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궁정을 걷는 늙은이의 발걸음은 바빴다. 성성하던 백발은 언제부터 빠졌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다만 아직 턱 아래로 난 몇 가닥의 백색 수염만이 그의 몸에도 털이란 것이 자란다는 증명이 되어 줄 뿐이었다.
“로로.”
바삐 걸음을 재촉하는 그의 옆에 그만 한 또래의 노부인이 합류해 긴 복도를 함께 걸었다. 그녀는 노인을 향해 인사했고, 시원하게 민머리를 드러낸 노인도 그녀를 향해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에이가.”
깡마르고 연약해 보이는 로로와 다르게 에이가는 풍채가 좋았다. 새하얀 피부에는 검버섯도 그다지 올라오지 않아 피부만 보자면 그녀가 로로와 엇비슷한 나이대라는 것을 알기 어려웠다. 에이가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종종걸음 치는 노인과 손쉽게 보폭을 맞췄다.
“폐하께서 어젯밤에 돌아오셨다지요?”
에이가가 물었다. 로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낙이 전 왕을 죽이고 왕좌를 탈환한 지 1년. 그의 출신 성분을 들어 대륙에서는 끊임없이 반란이 일었다. 왕위를 차지하고도 전쟁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밟아도 밟아도 반란은 계속되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왕과 왕족을 세우며 엘버그 왕국의 왕좌를 탈환하려는 시도를 계속하였다. 어떤 이들은 그칠 줄 모르는 이 전란이 진절머리 난다 하였다.
이제는 목적마저 퇴색되어 왜 싸우는지조차 모른 채 창과 칼을 든 병사들은 기계처럼 적을 찌르고 잘라 댔다. 메마른 감정만큼, 그들은 찬란한 승리에도 기뻐할 줄 몰랐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이 전쟁이 끝나는 것뿐이었다.
모두가 종전을 염원할 때 오직 카르낙만이 이 전쟁이 지속되기를 원했다. 카르낙은 달랐다. 그는 전쟁을 즐겼다. 카르낙은 태어날 때부터 전사였다. 그는 메마른 투로의 땅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흙을 파먹을 때조차 전사였다. 그는 단 한 번도 천한 노예 나부랭이인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로로는 언젠가 그가 투로의 땅에서 벗어나 노예로서는 가질 수 없는 무언가를 가질 것이라고 믿었다. 설마 그것이 왕좌일 줄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카르낙은 저에게 저항하는 반란군을 계속해서 토벌했다. 토벌하기 위해 반란이 계속되길 원하는 것 같았다. 그에게 전장은 놀이터나 다름없음을 로로는 안다. 그에게 왕좌란 계속해서 싸움을 부추기기 위한 명분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멀루아 땅은 어떻게 하신답니까?”
에이가의 물음에 로로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에이가는 영민한 눈동자를 굴리며 노인에게 말했다.
“폐하는 혼인하셔야 합니다.”
“…….”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선 그 방법뿐이에요.”
“그분이 동의하실지 모르겠군요.”
그렇게 대답하는 로로의 팔뚝을 왕의 침소에 들어가기 직전 잡아 세웠다. 에이가의 얼굴은 더없이 엄중하고 진지했다.
“지금 우린 바람 앞의 등불이란 사실을 아셔야 해요. 로로, 반드시 혼인을 성사시켜야 합니다.”
“…….”
로로는 에이가가 종마 같은 카르낙의 몸에 고삐를 채우고 싶어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녀가 불안해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카르낙이 현명하고 어진 왕이라면 에이가가 지금처럼 피가 마르기 전에 스스로 알맞은 혼처를 찾아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카르낙은 강하고 무자비한 왕일지언정 어질고 바른 왕은 아니었다. 카르낙은 혼인을 원하지 않는다. 왕이 됨으로써 마땅히 치러야 하는 책임이나 역할은 모두 피했다. 사실 그는 왕위를 차지한 이후로 무엇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여전히 왕답지 못했고 자신의 그런 모습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저 제 말에 동의만 해 주시면 됩니다. 아시겠어요?”
