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250화 (250/255)

# 250

8장, 전생을 뛰어넘다 (1)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그것도 수 천, 수 만 명의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폭탄과 총알 세례를 받으면서 죽어간다.

군인들만 죽는 게 아니다.

전시(戰時)에는 오히려 군인들이 가장 안전하다.

민간인들은 적군의 게릴라 공습에 무방비로 노출 된다.

중동의 내전에는 금기가 없다.

정부군이나 반군 모두 민간인 거주 지역이나 학교, 고아원에도 거리낌 없이 폭탄을 투하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어린 아이들도 피투성이가 되어 발견되곤 한다.

종군 기자들은 전쟁의 참상을 사진으로 찍어 세계에 알리지만, 그저 그뿐이다.

세계 시민들이 분노하거나 안타까워하는 것으로는 중동의 내전을 중지시킬 수 없다.

외부 세계의 지도자들도 영향력에 한계가 있다.

미국의 이라크 개입이 지리멸렬한 과정 끝에 실패로 돌아간 이후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실정이다.

방법은 오직 하나, 중동의 지도자가 나서는 수밖에 없다.

직접적 이해당사자가 어려운 결단을 내려야만 피의 복수를 끝낼 수 있다.

한지호는 반다르 왕자에게 무엇을 부탁할지 수없이 고민해왔다.

한국에서 양성문 소장을 통해 제안을 받았을 때부터 시작된 고민이었다.

그가 위험천만한 사우디아라비아 행을 결정한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엄청난 액수의 보상을 받게 됐지만, 그 돈이 없어도 한지호는 이미 거부(巨富)의 반열에 들어섰다.

돈보다 시간이 중요한 그에게 있어 사우디아라비아 치료 원정은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중동에서 피 흘리는 사람들을 구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말에 결심을 굳혔던 것이다.

현재 중동에서 내전이 극심한 대표적인 지역이 바로 예멘과 시리아다.

시리아 내전의 참상은 비교적 많이 알려져 국제사회의 공조를 이끌어내고 있다.

그에 반해 예멘 내전은 참혹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시리아보다 관심을 덜 받는 실정이다.

더구나 예멘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전장이다.

반다르 왕자가 사우디 국정의 책임자로 다시 등극해서 예멘 내전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순식간에 정세가 뒤바뀐다.

당장은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후티 반군이 득세를 하겠지만, 우선 한 쪽이 복수의 칼을 놓아야 대화의 물꼬가 트이는 법이다.

그러나 예멘 내전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무엇이든 들어줄 것처럼 입을 열었던 반다르 왕자도 한지호의 요청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한지호에게 잠시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밤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한지호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재촉하지 않고 반다르 왕자를 기다렸다.

억지를 부리거나 보챈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예멘이 문제가 아니라 시아파와 수니파의 전쟁은… 그 골이 너무 깊어.’

한지호는 조용한 방에 혼자 앉아서 자신이 알게 된 사실들을 떠올렸다.

예멘은 원래 북예멘과 남예멘으로 나눠있던 분단 국가였다.

당연히 남북의 사이가 안 좋았는데 1990년에 통일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통일 이후에도 남북의 감정은 계속 악화 됐고, 결국 남예멘 수니파와 북예멘 시아파의 갈등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2010년 아랍의 봄을 통해 독재정권이 무너지며 치안 공백이 생기면서 남과 북의 대립이 폭력으로 치닫게 되었다.

사실 시아파 후티 반군과 수니파 정부군의 전쟁은 어느 정도 선에서 정리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문제는 그들의 배후에 있는 세력이다.

반군 뒤에는 시아파의 맹주 이란이, 정부군 뒤에는 수니파의 맹주 사우디아라비아가 버티고 서있다.

이란과 사우디는 은밀하게, 때로는 대놓고 무기와 병력을 지원하며 예멘 내전을 심각하게 만드는 주범이다.

시리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예멘에서도 시아파와 수니파의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 셈이었다.

어떻게 보면 두 나라의 대리전에 중동이 휩쓸려 신음하는 꼴이다.

