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뽕 박규태 선생 #8 >
“캬……. 쥑이네.”
절로 감탄이 나오는 패스.
박규태는 발렌시아의 심장이자, 대한민국 미드필더진의 중심인 이강민의 패스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전성기가 오려면 2년이나 더 남았는데…… 벌써 저런 수준의 패스를 뿌릴 수 있다니. 진짜 대단한 선배야.’
이제 24살의 젊은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는 물론이고 중앙 미드필더로서도 최근에 기량이 만개한 그가 라인 브레이킹을 시도하는 손형민의 발에 정확히 떨어지는 쓰루패스를 찔렀다.
“나이스!”
“오늘 강민이 패스가 면도날이야! 면도날!”
“조금만 더 합을 맞춰보자.”
내일 있을 태국전을 앞두고 박규태도 뱅상 엘라즈 감독의 전술에 적응하려 노력했다.
B팀 최전방 원톱으로 움직이는 그의 모습을 보고 국가대표팀 스태프들의 눈이 밝게 빛났다.
“피지컬 하나만 놓고 보면…… 국가대표에 저런 선수는 없습니다. 주력이 조금 느릴 뿐이지, 저 신장에서 저런 주력이 나오는 것 자체가 아시아인으로는 대단한 거죠.”
“기본기도 부족하다는 말이 많지만, 중간은 합니다. 적어도 황지찬 선수와 비교하면 나쁘지 않은 기본기라고 볼 수 있네요.”
“위치선정이나 시야가 꽤 쓸만합니다. 투박하지만, 경기 전체를 볼 수 있는 눈을 갖췄어요. 저런 선수는 기술이 어느 정도 물에 오르면 무조건 롱런합니다.”
생각보다 평가가 좋았다.
아니, 좋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장점은 결정력이죠.”
“어떻게든 골을 넣으려는 집념과 어떤 자세에서든 골대를 향해서 제대로 슈팅을 날릴 수 있는 선수입니다.”
“골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공격수는 정말 오랜만이네요.”
골 결정력이라는 부분이 부족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상황에서 박규태의 장점은 엄청난 플러스 요소였다.
뱅상 엘라즈 감독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상으로 보는 것과 직접 보는 것은 다르다.
“나이스 골!”
“이야! 진짜 시원하게 골을 넣네.”
어린 선수가 대표팀에 잘 적응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는지, 선수들의 표정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그를 시기하는 선수들도 있었을 것이다.
‘예전에도 있었지. 지금도 있고.’
박규태는 자신을 노려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정명순.
울산 현대 소속의 신예 공격수.
이번 시즌에 K리그에서 27경기 12골 6도움을 기록하면서 뱅상 엘라즈 감독의 눈에 들었다.
‘나를 질투할 수밖에 없지.’
정명순과 박규태.
두 선수의 스타일이 너무나 비슷했다.
아니, 똑같았다.
188㎝의 키.
84kg의 몸무게.
피지컬도 비슷했다.
조금 다른 부분이라면 정명순이 주력이 더 빠르고, 박규태가 점프력이 더 좋다는 것 정도였다.
물론, 그 정도는 사소한 차이였다.
‘기술이 투박한 것도 닮았지.’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꽤 견제가 심했다.
박규태는 정명순이 가지지 못한 뛰어난 골 결정력과 준수한 공중볼 장악능력을 갖춘 공격수였으니까.
덕분에 정명순의 플레이는 조급했다.
어떻게든 결과를 만들려는 움직임이었다.
“명순이가 오늘은 썩 좋지 않군요.”
“내일 선발인데…… 괜찮을지 모르겠네.”
“잘 할 겁니다. 그래도 기본적인 실력이 있는 녀석이니까요. 내일 상대가 그렇게 강한 팀도 아니고.”
스태프들은 정명순의 슬럼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뱅상 엘라즈 감독은 다르게 생각했다.
‘팍과 비교해서 정신적인 부분에서 부족한 점이 많군.’
