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9
7장, 3만 명의 목숨값 (2)
“무슨 일입니까?”
방 안의 불이 켜졌다.
미리 일이나 옷을 입고 있던 한지호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물었다.
그 모습에 오히려 아지르가 놀라고 말았다.
“일어나 있었습니까?”
“방금 일어났습니다. 바깥이 소란스럽더군요.”
“죄송합니다. 급히 닥터 한을 모셔야 될 것 같습니다.”
“왕자님께서 깨어나셨죠?”
“그, 그걸 어떻게?”
“뻔한 일입니다. 상세가 안 좋으십니까?”
“의식을 회복하셨는데 심한 어지러움을 호소하고 계십니다. 마치 두통으로 인한 발작이 왔을 때처럼.”
아지르가 마지막 문장을 힘주어 말했다.
실컷 치료를 했는데 왜 똑같은 증상이 발생하냐는 것이다.
힐난의 뜻이 담긴 말이었다.
한지호는 물끄러미 아지르를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왕자님께 가보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모시려고 왔습니다.”
아지르는 다소 침착함을 회복한 모습이었다.
눈을 뜬 반다르 왕자가 어지러움을 호소하자 순간 이성을 잃었고, 급히 한지호를 데려오려고 결례를 저질렀다.
하지만 한지호의 태도에 변화가 없었기에 정신을 차린 것이다.
의사가 당황하지 않으면 환자와 보호자도 금방 평정을 되찾는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는 언제 어떤 순간에도 절대 당황한 모습을 노출하면 안 된다.
속으로는 백 번 넘게 기절할 것 같더라도 겉으로는 항상 완벽한 모습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한지호는 속으로도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아직 눈으로 상세를 보지 못했지만 자신의 치료가 크게 잘못되지 않았다는 자신감을 품었기 때문이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아지르가 먼저 걸어갔다.
걸음걸이에서도 급한 마음이 느껴졌다.
평소보다 족히 두 배는 더 빨리 걷는 것 같았다.
한지호는 자신의 방 앞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들에 대해서는 굳이 묻지 않았다.
물어봐야 요인 경호를 위해 만전을 기했다는 대답만 돌아올 것이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신병 확보를 해두려는 속셈이 뻔하지만. 사소한 불쾌함은 접어뒀다.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중요하다.
지금은 반다르 왕자의 상태를 살피고 대책을 마련하는 게 최우선이다.
얼마쯤 걸어가자 반다르 왕자의 방이 보였다.
아지르는 한지호의 침실에 들어왔을 때처럼 문을 벌컥 열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여섯 명의 최측근 경호원도 아지르와 한지호를 제지하지 않았다.
늘상 무표정하던 그들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닥터… 한…….”
한지호가 들어온 것을 알아차린 반다르 왕자가 입을 열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그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져 있었다.
한지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반다르 왕자에게 다가갔다.
침대 옆 의자에 앉으며 곧장 반다르 왕자의 손목을 조심스레 쥐었다.
“진맥부터 해보겠습니다.”
맥을 짚는 것이야말로 한의학의 근본이자 모든 것이다.
한지호는 예상과 다른 반다르 왕자의 모습에 겁을 먹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평창동 황만금 회장의 태자병을 고칠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치료가 잘못 되어 황 회장이 죽는 줄 알았지만, 알고보니 질병의 회광반조 현상이었다.
그렇듯 환자의 상세만 가지고 병을 판단할 수는 없다.
가장 정확한 것은 맥이다.
한지호는 두 눈을 감고 반다르 왕자의 맥이 뛰는 소리에 온정신을 기울였다.
‘이것은-!’
곧이어 눈을 뜬 한지호가 반다르 왕자의 얼굴을 바라봤다.
탁기를 빼낸데 이어 머리의 기운까지 분출해서 일시적으로 더욱 핼쑥해진 얼굴이 보였다.
“왕자님,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허하지 않으십니까. 두 발로 일어서기 힘들 만큼 기력도 없으시죠.”
“정확하네…….”
“평상시 두통이 심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겠지만, 분명히 다른 점이 있을 겁니다.”
“다른 점?”
“어지럽긴 해도 생각, 즉 사리분별과 의사 판단은 명확하게 하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한지호의 말에 반다르 왕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곰곰이 돌이켜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두통이 심할 때는 온몸에 열이 뻗치고, 어떤 생각도 온전히 해낼 수가 없었다.