한지호의 이런 피의 고리를 한 번이라도 끊기 위해 소원을 말했다.

사우디 왕당파가 예멘에 대한 개입을 중지하면, 완전히는 아니라도 공식적으로 개입 철회를 선언하면 그 파장은 중동 전체로 퍼져나갈 것이다.

수니파의 맹주 사우디가 몸을 사리면 시아파의 이란도 국제사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당장 예멘에서 정부군이 주도권을 뺏겨도 무분별한 폭격과 민간인 지구 습격 등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그로인해 수 천, 수 만의 목숨이 죽음 대신 생명을 얻게 될 것은 너무도 자명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어.’

과연 반다르 왕자는 어떤 선택을 내릴까.

한지호는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반다르 왕자의 중병을 치료해줬다고 해서 마냥 낙관하긴 힘들었다.

오랜만에 사우디 왕궁으로 복귀하는 반다르 왕자가 어마어마한 정치적 부담을 지려 할지 의문스러웠다.

평소 그가 중동의 평화를 지지하는 온건파라는 것과 별개 문제다.

아무리 온건파라고 해도 한지호의 부탁 때문에 선뜻 정치적 생명을 걸려고 할까.

똑똑!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반다르 왕자가 생각을 정리한 모양이다.

한지호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니나 다를까, 방문이 열리며 반다르 왕자와 아지르가 함께 들어왔다.

“많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그만큼 내게도 어려운 문제였어.”

“아닙니다. 무례한 청을 숙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지호는 괜한 겸손을 떠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부탁이 내정간섭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반다르 왕자가 크게 화를 내지 않은 것만 해도 한지호는 충분히 존중받은 셈이다.

‘감이 안 잡히는군.’

한지호는 방 안으로 들어온 반다르 왕자와 아지르의 얼굴을 보며 묘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표정을 봐도 어떤 선택을 했는지 짐작이 안 됐기 때문이다.

“아지르와 이렇게 격한 토론을 한 것도 얼마만인지 모르겠더군. 두통이 낫지 않았으면 꿈도 못 꿀 일이겠지.”

반다르 왕자는 아지르와 의견이 갈렸던 것 같다.

누가 어떤 의견이었는지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지르는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당장 한지호의 부탁을 들어주긴 어렵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반면 반다르 왕자는 자신의 신념과도 맞아 떨어지는 한지호의 소원을 들어주려는 입장 같았다.

“미안한 일이네만…….”

반다르 왕자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먼저 나왔다.

한지호는 저도 모르게 아쉬운 내색을 보이고 말았다.

크게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의술로 중동의 전쟁에 영향을 끼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장담은 할 수 없네. 왕궁에 들어가서도 내 세력을 복원하며 온힘을 쏟아야겠지. 그러나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왕궁에 복귀한 나의 첫 번째 정책으로 예멘 내전 불개입 선언을 밀어붙이겠네. 어떤가? 내가 닥터 한을 믿듯이 한 번 나를 믿어주겠나?”

역시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반다르 왕자는 감언이설로 한지호를 속이려 들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처지를 솔직하게 밝히며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것이 반다르 왕자가 고민 끝에 내놓은 선택이었다.

한지호는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님의 약속, 믿어보겠습니다.”

“닥터 한은 내 생명을 구한 동시에 엄청난 부담을 안겨주는군.”

“세상을 바꾸는 부담입니다. 저도 많이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내가 엄살을 피웠나? 하하하.”

반다르 왕자가 기분 좋게 웃었다.

그가 이렇게 웃는 것은 참 드문 일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한지호는 각서를 받은 것도, 확답을 받은 것도 아니다.

반다르 왕자가 최선을 다했지만 어려웠다고 돌아서면 끝이다.

물론 그는 이후에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온건파로서 사우디 국정을 이끌 것이다.

다른 강경파 왕자들이 사우디아라비아를 통치하는 것보다는 나을 게 자명하다.

그러나 당장 예멘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는 별 도움이 못 된다.

