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233화 (233/255)

# 233

11장, 드라이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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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하나 찍읍시다. 영화도 좋고.”

원화 아카데미 5층의 기획 전략실에서 한지호가 내뱉은 말이었다.

기록실에서 만든 1차 백서가 완성됐고, 신약 개발도 2차 부작용 제어에 성공했다.

이제부터는 원화 아카데미의 활동 내역을 홍보하면서 여론의 관심을 집중시켜야 한다.

특히 신약 개발은 많이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좋다.

2000억 원의 초기 투자금은 어마어마한 거액이지만 결코 넘치지는 않는다.

세상에는 잉여 자금은 충분한데 투자할 곳을 못 찾은 사람과 기업들이 많다.

그들의 돈을 끌어오기 위해서도 효율적인 홍보는 필수적이다.

한지호와 신영준, 최규열은 원화 아카데미의 주식 시장 상장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안정적인 연구와 개발을 위해서는 수천억 원 규모를 뛰어넘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원활하게 자금을 수급하기 위해서는 상장만한 방법이 없다.

기획 전략실장은 나름대로 열심히 머리를 굴려 홍보 방안을 마련해왔다.

기록실에서 정리한 한의학 1차 백서가 왜 중요한지, 신약 개발이 성공하면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친절하게 알리는 캠페인 기획안이었다.

물론 흠 잡을데 없는 기획서였다.

하지만 한지호의 마음을 움직이진 못했다.

“캠페인은 캠페인대로 진행하고, 드라마와 영화 제작까지 병행하면 좋겠습니다.”

“대표 원장님,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습니다.”

전략실장이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홍보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뜬금없이 드라마나 영화를 찍자고 했으니 말이다.

신영준과 최규열은 신약 개발 진행을 제외한 대부분의 일을 한지호에게 맡겼다.

그렇기에 한지호의 결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지호는 당황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기획 전략실장을 바라보며 자신의 아이디어를 설명했다.

“좀 오래된 이야기지만, 허준이라는 드라마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거 기억하십니까?”

“네, 당시 국민 드라마라고 불렸었지요.”

“허준의 방영 이후 전국 한의원과 약재상의 매출이 기록적으로 상승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안방의 TV 드라마가 국민 여론에 끼치는 파급력이 크다는 뜻이죠.”

전략실장은 느껴지는 부분이 있는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한지호는 더욱 확신에 찬 어조로 설명을 계속했다.

“1차 백서는 그동안 구전으로 전승되던 한의학을 체계화시켰다는 점에서 정말 위대한 작업입니다. 하지만 이런 부분을 국민들에게 쉽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요? 우리가 시도하고 있는 신약 개발 역시 거창하게 말하면 인류의 미래를 바꾸려는 도전이죠. 그러나 국민들 피부에는 쉽게 와닿지 않을 겁니다. 미한약품이 신약 개발에 성공했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술이 얼마에 팔렸는지, 돈의 액수에만 집중했습니다.”

“원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의학 지식은 진입 장벽이 무척 높아서 아무리 좋은 홍보 기획을 마련해도 목표를 달성하기 힘듭니다.”

“그러니까 국민들 누구나 편하게 보는 드라마나 영화를 제작하자는 겁니다. 현대판 허준, 충분히 통할 것 같습니다. 한의학의 체계화가 왜 위대한 업적인지, 신약 개발은 뭐가 그리 중요한 것인지 자연스레 전국민에게 알릴 수 있겠죠.”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기획 전략실장은 혀를 내두르며 한지호를 다시 쳐다봤다.

한의학 의료 기관의 홍보를 위해 드라마를 만든다.

쉽게 생각하기 힘든 발상의 전환이다.

물론 드라마나 영화 제작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성공한다면 투자한 홍보비 이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한지호는 단순히 의술만 뛰어난 한의사가 아니었다.

원화 정의 네트워크와 원화 아카데미를 이끌면서 CEO로서의 탁월한 능력 또한 아낌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현대에는 더 이상 잘 쓰이지 않는 말이지만, 군주(君主)라는 칭호가 가장 잘 어울렸다.

“하지만 원장님, 드라마나 영화 제작에는 무척 오랜 기간이 소요되지 않습니까? 저희가 갑자기 뛰어들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직접 제작할 수는 없죠. 다만 최대 투자자가 되어 제작과 기획 방향을 잡아주면 됩니다. 광고비로 수십 억 아깝게 날리느니 제작금으로 총알 든든하게 만들면 방송국에서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겁니다.”