뱅상 엘라즈 감독은 이번 태국전에서 정명순을 먼저 시험할 생각을 하며 수첩에 선수의 장단점을 기록했다.
* * *
-정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2026 북중미월드컵 아시아 지역 3차 예선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뱅상 엘라즈 감독이 이끄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태극전사들이 3차 예선에서 8전 전승을 이룩하면서 이미 월드컵 본선 진출은 확정 지었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부족한 부분이 많이 드러났죠?
-네, 특히 탄탄한 미드필더 자원과 다르게 틈이 많이 보였던 수비진과 스트라이커 자원을 찾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표팀 명단에 다양한 젊은 선수들이 포함되면서 큰 기대감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경기의 선발진입니다.
-골키퍼 조한우. 수비수 이인우, 김명재, 권정원, 김한솔. 미드필더 이영태, 유진수, 이동원, 이강민, 손형민. 공격수는 정명순 선수입니다.
-뱅상 엘라즈 감독이 좋아하는 4-2-3-1 포메이션으로 오늘 경기를 시작합니다.
1.5군이라고 볼 수 있는 인원이 나왔다.
이강민과 손형민은 전후반 합쳐서 60-70분을 뛰고 교체될 것이 확실했기에 박규태는 오늘 경기에서 교체로 출전하더라도 긴 시간을 부여받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아예 데뷔전을 치르지 못할 수 있겠네.’
그의 생각처럼 뱅상 엘라즈 감독은 박규태에게 그저 국가대표팀의 분위기가 어떤지만 경험하게 하려고 부른 것이었다.
교체하더라도 짧은 시간만을 허락할 것이다.
‘어쩔 수 없지. 그 정도는 예상했으니까.’
양국의 국가가 차례로 나왔고, 곧 선수들이 악수를 나누고 자신들의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당연히 대한민국이 태국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전력의 차이가 그만큼 심했다.
거기다 대한민국은 미드필더진의 핵심인 이강민과 손형민이 투입되었다.
두 선수는 수비진의 뒤를 노리는 패스와 크로스로 태국의 선수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손형민 돌파!
-빠릅니다! 서른넷, 만으로 서른셋의 나이가 어울리지 않는 빠른 주력입니다!
-태국의 수비진이 쉽게 막지 못합니다.
-그대로 크로스!
-정명순 선수의 헤더!
-아! 골키퍼의 선방으로 막혔습니다!
하지만 쉽게 골이 나오지 않았다.
태국이 아예 내려앉은 것도 있었다.
더 큰 문제는 공격수인 정명순이 오늘따라 침착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뒤로 돌려!”
이강민의 외침에도 정명순은 자신에게 온 기회를 마무리하기 위해서 무리하게 슈팅을 가져갔다.
-아! 이번에도 막히고 말았습니다.
-정명순 선수! 차분하게 공격을 풀어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 혼자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이번 부분은 소속팀에서 뛸 때도 보였던 모습입니다. 이런 부분은 고쳐야 세계적인 공격수가 될 수 있습니다.
“젠장……!”
조급함이 드러나는 정명순.
그가 이번에도 공을 길게 끌기 시작했다.
덕분에 태국의 선수들은 계속해서 팀의 수비진을 조율하며 촘촘하게 대한민국의 공격진을 막아낼 수 있었다.
“집중해!”
“명순아!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
팀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선수.
손형민과 이강민이 정명순을 다독이면서 경기를 풀어나가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풀리지 않았다.
거기다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아……. 유진수 선수가 발목을 부여잡습니다.
-심각한데요. 일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중앙 미드필더인 유진수가 태국 선수와 공중볼 경합을 하다가 착지를 잘못해서 발목을 다쳤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좋지 않습니다.
-태국에게 선취점을 허용했습니다. 태국의 첫 역습에 실점을 허용하는 대한민국입니다.
지지부진한 경기.
이강민이 홀로 날뛰어서 전반 41분에 동점골을 만들었다.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온 경기.
하지만 전반전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금방 전반전이 끝났다.
