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알기어스 왕은 성군이 되지 못했던 것처럼 좋은 남편도 되지 못했다. 그는 제 마음에 드는 여자라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가랑이를 파고들었고 그렇기에 나라의 도처에 사생아가 깔려 있었다. 덕분에 그 모두의 목을 자르는 데 꽤 많은 시간과 노동력이 들었다.
카르낙은 왕가의 씨를 완전히 말렸다고 생각했다. 오늘 에이가에게 로레인의 사생아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에이가는 지금까지 다분히 의도적으로 그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옆에서 카르낙의 하명으로 로로가 알기어스 왕의 사생아를 줄줄이 적어 갈 때조차. 단 한마디도.
“이건 뭐라고 봐야 하지, 에이가? 반역인가?”
“그분은 카스티 제도에 있어요.”
“어디?”
“아주 먼 바다 건너에요. 다시 돌아올 것을 바라지도 않고, 아마 돌아올 생각도 없을 겁니다.”
“…….”
카르낙은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고 에이가를 골몰했다.
“하게너가 자신의 부인에게 꽤 박한 사내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야.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어.”
“그건 폭력이었어요.”
에이가는 주먹을 꽉 쥐고 자신의 전 주인을 떠올렸다. 아름답고, 착하고, 선하여 늘 상처 받던 아름다운 로레인을.
“알기어스 왕은 마님을 눈독 들였고 유반 하게너는 그것을 이용했어요. 알기어스가 자신의 처를 범하는 만큼 자신에게 이득이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는….”
그녀는 눈을 한번 꽉 감았다가 떴다.
“그는 로레인 아가씨를 마치 물건처럼 이용했어요. 제 가문의 장자를 낳아 주었는데도… 그 짐승만도 못한 자는 아가씨를 끔찍하게 대했어요.”
유반 하게너는 부유한 상인이었다. 로레인은 몰락한 귀족의 딸이었고 그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살기 위해 유반 하게너와 결혼했고, 그럼으로써 하게너에게 귀족의 명예를 선사했다.
그 안에 사랑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유반 하게너는 천성이 잔인한 냉혈한이었고, 로레인은 아름다운 만큼 유약한 여인이었다. 어쩌면 유반은 로레인을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사랑했기에 그토록 그녀를 짓밟고 괴롭혔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자신의 부인과 침실을 왕에게 내어 주던 날이면 어김없이 자신의 분노와 모멸감을 제 아내에게 풀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로레인은 누구도 사랑하지 못했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말이다.
“아시잖아요. 마님의 삶은…. 그녀의 삶은 당신과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을요.”
카르낙은 대꾸하지 않았다.
“하게너에게는 사산아를 낳았다고 했어요. 부인은 자신의 사생아를 낳자마자 유모와 함께 북쪽으로 보냈고요.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유모가 죽은 후 아이는 카스티 제도로 건너갔다고 들었어요. 노파가 카스티에서 온 노예였으니까요. 그러고는 소식이 끊겼어요. 마님은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고요. 만약에 사생아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유반이 안다면… 분명 그 아이를 죽였을 거예요. 알기어스 왕은 상관도 하지 않았을 테죠. 제 핏줄을 민들레 홀씨처럼 여기저기 뿌려 놨으니까요.”
“그 아이가 알기어스 왕의 자식이란 건 어떻게 증명하지?”
“알기어스 왕의 아이예요.”
“그러니까. 대체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어. 그토록 꼭꼭 숨겨 놨는데 말이야. 이제 와서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난다 한들 그걸 누가 믿겠냔 말이야.”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어요.”
에이가는 계속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카르낙의 목소리는 더 고압적으로 변했다.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백금발이에요.”
“…….”
“아이는 백금발에 회색 눈을 지녔어요. 태어날 때 제가 봤죠.”