“미리 염두에 두신 방안이 있으셨군요.”

“방송국, 제작사, 연예기획사와의 줄은 제가 뚫어보겠습니다. 실장님은 원화 아카데미가 주력하는 프로젝트를 어떻게 영화나 드라마로 녹여낼 수 있을지 기획안을 써주세요. 미국의 의학 드라마 예시도 수집해서 넣으면 좋겠습니다.”

“네. 그레이 아나토미나 닥터스 등 핫한 미드에서 어떤 식으로 의료 홍보를 했는지 사례를 조사해보겠습니다.”

기획 전략실장은 영민한 사람답게 빨리빨리 말이 통했다.

하나를 툭 던져주면 열을 알아서 하는 스타일이다.

한 사람이 모든 일을 다 완벽하게 할 수는 없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함께 비전을 제시하는 게 리더의 몫이라면 세부적인 실행 방안을 모색하는 건 직원의 역할이다.

한지호와 기획 전략실장은 각자의 일을 충실히 해내고 있었다.

“기획서는 다음주까지 올리겠습니다, 원장님.”

“그때쯤이면 나도 방송국과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군요. 알겠습니다.”

한지호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며칠 전, 같은 자리에서 신영준 회장은 다시 한 번 한지호의 오너십을 인정했었다.

원화 아카데미의 최종 결정권자는 한지호임을 재확인 한 것이다.

드라마 제작에 관여하고, 1차 백서와 신약 개발이 세상에 알려지면 원화 아카데미는 세상의 판도를 바꾸는 게임 체인저가 된다.

그때부터는 한지호도 의료인을 넘어 경제에 영향을 끼치는 인물로 거듭난다.

지금도 순수 연봉이 수십억 원에 다다르지만, 경제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전생의 규호가 절규했던 것처럼 한지호는 의술을 통해 천하를 움직이는 자리에 오를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았다.

+++

“너무 급하게 진행하시는 것 아닙니까?”

사무장 박우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역삼역 서울 원화 한의원에서 한지호의 스케줄을 놓고 회의를 마친 직후였다.

한지호는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중심을 잡아주는 박우식이 어떤 염려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원화 아카데미의 프로젝트를 홍보하기 위해 한지호는 무척 빠른 속도로 드라이브를 거는 중이다.

한 시간 뒤에도 공중파 방송국에서 국장과 미팅이 잡혀 있다.

드라마 제작이라는, 누구나 고개를 갸웃거릴 대형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해 발로 뛰는 것이다.

“천천히 신중하게 가도 된다는 말씀이시죠?”

한지호가 박우식을 바라보며 반문했다.

박우식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원화 아카데미는 아직까지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R&D에 특화된 기관이지만 지금 상태에서 막대한 홍보비를 쏟아붓는 것은 재무건전성을 악화시킬지 모릅니다. K-메디컬 타운의 원화 정의 한의원도 아슬아슬하게 흑자를 유지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물론 서울과 홍콩의 원화 한의원, 그리고 네트워크 소속 다른 한의원들은 계속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사무장이자 총괄 이사로서 염려하는 부분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전의 사업 경험이 있으실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외람되지만 제가 원장님을 만나기 전 사업을 크게 벌리다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저보다 원장님께서 훨씬 뛰어난 역량을 갖고 계시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순식간에 몰락했던 경험자로서 조언을 드리는 것입니다.”

“사무장님의 살아있는 경험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 감을 믿어보고 싶습니다.”

한지호는 박우식의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굳이 박우식을 설득할 필요는 없다.

최종 결정은 언제나 한지호의 몫이었다.

그냥 밀어붙인다고 해도 박우식이 딱히 깊은 불만을 품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지호는 박우식을, 그리고 다른 직원들을 단순한 아랫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함께 비전을 공유하고 같은 길을 걸어갈 동료로 생각했다.

국제적인 유명인사가 된 지금도 처음의 마음은 달라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직원 이전에 동료다.

그렇기 때문에 진심을 다해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지금은 모든 힘을 다해 드라이브를 걸어야 할 때입니다. 원화 아카데미를 널리 알려 주목받게 만드는 것, 여기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확실한 직감을 얻으신 것입니까?”

