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234화 (234/255)

# 234

1장, 한지호의 날개 (1)

드라마 제작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무척 이례적인 일이다.

공중파 방송국에서 드라마 한 편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최소 1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

경우에 따라서 3년 이상 소요되고도 프로젝트가 엎어질 때도 흔하다.

그런데 어째서 한지호가 제안한 드라마는 이토록 빨리 편성이 확정됐을까.

국민 한의사 타이틀을 가진 한지호의 세계적인 명성 때문일 리는 절대 없다.

방송국과 제작사는 철저히 자본의 논리로 움직인다.

유명인이 제안한 프로젝트를 다 받아주면 24시간 1년 내내 드라마만 틀어도 모자랄 것이다.

이유는 명확하고 간단했다.

한지호의 기획서가 방송국에서 군침을 흘릴 정도로 먹음직스러웠기 때문이다.

먼저 컨셉이 명확했다.

현대판 한의학 드라마로 허준의 신드롬을 20년만에 부활시킨다.

누가 들어도 포인트가 명확하게 떨어지는 한 문장이다.

구구절절 기획서를 길게 써봐야 처음 한 문장이 매력적이지 않으면 다 읽지도 않는다.

그런 점에서 한지호의 기획서는 시작부터 드라마 국장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게다가 국내 최고의 한의사인 한지호가 직접 전문가로서 자문을 해주겠다고 나섰다.

엎드려 절하며 부탁을 해도 모자랄 판에 자발적으로 최고의 전문가가 붙은 셈이다.

그러나 훌륭한 기획과 전문가만으로 드라마 제작이 결정되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거듭 강조했듯 돈이다.

제작 비용을 어떻게 충당할 것인가, 그리고 방영했을 때 수익을 확신할 수 있는 컨텐츠인가.

이 두 가지가 방송국 입장에서는 가장 중요한 핵심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한지호는 핵심을 꿰뚫는 완벽한 해답을 준비해 놓았다.

제작비의 대부분을 원화 아카데미에서 지원한다.

당연히 돈을 퍼주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 한 편을 만들 때 수십 개의 회사가 달라붙어 투자를 한다.

이번에는 원화 아카데미에서 여러 회사 몫을 감당하겠다고 미리 보증을 선 것이다.

시작부터 든든한 투자자가 생겼으니 방송국 입장에서는 부담을 덜 수 있다.

보통 투자자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기획서를 돌리느라 몇 개월이 훌쩍 지나간다.

한지호의 드라마 기획은 그만큼의 시간을 아낄 수 있게 된 것이다.

수익성도 여느 기획안과는 비교 되지 않을 정도였다.

지난 몇 년 동안 병원을 배경으로 한 메디컬 드라마가 성공하면서 우후죽순으로 쏟아졌다.

시청자들은 항상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것을 원한다.

이런 타이밍에 배경이 현대 한의원이라면 무척 신선하게 느껴질 것이다.

사극 속 한의사와는 다른, 그러면서 대학 병원이 주 무대인 메디컬 드라마와도 다른 설정이 가능하다.

어차피 내용은 한의학과 로맨스가 절반씩 섞일 게 뻔하다.

초반에는 색다른 배경과 설정으로 분위기를 잡고, 중반 이후 남녀의 멜로로 치닫는 게 한국 드라마의 정석이다.

식상한 전개라고 탓할 수만은 없다.

이런 방식으로 한류라는 어마어마한 흐름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MBS 드라마 국장과 긴밀히 협의하는 과정에서 유초아를 추천했다.

당장 미니시리즈 여주인공을 맡기에는 보여준 게 별로 없다.

하지만 그녀는 여자 조연 역할로 데뷔하며 호평을 받았고, 프레시한 이미지로 광고를 찍어 대중들에게 얼굴을 널리 알렸다.

드라마 이후 크랭크 인에 돌입한 영화도 곧 촬영이 끝난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시기적으로 절묘한 타이밍에 한지호가 드라마 프로젝트를 가동한 셈이 됐다.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유초아는 여주인공 다음으로 비중 있는 조연이 될 것 같았다.

드라마 투자자이자 기획자인 한지호의 요청이 있었고, 방송국과 제작사 입장에서도 청순하면서도 묘한 이미지로 뜨고 있는 신인 여배우를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

한지호는 자신의 도움 없이도 유초아가 연예계에서 성공할 거라고 믿었다.

데뷔작에서부터 가능성을 보여주며 팬덤을 만든 게 증거였다.

그렇기에 오히려 당당히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안 될 사람을 억지로 미는 게 아니라 잘 될 사람에게 힘을 보태준다는 생각이었다.

한지호라는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유초아는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한지호는 도움을 빌미로 그녀에게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

천사원에서 함께 자란 오빠 동생 사이를 넘어선 감정이 생겼다는 건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둘 다 너무 바빠서 감정의 씨앗이 진짜인지를 확인할 시간이 없을 뿐이다.