당연히 판단 능력도 저하되어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무에서 손을 뗀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외교 일정을 수행하지 못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수도 리야드에서도 얼마든지 국무를 소화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두통과 발작으로 정상적 판단이 불가능했기에 2왕자와 3왕자에게 실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한지호의 말을 듣고 반다르 왕자는 자신의 상태를 냉정하게 분석했다.
어지러움으로 헛구역질이 치밀어 오르고, 온몸에 힘이 쭉 빠져 손가락 하나 들기도 지친다.
그렇지만 사고 회로는 멀쩡히 돌아가고 있었다.
닥터 한을 데리고 오라는 지시도 직접 내렸고, 이렇게 힘든 와중에서도 맑은 정신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무엇보다 두통이 치밀어 오를 때마다 그를 힘들게 했던 발열이 사라졌다.
화상을 입은 것처럼 머리와 몸이 뜨겁게 달아올라서 괴로웠었다.
척-
반다르 왕자가 자기 손을 이마에 붙였다.
다시금 확인해도 열이 나지는 않는다.
이윽고 그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공포나 두려움에서 기인한 놀라움이 아니라 새로운 발견을 했을 때 피어나는 긍정적 의미의 놀람이었다.
“닥터 한?”
“왕자님의 두통, 정확히 말하면 머리에 화기가 찼던 것은 확실히 치료됐습니다. 지금 느끼는 고통은 며칠 사이 몸과 머리의 기운이 한꺼번에 빠져나간 부작용입니다. 기력을 보하는 탕약을 먹고, 천천히 회복 치료를 한다면 말끔히 나을 증상입니다.”
“그게, 그것이 정말인가? 지난 3년을 괴롭혔던 두통이 재발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머리는 우리 몸에서 가장 민감한 곳입니다. 과로나 생활 습관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쌓이면 두통은 언제든 다시 찾아올 겁니다. 그러나! 화기로 인한 발열성 두통과 발작은 사라졌습니다. 제 이름을 걸고 보증하겠습니다.”
한지호는 없는 말을 지어내지 않는다.
진맥을 한 결과 반다르 왕자를 괴롭히던 불의 기운은 흔적도 없이 날아갔다.
백회혈을 열어 기운을 내보내는 치료가 성공했다는 뜻이다.
그 부작용으로 기력이 떨어지고 어지럼증이 찾아왔지만 일시적인 것뿐이다.
“정신을 차리셨으니 준비해둔 탕약을 지어 올리겠습니다. 향후 일주일의 식단도 제가 정해둔 대로 지키셔야 합니다.”
“정말, 정말이란 말이지? 내 두통이 치료가 됐다는 것, 의심할 필요가 없겠나?”
“저를 믿으셔도 됩니다, 왕자님.”
“닥터 한!”
반다르 왕자가 한지호를 부둥켜 안았다.
기운이 없었지만 두 팔을 뻗어 한지호를 포옹할 힘을 짜낸 것이다.
그의 감격은 다른 사람이 이해하기 힘들다.
반다르 왕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최고 권력자에서 뒷방으로 밀려나 배 다른 동생들이 전횡을 일삼는 걸 지켜봐야만 했었다.
그런데 이제 발목을 붙잡았던 두통이 치료됐다고 한다.
다시 날개를 펼치고 자신이 꿈꾸던 나라를 만들 수 있게 됐다.
물론 2왕자와 3왕자 세력의 반발이 거세겠지만 명분은 반다르 왕자에게 있다.
다른 세력의 휘하로 들어갔던 왕궁의 가신들도 반다르 왕자가 건재한 것을 알게 되면 마음을 돌릴 확률이 높다.
왕위 계승자로서 국정을 이끌던 시절, 반다르 왕자가 보여줬던 능력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왕자님!”
뒤에서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지르도 격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가 얼싸안고 있는 한지호와 반다르 왕자에게 다가왔다.
반다르 왕자는 두 팔을 풀고 아지르를 쳐다봤다.
“이제 다 되었다, 아지르. 다 되었어.”
“경하드립니다, 왕자님.”
“아지르, 자네가 닥터 한을 모셔온 덕분이네. 이 공은 잊지 않을 터이니 걱정말게.”
한지호를 초청하는데 있어 아지르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던 모양이다.
그를 치하한 반다르 왕자는 다시 한지호를 쳐다봤다.
“닥터 한, 자네 말대로 어지러움은 남아있으나 머리가 맑군. 기력만 회복된다면 충분히 국무를 볼 수 있을 것 같네.”
“탕약과 식단을 지킨다면 금방 건강해지실 겁니다. 오늘은 탕약을 먼저 올릴 테니 푹 쉬시는 게 중요합니다.”