“네. 얼마 전 기획 전략실에서 보고를 받을 때, 저와 신영준 회장님 그리고 최규열 센터장님의 눈빛이 서로 통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우리 세 사람 모두 동시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기록실에서 만든 백서는 한의학을 세계적으로 인정 받는 학문으로 격상시킬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연구 중인 신약은 수많은 중병 환자들에게 희망을 줄 겁니다. 지금 이 순간, 망설일 이유 없이 전력을 다해 달려야 한다는 확신을 받았습니다.”

박우식은 잠시 대답하지 않고 한지호를 마주봤다.

그에게 제 2의 인생을 열어준 장본인이 차원이 다른 미래를 확신하고 있다.

신중함을 기하라는 조언은 한 번으로 족하다.

이제 그가 할 일은 한지호가 앞만 보고 달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주변 정리를 하는 것이다.

판단을 내린 박우식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흔들림 없이 한의원과 네트워크의 안 살림을 지키겠습니다, 원장님.”

한지호도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처럼만 해주시면 됩니다. 더 이상 완벽할 수 없으니까요.”

“과찬이십니다.”

“과찬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그럼 전 이만 방송국으로 가볼게요.”

한지호는 박우식과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주차장에는 그의 애마 벤틀리 GT 쿠페가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벤틀리를 타고 홍콩에서는 마세라티 콰트로포르테를 타는 삶.

이제는 당연한 일상이지만 시동을 걸고 엔진음을 들을 때마다 지하철 티켓이 아까워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다니던 대학생 시절이 떠올랐다.

잘 빠진 차를 몰고 그가 향한 곳은 상암이다.

MBS의 건강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할 때는 매주 방송국을 찾았었다.

그때의 인연이 있기에 MBS 드라마 국장을 만나는 것도 수월했다.

예능국의 채성일 PD가 한지호를 위해 힘을 써줬다.

방송국 국장은 연예계에서 왕 같은 대우를 받는다.

그들의 결정에 따라 연예인들의 출연이 결정되고, 누구를 띄우고 죽일지도 입맛대로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재벌 회장이나 장관, 국회의원들과도 손쉽게 교분을 나누는 한의학계 최고의 거물이다.

하지만 방송국은 또 다른 세계였고, 그들의 룰을 존중해줘야 했다.

‘억지로 메이크 하는 게 아니라 국장이 안달나게 만들어야지. 그 정도 매력이 없다면 드라마는 안 만드는 게 낫고.’

상암 MBS 빌딩으로 들어선 한지호는 남다른 각오를 품었다.

제작금을 투자할 계획이고, 방송국의 룰을 존중하겠지만 드라마 국장의 바짓가랑이를 잡을 생각은 없었다.

한지호는 원화 아카데미 기획 전략실장과 함께 만든 기획서가 걸작이라 자신했다.

이만한 컨텐츠 기획이라면 콧대 높은 방송국 국장이라도 먼저 흥미를 보여야 마땅하다.

만약 기획서가 아예 엉망이었다면 국장과 약속을 잡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아무리 한지호가 유명인사고, 채성일 PD가 백방으로 힘을 썼어도 프로의 세계는 냉정하다.

한 번만 만나달라는 연예기획사 관계자들이 줄을 설 텐데도 불구하고 MBS 드라마 국장이 시간을 내준 것은 분명 긍정적 신호다.

한지호는 막연하지 않은, 근거가 확실한 자신감을 품고 드라마국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복도 너머에서 걸어올 때부터 이미 시선은 집중 된 상태였다.

영국 왕실의 인정을 받은 국민 한의사, 아니 세계적 한의사 한지호의 얼굴을 못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지호 원장님!”

다른 PD와 직원들이 넋 나간 사이 중년 남자가 힘차게 한지호를 불렀다.

한지호는 직감적으로 그가 드라마국 국장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박태규 국장님?”

“와하하하! 방송 화면보다 실물이 훨씬 더 미남이십니다. 아까 전부터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박태규 국장은 예상 외로 호탕하게 한지호를 환영해줬다.

국장실 바깥에 나와 한지호가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지호는 온 드라마국 PD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으며 국장실로 들어갔다.

콰앙-

뒤에서 국장실 문을 닫은 박태규의 눈이 번들거렸다.

이런 눈빛, 무척 익숙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야망이 불타오를 때 나오는 눈빛이 박태규에게서 엿보였다.

한지호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보내주신 드라마 기획서와 제작 투자 제안서… 무조건 우리 MBS랑 하는 겁니다, 원장님! 제2의 한의학 국민드라마로 현대판 허준을 만들어 봐야겠습니다, 와하하하하!”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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