에이가는 똑똑한 여자다. 카르낙이 엘버그 왕국을 차지한 데에는 무엇보다 이 늙고 교활하며 영민한 노부인의 도움이 컸다. 그녀의 제안이나 조언은 모두 기본적으로 카르낙의 안위와 엘버그 왕국의 안정이 밑바탕에 깔린 것들이었다.
그것을 카르낙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다만 따르고 싶어 하지 않을 뿐. 에이가는 멈춰 서서 로로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녀는 문을 열기 전 어떻게든 로로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 참이었고, 로로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침전 앞 경비병들이 로로와 에이가를 발견하고 문가에서 비켜섰다. 시종 하나가 재빠르게 육중한 침실 문을 열어 주었다.
카르낙은 막 잠에서 깨어나 헐벗은 몸으로 주치의의 진료를 받고 있었다. 주치의는 지난 전투에서 다친 어깨에 정성스럽게 고약을 발랐고 시종은 카르낙에게 질 좋은 포도주를 건넸다.
“로로. 에이가.”
포도주를 받아 든 카르낙은 장난스러운 어조로 인사했다. 반쯤 히죽 접힌 푸른 눈이 악동처럼 빛났다.
“못 보던 사이에 숫처녀가 된 것 같은데, 에이가.”
에이가는 짧은 한숨으로 그의 희롱을 무시하고 정중하면서도 고압적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깨는 좀 어떠신가요?”
“글쎄. 당신이 와서 어루만져 준다면 좀 괜찮아질 거 같은데.”
“늙은이 놀리는 건 그만두세요!”
마침내 에이가가 발끈했다. 카르낙은 포도주를 머금고 낄낄거렸다.
“멀루아 땅은 어떻게 되었나요?”
로로는 에이가가 더 잔소리를 이어 가기 전에 대화에 끼어들었다. 카르낙은 빈 잔을 시종에게 건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다부진 체격의 붉은 머리 사내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 어떻게 됐더라, 핀?”
“다 뒈졌죠, 폐하.”
핀은 아침 식사가 차려진 식탁 위에서 사과 하나를 아무렇게나 집어 아작 씹었다. 왕의 침전이 아니라 군병들의 막사에서나 할 법한 예의도, 규범도 없어 보이는 몸짓이었다. 그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느슨하게 벽에 기댔다.
“그다음엔 아무 사람이나 잡고 봉신으로 임명했구요. 이름이 뭐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네요. 바다 건너온 노예였던 거 같은데…. 벙어리였던가요?”
“아, 맞아. 그랬지.”
노예에 벙어리라니! 그 큰 봉토의 영주를! 거기서 나오는 군역과 세금이 얼만데! 시정잡배만도 못한 놈을!
에이가는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그녀의 턱 근육이 꿈틀대는 것이 보였다. 그가 왕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머리채라도 쥐어 잡았으리라. 주치의가 고약을 다 바르자 왕은 이불을 걷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구릿빛 나신이었다. 에이가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어색하게 고개를 살짝 돌렸다. 매번 보아도 영 익숙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어, 언제까지 몰살을 계속할 순 없어요.”
에이가가 더듬대며 조언했다. 카르낙은 가운의 앞섶을 느슨하게 추스르고 식탁에서 빵을 통째로 가져가 입으로 찢으며 의자에 앉았다. 미처 다 갈무리되지 않은 가운 깃이 흘러내리며 사내의 단단한 허벅지 근육과 배꼽 아래 터럭이 고대로 드러났다. 카르낙은 에이가의 조언에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어째서?”
에이가는 눈길을 왕에게로 돌렸다. 최대한 그의 하반신에는 시선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턱을 치켜들었다.
“죽음은 더 큰 반란을 몰고 올 뿐이에요. 카르낙, 당신은 통치자예요. 통치자는 군사가 아니라 대륙의 모든 생명을 다스려야 합니다. 모든 것이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피가 아니라, 민중에게 왕으로서 인정받는 겁니다. 반역자가 아니라 정당한 왕으로서요.”
“…….”