왕의 핏줄은 모두 은빛 머리에 회색 눈동자를 지니고 태어났다. 달의 여신 아마네스가 이 땅에 최초로 제 아이를 만들 때 얼음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은 모두 눈처럼 새하얀 백발에 눈처럼 새하얀 피부 그리고 눈처럼 맑은 회색 눈을 지녔고, 그것은 대를 이어 피가 섞여도 마찬가지였다. 왕의 핏줄은 곧 달과 연결되어 있었다. 생명의 어머니, 자비와 심판의 여신과 말이다.
“그녀가 당신에게 왕좌의 정당성을 부여해 줄 거예요.”
“…….”
“누구도 당신의 왕위에 사족을 달지 못할 겁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왕의 핏줄을 이어 갈 테니까요.”
“…….”
카르낙은 로로를 바라보았다. 제가 기억 못 하던 때부터 지금까지 제 곁을 지켜 오는 이의 얼굴이었다. 로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는 수 없었다. 더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 데려와.”
“…….”
“어디 한번 보기나 하자고. 그 잘난 백발 머리를 말이야.”
***
열흘간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벼락과 폭우가 내리쳤다. 마을의 절반이 물에 잠기고, 산에서 흘러내린 진흙에 파묻혔다, 파니릴리의 스승이자, 대모이자, 그라타의 종교 지도자인 부르테는 그것을 응당 인간이 되돌려받아야 하는 ‘업보’라고 했다. 행한 대로 돌려받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작고 어린 새는 무슨 죄를 행하였기에 이렇게 흙구덩이에 떨어져 죽음을 기다리게 되었을까. 이런 연약함을 목격하는 것 역시 제가 응당 되돌려받아야 하는 업보 중의 하나일까. 파니릴리는 날개를 퍼덕거리는 새를 손바닥에 올리며 ‘괜찮을 거예요.’ 하고 속삭였다.
“내가 도와줄게요.”
“판! 판!”
멀리서 루나가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파니릴리는 제 옷자락으로 아기 새를 감싸며 일어섰다.
“여기 있어!”
루나의 머리가 키 높은 풀들 사이에 뾰족 올라왔다가 곧 수풀을 헤치고 몸을 드러냈다.
“산막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왔어.”
분명 홍수 때문일 거다.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지혜를 구하기 위해 다이옌인 부르테을 찾았다. 그는 신의 뜻을 전하는 대리자이니, 그의 입을 빌어 하늘의 뜻을 파악하고 싶은 것이다.
“근데, 그건 뭐야?”
루나는 파니릴리가 제 상의에 감아 놓은 작은 물체를 유심히 살폈다. 웬 진흙 더미가 꼬물거렸다. 어쩐지 징그러운 느낌이 들어 루나가 ‘엑’ 하는 소리를 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기 새야, 룬.”
“다친 거야?”
“아마도. 분명 둥지가 근처에 있을 텐데 못 찾겠어.”
“다이옌께 여쭤보면 방법을 알려 주실 거야. 어서 가자, 판. 사람들 이야기도 들어 볼 겸.”
루나가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지난봄 경작을 한다고 숲을 모조리 태우지 않았나.”
부르테는 한껏 열기를 품은 커다란 솥뚜껑을 열며 말했다.
“하지만….”
사내 하나가 반박을 하려 서두를 떼었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흙을 보듬어 줄 나무가 없고, 나무를 자라게 해 줄 숲을 모두 죽였으니 누굴 원망해야 하나. 하늘인가, 아니면 자네들인가?”
영험한 부르테의 산막에서 장정 너덧은 대꾸하지 못하고 손에 들린 모자만 구겼다. 부르테는 돼지들에게 먹일 풀죽을 길고 단단한 나무 막대로 한번 휘휘 저어 보고는 아궁이 속으로 마른 장작 하나를 더 집어넣었다. 성치 않은 허리 때문에 몸을 굽혔다 펴는 동작이 한없이 느렸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집과 재산을 잃었습니다. 몇몇은 제 가족을 잃었고요.”
한 사람이 마지못해 입을 떼자 또 다른 사람이 거들었다.
“다이옌. 우리는, 우리는 지금 충분히 대가를 치렀습니다. 많은 이들이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고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저… 이 고통을 조금이라도 더는 것입니다. 그저 비명횡사한 자들의 넋이라도 기리고 싶은 겁니다.”