라커룸으로 들어가는 뱅상 엘라즈 감독은 물론이고, 스태프들의 표정도 그리 밝지 않았다.
* * *
-역시 황지찬 선수입니다! 멋진 쐐기골이었습니다!
-전반전에 답답했던 경기가 황지찬 선수의 투입으로 뻥 뚫리네요. 정말 대단한 선수입니다.
-이강민 선수의 동점골, 손형민 선수의 역전골, 황지찬 선수의 쐐기골까지……! 후반전의 경기력은 정말로 완벽합니다.
벤치에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박규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국가대표 첫 데뷔전을 치르게 하겠어. 아무래도 내 성인 국가대표 데뷔전은 미뤄진 것 같네.’
부상으로 선수가 빠졌다.
1.5군으로 당연히 잡아야 할 태국을, 쉬게 하려던 선수들을 풀로 뛰게 만들어서 잡아냈다.
이기기는 했지만, 잃은 것이 너무 많았다.
숙소로 돌아가는 선수단.
호텔에 도착한 박규태는 방에서 조용히 씻고 자기 전에 잠깐 필요한 것을 사기 위해서 방을 나왔다.
그리고 호텔 로비에 모여서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스태프들을 볼 수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은데?’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박규태는 기사를 통해서 그 좋지 않은 느낌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황지찬, 욕실에서 넘어져서 엉덩이 부상.]
[좋지 않은 타이밍에 생긴 주전 공격수의 부상.]
[유진수와 황지찬의 공백을 채울 수 있을까?]
[뱅상 엘라즈 감독, “그나마 유진수와 황지찬 모두 큰 부상이 아니라서 다행.”]
[걱정스러운 일본전, 황지찬이 없는 공격진은 어린 나이의 ‘정명순’과 ‘박규태’ 둘뿐.]
-정명순 답이 없던데;;;
-진짜 태국 상대로 전반전에 슈팅이 13개나 나왔는데…… 1골이었음. 그것도 이강민이 만들었지.
-아, 진짜 공격수 자원이 이렇게 없나?
-황지찬 없으면 톱에 놓을 선수가 없지.
-손형민 올리자. 손톱으로 재미 많이 봤잖아.
-손톱도 한계가 있지. 그리고 전성기와 다르게 피지컬이 예전 같지 않은 손형민이 원톱으로 버티기는 힘들지.
-차라리 박규태를 넣어보지.
-그러니까. 프랑스 2부리그에서 8경기 10골 넣었는데……. 솔직히 정명순보다는 훨씬 잘할 것 같은데?
-이제 첫 데뷔전을 치르는 선수를 일본전에 선발로 넣겠냐? 그냥 손톱으로 써야겠지.
태국전의 답답했던 전반전과 주력 선수들의 부상으로 축구팬들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히나 그나마 팀의 주포로 나쁘지 않은 활약을 펼치던 황지찬의 공백이 가장 큰 걱정이었다.
거기다 태국전에서 정명순이 최악의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뱅상 엘라즈 감독의 고민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국가대표팀.
곧 일본전에 출전할 스쿼드가 결정되었다.
‘선발일까? 아니면 그냥 백업?’
정명순이 최악의 경기력을 보여주었더라도, 박규태가 선발로 경기에 나올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이미 월드컵 본선을 확정 지은 상황이지만, 여러 가지 상황이 얽힌 일본전은 유망주에게 큰 부담이 된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결코 나를 선발로 내세울 이유는 없다.’
문제는 지금이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팀의 주전 공격수는 부상으로 뛸 수 없고, 두 번째 옵션으로 데려온 공격수는 태국전에서 너무나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줬다.
거기다 평소 젊은 선수들을 자주 기용하는 뱅상 엘라즈 감독의 특성이라면 조금의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들어맞았다.
“박규태! 이틀 뒤에 있는 일본전에서 선발이다.”
일본전이 불과 이틀 남은 상황에서 그가 벤치가 아닌 선발로 경기에 출전하게 되었다.
< 국뽕 박규태 선생 #8 > 끝
ⓒ 엉심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