박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는 멀리서 동이 터 오는 것을 멍하게 바라보며 단단한 호두 껍데기를 날카로운 단도로 기계적으로 저몄다.

약간의 악력으로도 손쉽게 부술 수 있는 껍질을 하염없이 저미는 까닭은 순전히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였다. 아직 채 하루가 시작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그는 하루의 끝을 기다렸다.

이곳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하루 종일 창가에 죽치고 앉아 맛대가리 없는 술을 시켜 놓고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는 것.

음울한 얼굴로 루이스의 곁을 지키는 이들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수하인 레이네, 로넨 그리고 통역가인 하자르였다.

서걱서걱, 호두 껍데기가 저며지는 소리와 창밖에서 닭들이 푸드덕거리는 소리만 가득한 가운데 로넨은 참지 못해 물었다.

“계속 이렇게 시간만 죽이는 겁니까? 멍하게 앉아서? 검 한번 안 뽑아 보고?”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레이네가 맞장구를 쳤다. 그는 오랫동안 감지 않아 떡이 진 붉은 머리를 손으로 벅벅 긁으며 투덜댔다.

“이 동네 술에선 고양이 똥 냄새가 난다고요. 건초 위에서 자는 것도 이제 신물이 났습니다. 루이스 경, 차라리 몇 놈을 잡아 족쳐서 행방을 알아냅시다.”

그들은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하루가 멀다 하고 전장을 누비며 제 칼을 피로 적시던 왕의 근위병들이었다. 이역만리 뱃멀미를 해 가며 떠나온 것도 모자라 몇 날 며칠 검을 뽑아 보기는커녕 훈련받은 군견처럼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 기약도 없는 소식을 기다리려니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었다.

“그… 그라타는 산악 지대라… 함부로 길을 나섰다간 길을 잃기 십상입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으니 이곳에서 기다리는 편이 더 이로우실 겁니다.”

고조되어 가는 불만에 루이스 대신 통역관 하자르가 어렵게 입을 뗐다. 하자르는 이제 막 스물이 된 청년이었다. 그는 카스티 제도에서 가장 유명하고 부유한 상인의 막내아들로 엘버그 왕국은 물론 카스티 제도의 여러 나라 말에 능통하다 했다.

까무잡잡하고 기름진 제 아비와는 다르게 하얗고 곧은 체구와 사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조용하고 가느다란 목소리는 그가 제법 유약한 성정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우린 산전수전 다 겪은 군인이라고. 어떤 곳이라도 약간의 단서만 있으면 찾아낼 수 있어.”

레이네가 신경질적으로 반박하자 하자르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나 겁먹은 표정임에도 할 말은 다 해야겠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은 다릅니다, 병사님. 그라타의 땅은 작지만 살아 있는 생명 중 그 어떤 것도 이 땅의 끝에서 끝까지 횡단해 본 적이 없대요. 책에 따르면 사람이 절대로 다다르지 못할 가장 높은 산봉우리와 세상에서 가장 깊은 호수가 수십, 수백 개라고 합니다. 그것이 제아무리 용맹한 대왕도 이 땅을 지배하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지요.”

“엘버그의 왕이라면 다를 거야.”

로넨이 덧붙인 말에 레이네는 피식 웃었다.

“맞아. 그자라면 더한 것도 해내겠지. 안 그렇습니까, 루이스 경?”

무표정하던 루이스의 얼굴에도 홀연히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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