“이제 폐하께서도 혼인을 하셔야죠.”
카르낙은 말없이 빵만 뜯었다. 그다지 에이가의 조언을 납득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그다지 진지하게 듣는 거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고 카르낙은 오른 다리 위에 걸쳐 놓은 왼쪽 다리를 거만하게 흔들어 댔다.
“언제까지고 성을 비워 둘 수도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당신과 로로가 있잖아, 에이가.”
“저나 로로는 왕비를 대신할 수 없어요, 카르낙!”
“그럼 당신이 나랑 결혼하면 되잖아?”
이런 미친! 에이가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다시 그녀의 안면이 꿈틀댔다.
“늙은이 좀 그만 놀리세요! 지금 폐하께 필요한 것은 혼맥이에요! 적합하고 적절한 혼맥이요! 언제까지 칼을 휘두르며 목을 벨 순 없잖아요. 이제 그들이 스스로 당신을 왕으로 인정하게끔 만드셔야죠!”
카르낙은 핀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핀은 그저 어깨만 한번 으쓱해 보였다. 이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좋아, 에이가. 당신 말대로 좋은 혼처를 알아본다고 치자고.”
그는 손가락을 접으며 말을 이었다.
“첫째, 엘버그의 모든 귀족은 뒈졌거나 아니면 나를 등졌어. 그러므로 그들이 자신의 딸을 내게 내어 줄 수 없지. 고귀하신 귀족분들과 혈맹을 맺긴 불가능해. 둘째, 나와 같은 편인 영주들은 당신도 잘 알다시피 노예거나, 천민이거나, 벙어리거나, 고자거나. 무엇이 됐든 나와 결혼할 수 없는 자들이야. 그러니 당신이 말한 혼맥이란 그들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겠지. 셋째, 당신이 말한 가장 적합한 혼처는…. 에이가, 바로 알기어스 왕의 자식들이지. 하지만 알다시피 알기어스의 핏줄을 이어받은 자들은 내가 모두 죽였어. 그의 아내, 딸, 아들, 그 아들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의 사생아까지 모두 다.”
“…….”
그 말은 사실이었다. 카르낙은 왕좌를 차지하자마자 엘버그 왕국 내에 있는 알기어스의 핏줄을 모두 죽였다. 그게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이었다. 모두 목을 치고 팔다리를 잘라 왕국의 곳곳에 효수하여 놓았다.
마치 알기어스 왕이 왕국 곳곳에 자신의 동상을 세웠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에이가가 말한 좋은 혼처란 대부분 카르낙의 적이거나, 아니면 카르낙이 죽인 자들뿐이었다.
“결혼이라니.”
카르낙은 자조적으로 읊었다. 결혼으로 왕위를 안정시킨다고? 도대체 어떻게? 그 아비를 죽이고 딸을 탈취해서? 그것으로 알기어스 왕의 봉신들을 제압할 수 있나? 그 분노를 잠재울 수 있나? 아니. 더 큰 분노를 부를 뿐이다.
“그놈들의 사기를 높여 줄 뿐이야, 에이가.”
“아는 아가씨가 있습니다.”
카르낙은 자세를 고치며 피식 웃었다.
“누구? 당신보다는 어린가?”
“로레인 부인의 사생아예요.”
“…….”
카르낙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분명 동요였다. 에이가는 핀에게 눈짓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핀은 의사와 시종을 데리고 조용히 문밖으로 나갔다.
카르낙은 로레인 하게너를 떠올렸다. 핏기 없이 하얀 피부, 곧 부서질 듯 가녀렸던 체구. 그녀는 자신의 남편과 자식을 죽인 카르낙을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기다렸던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죽음을 기다렸던가. 유약하고 처연하여 새장에 갇힌 새처럼 보였건만. 그런 여자도 부정을 저지를 만한 열정은 가지고 있었던가. 카르낙은 질렸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여자란….”
“알기어스 왕의 딸이에요.”
“…….”
카르낙의 얼굴은 더 기괴하게 굳었다.
“당신이 죽이지 못한 알기어스 왕의 유일한 핏줄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