“알겠네, 모두 닥터 한의 말대로만 따라야지.”
한밤의 소동이 끝났다.
진맥을 통해 치료가 성공했음을 확인한 한지호는 환호성을 지르거나 포효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벅찬 기쁨을 가슴 깊이 갈무리하는 법을 알 만큼 성숙했다.
목숨을 걸 각오로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왔지만, 자신의 목숨뿐 아니라 반다르 왕자의 목숨도 살렸다.
더불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을 열게 됐다.
삼국시대 규호의 별호가 의성(醫聖)이었다면, 현재를 살아가는 한지호는 세계를 움직이는 침이라는 별명을 얻을 것 같았다.
과장이 아니다.
그의 침 하나로 국제 정세가 들썩이고 있었다.
반다르 왕자의 사우디 정계 귀환은 중동과 세계를 뒤흔드는 뉴스다.
어마어마한 뉴스의 배후에 한지호가 있다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들만 아는 정보가 되어 세계의 엘리트들을 놀라게 할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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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약속 된 마지막 날이다.
어제 반다르 왕자의 머리를 열어 화기를 빼냈고, 한반 중 급히 달려가 치료가 성공했음을 확인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오늘은 기력을 보하는 치료를 하고 밤 비행기에 올라타야 한다.
다행히 반다르 왕자는 빠르게 기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지난 밤 한지호가 지어 올린 탕약을 먹었고, 식단도 그의 지시를 받아 철저히 따르기로 했다.
한지호가 정해준 식단의 재료 중에는 사우디에서 구하기 어려운 것들도 꽤 섞여 있었다.
한식에서 주로 쓰이는 채소나 오리 고기 등은 사우디의 주식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아지르는 이를 악 물고 리야드를 샅샅이 뒤져 필요한 재료를 구해냈다.
당연한 말이지만 리야드에도 한국인들이 살고 있다.
한국인들이 사는 곳에는 작은 규모나마 한식당과 한국 마트가 있기 마련이다.
필요한 재료의 물량을 확보하는 게 까다롭지만 1왕자의 수족인 아지르에게 마냥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내 무엇을 주면 되겠나?”
반나절 사이 안색이 훨씬 좋아진 반다르 왕자가 입을 열었다.
그는 한지호가 오늘 밤 비행기에 타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허락이라는 말이 우습지만, 한지호의 원래 일정을 존중해준 것이다.
아울러 2왕자 사둘라가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직속 경호부대를 공항까지 붙여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혜택은 그뿐이 아니었다.
한지호는 처음부터 거액의 치료비를 제시받았다.
돈에 연연하지 않는 위치가 됐지만, 아지르가 양성문 소장을 통해 제시한 금액은 상상을 초월했다.
100만 달러라는 종전의 기록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다르 왕자는 무엇을 더 원하는지 물어본 것이다.
한지호가 돈을 말하면 돈을, 권력을 말하면 권력을, 원하는 것은 뭐든 들어줄 기세였다.
사우디아라비아 정계에 복귀하여 왕위계승 1순위의 위엄을 찾을 수 있게끔 병을 치료해준 대가는 무엇으로도 갈음하기 힘들다.
한지호도 사양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는 치료 제안을 받았을 때부터 마음속으로 생각해둔 소원이 있었다.
“왕자님, 정말 어려운 부탁이 있습니다. 제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는 왕궁에 돌아가시자마자 정치적 부담을 지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닥터 한, 내가 자네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만큼 나를 믿어보게. 두통이 사라지고 정상적으로 국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게 증명 된다면… 사둘라를 비롯한 동생들은 왕궁에서 감히 내 앞에 서지도 못할 걸세. 지난 시간 동안 나를 따르던 가신들이 일거에 돌아올 것이고, 국왕께서도 다시금 전권을 내게 맡기실 터이니. 설령 정치적 부담을 져야한들 닥터 한을 위해 감수하지 못할 게 무엇이겠나.”
“그렇다면 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들어보지.”
반다르 왕자는 물론이고 그의 지근거리에서 보좌를 하는 아지르도 눈을 빛냈다.
어떤 부탁이기에 사둘라 왕자 앞에서도 두둑한 배짱을 자랑했던 한지호가 미리 몸을 사린 것일까.
이어진 한지호의 말은 두 사람을 놀라게 할 만 했다.
“예멘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전에 사우디 왕당파가 병력을 지원할 예정이라 들었습니다. 막아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