하지만 한지호는 반다르 왕자가 공수표를 날린 게 아니라고 믿었다.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둘러대는 말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는 것인지.

한지호는 사람의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는 최고의 한의사다.

그렇기에 눈동자의 흔들림과 호흡의 강도, 목소리의 떨림으로 진심을 파악하는 게 가능했다.

지금 이 순간 반다르 왕자는 마음을 담아 이야기 하는 중이었다.

만약 이게 거짓이라면 그는 연기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것이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며 한국으로 마음 편히 돌아가겠습니다.”

“마음 같아선 왕궁의 주치의로 삼고 싶지만… 가끔이라도 리야드에 들려주게. 아니, 내가 종종 홍콩이나 서울로 가야겠군.”

“언제든 한의원 최고의 VIP로 모시겠습니다.”

“악수나 한 번 하지.”

반다르 왕자가 손을 내밀었다.

한지호는 말없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앞으로 반다르 왕자는 사우디 왕궁에서 힘든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고, 온건파의 대표 기수로서 수많은 강경파들과 사사건건 충돌 할 것이다.

한지호가 침 하나를 들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것처럼 반다르 왕자 역시 스스로 열어야 할 세상이 있다.

전혀 다른 삶을 살지만 두 사람은 통하는 부분이 많았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에서의 마지막 시간, 한지호는 돈으로 살 수 없는 평화를 약속 받았다.

지난 5일의 고된 여정이 조금도 후회되지 않았다.

+++

모든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도시 서울.

겨우 5일이 지났을 뿐이지만 서울로 무사히 돌아온 한지호는 마치 5년을 보낸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늘어져서 쉬지 않았다.

서울과 홍콩의 원화 한의원은 늘 그렇듯 진료 스케줄이 밀려 있었고, 원화 아카데미에서 주도하는 신약 개발도 점검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전체 업무도 총괄해야 한다.

몸이 두 개가 아닌 세 개라도 부족한 일정이 한지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한지호는 잊지 않고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대사님,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했지만 상대편의 음성은 침울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화기 너머의 주인공이 주중 일본대사 요시모 유타이기 때문이다.

요시모 유타는 한지호 덕분에 지독한 성병에서 해방 됐다.

그러나 다시는 잠자리를 가질 수 없게 됐고, 한지호에게 단단히 약점을 잡혔다.

어쩔 수 없이 한지호의 전화를 받으면서도 차마 반가운 척은 못 하는 게 당연했다.

“죄송하지만 이번에 어려운 부탁을 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대사님께서 일본 정부가 성명을 발표하도록 힘을 써주시겠습니까?”

정중한 부탁이지만 속사정을 알면 다르게 들릴 것이다.

요시모 유타는 한지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다.

한지호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의 정치적, 사회적, 개인적 위신을 모조리 끝장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지호는 단 한 번도 사사로운 일로 요시모 유타를 협박한 적이 없었다.

성병을 치료해준 이후 개인적으로 전화를 건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일본 정치권의 실세인 요시모 유타를 통해 예멘에서의 휴전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 할 계획이었다.

중동에서의 일은 반다르 왕자에게 맡겨뒀다.

대신 한국과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 3국을 움직이는 것은 한지호가 직접 할 수 있다.

그에게 의술의 빚을 진 사람들이 3개국의 최고 수뇌부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이미 국제적 유명인이지만, 그가 실제로 어떤 힘을 가졌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화 한 통, 부탁 한 번으로 어마어마한 일들을 이뤄낼 수 있다.

의술을 통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갖게 된 한지호는 부정할 수 없는 권력자다.

그 옛날, 전생의 규호가 울부짖었던 대로 천하를 좌우하는 위치에 오른 것이다.

요시모 유타와 통화를 마친 한지호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당장은 드러나지 않아도 언젠가는 한지호가 막후에서 중동과 세계 평화를 위해 땀을 흘렸다는 사실이 알려질 터였다.

그때 세계는 일제히 한국의 젊은 한의사를 찬양하게 될 것이다.

사우디에서 돌아온 한지호는 더더욱 거침없이 운명을 주도적으로 리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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