슬프고 처참한 얼굴로 말했지만 부르테의 얼굴에는 일말의 동정도, 슬픔의 빛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덤덤하고 자칫 차가워 보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애석하지만 흙더미에 파묻힌 가족의 시신을 꺼낼 방도는 없다네. 무너진 집터를 재건할 방법 역시 없어.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흘러내린 진흙 더미 위에 풀과 꽃과 나무가 다시 자라도록 돕는 것뿐일세.”
“…하지만 다이옌, 억울하게 죽어 간 이들의 넋이라도….”
장정의 말에 부르테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들이 대지에 죽음을 뿌렸고, 그 결과 죽음이 당신들에게로 가 결실을 맺은 것뿐인데 내가 뭘 어쩔 수 있다는 겐가? 그들의 영혼을 고귀하게 기리고 안식을 주고 싶다면 그들의 죽음에서 생명을 보게 하시게. 그것이 세상의 섭리이고 이치일세.”
“그렇다면 다이옌, 그 땅 위에 무엇을 심으면 좋을까요?”
“봄을 기다리게나.”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바람과 벌이 땅 위에 씨를 뿌리고, 가랑비가 땅을 적시고, 태양이 싹을 틔워 줄 때까지 그곳엔 무엇을 심지도, 자르지도 않으면 된다네.”
부르테의 말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 사내들은 우울한 낯빛으로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그들은 존경하는 다이옌의 입에서 위로를 받기는커녕 질책만 받았으니 기쁠 리 만무했다.
그러나 만물의 섭리는 냉혹한 법. 자비로운 대지의 여신은 그가 뿌린 생명들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었다. 그저 어머니처럼 주려 할 뿐. 그러나 어떠한 생명은 욕심이 많아 어머니의 육신과 영혼마저도 취하려 하다 벌을 받는다.
그 재앙은 자비로운 대지가 내는 형벌이 아니다. 스스로가 불러오는 재앙일 뿐. 그러니 자신에게 가혹한 일이 일어나거든 무릇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했다. 인간을 제외한 생명이란 모든 것이 자애로워 무엇에도 욕심을 내지 않는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 섭리를 거스르지만 않으면 된다. 본디 다이옌의 존재는 그러한 세상의 법칙을, 신의 섭리는 끊임없이 인간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 있는 것이었다.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이 다이옌을 신과 내통하는 자라 여기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만약 그곳에서 꺼낼 수 있는 시신이 있다면 깨끗한 천에 감싸 내게 데려오시게.”
그제야 거무룩했던 사내들의 낯빛이 생기를 띠었다.
“…그래도 됩니까?”
그라타의 사람들은 예로부터 사람이 죽으면 대부분 조장이나, 아니면 의식을 통해 화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들은 인간의 육신이 소멸해야 영혼이 자유를 찾는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죽은 이의 육신을 땅에 묻어 썩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크나큰 고통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영혼에게 가능하면 빨리 자유와 평화를 돌려주고 싶은 것이다.
부르테의 ‘꺼낼 수 있는 시신이 있다면’이라는 전제는 그러니까, 당신들이 몇 날 며칠이 걸리더라도, 그리하여 심지어 썩어 들어가기 시작한 사람의 시신을 가져오더라도 그들의 영혼이 하루빨리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돕겠다는 것을 에둘러 말하는 것이었다. 사내들은 그녀의 말을 그렇게 알아들었고 부르테의 다음 말은 그 생각에 확신을 심어 주었다.
“대지는 자비롭다네, 형제여. 나 역시 그 뜻을 따르지 않겠나.”
“감사합니다. 다이옌, 감사합니다!”
사내들은 울먹이며 재차 허리를 숙였다. 그러더니 다이옌의 앞에서 예를 갖추고 절을 한 번 하고는 산막 밖으로 나갔다.
“다이옌.”
마지막 사내가 막 절을 마치고 일어나 조심스레 다가왔다. 마을 어귀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을 업으로 하는 자였다.
“바다에 낯선 배가 정박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