한지호는 그저 지금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면 언젠가는 서로의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순간이 올 거라 생각했다.

이렇듯 원화 아카데미의 프로젝트를 홍보하기 위한 드라마 제작은 본 궤도에 올랐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가 무사히 끝나면 촬영과 방영은 식은 죽 먹기다.

대단한 일이 또 하나 성사된 것이지만 한지호에게는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한지호는 끊임없이 밀려드는 환자들을 치료하며 한의학의 체계화 작업과 신약 개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몸이 두 개가 아닌 세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지만 그는 지치지 않았다.

자신의 손으로 역사와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희열이 한지호를 지탱하는 힘이다.

그렇게 치열한 나날이 쌓이고 또 쌓이며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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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님, 존스 홉킨스에서 걸려온 전화입니다.”

서울에서 진료 중이던 한지호는 잠깐의 휴식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 틈을 못 참고 전화가 걸려왔다.

그것도 세계 최고의 의대를 보유한 존스 홉킨스에서 한국 시간에 맞춰서 건 전화다.

받지 않는다면 예의가 아니다.

한지호는 예약 환자 사이 사이의 짧은 휴식을 포기하고 수화기를 들었다.

“연결해줘요.”

“네.”

곧이어 잠깐의 통화연결음이 울렸고, 안내데스크에서 받은 전화가 원장실 수화기로 연결 됐다.

“헬로, 디스 이스 닥터 한.”

한지호는 능숙한 영어로 인사를 건넸다.

서울과 홍콩 원화 한의원의 안내 데스크 직원들은 통역 수준의 영어를 구사한다.

원장인 한지호가 직원들보다 영어를 못 해서는 체면이 서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예전부터 유창한 영어로 세계적인 거물들과 자유롭게 소통해왔다.

존스 홉킨스 의대의 기라성 같은 교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닥터 한!”

전화기 너머 미국은 캄캄한 밤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가움으로 가득한 목소리에서는 피곤한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상대는 e-메일로 기본적인 용건을 알린 후 한지호의 일과 시간에 맞춰 전화를 하는 정성을 보였다.

그것도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존스 홉킨스 의대의 교수인데 말이다.

“프로페서 콜린스?”

“맞아요, 맞아! 안토니 콜린스입니다. 이렇게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제가 영광입니다. 혈액암 분야에서 세계 최고 권위자이신데…… 볼티모어는 지금 밤이죠?”

한지호는 존스 홉킨스 의대가 위치한 볼티모어의 시간을 물었다.

별 것 아닌 질문이지만 그의 국제적 감각이 돋보였다.

안토니 콜린스 교수는 계속해서 상기 된 음성으로 대답했다.

여러 번의 메일 교환 끝에 한지호와 직접 통화를 하게 돼서 진심으로 기쁜 것 같았다.

“밤이지만 괜찮습니다, 닥터 한. 하나도 피곤하지 않아요. 마침내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게 됐으니. 그런데 진료 중이라고 들었는데 괜찮겠어요?”

“다음 환자의 예약 시간이 10분 정도 남아있습니다. 이만하면 여유가 꽤 있는 편이죠.”

“그럼 다행이네요. 아무튼 답장으로 보내준 메일은 잘 읽었습니다. 닥터 한이 우리 CAHCIM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어서 무척 고무적입니다.”

안토니 콜린스가 CAHCIM이라는 생소한 말을 썼다.

하지만 메일을 통해 그와 의견을 주고받은 한지호는 어렵지 않게 뜻을 알아들었다.

CAHCIM은 통합의학 연구센터 연합이다.

미국 내 24개 주 40여 의대가 연합 회원으로 등록했다.

통합의학 연구센터 연합은 이름 그대로 한의학 등 대체의학과 기존 현대의학의 접목을 시도하고 연구하는 곳이다.

캘리포니아 주의 UCLA 의대와 UC어바인 의대, 스탠포드 의대 등이 CAHCIM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고, 존스 홉킨스 의대는 비교적 최근에 합류했다.

안토니 콜린스는 존스 홉킨스 의대의 명망 높은 교수진 중에서 CAHCIM의 활동에 가장 관심이 깊은 인물이다.

그는 한지호가 모샤드 일라이의 파킨슨 병을 완화시켰다는 뉴스가 터졌을 때 곧장 연락을 시도했었다.

그러나 당시 한지호는 모샤드 일라이에게 받은 가르침 때문에 인생을 돌아보고 있었고, 라오스로 의료 봉사를 떠나면서 답장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안토니 콜린스는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혈액암 분야의 최고 귄위자가 되기 위해 쏟았던 노력에 비하면 한지호에게 여러 차례 연락을 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결국 라오스에서 돌아온 한지호와 메일을 주고받고 오늘 통화까지 하게 된 것이다.

“통합의학 연구센터 연합은 앞으로 미국 의대들의 연구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데 기여 할 것으로 보입니다. 현대의학으로 정복하지 못한 미지의 질병들, 특히 제3세계 희귀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데 있어 대체의학을 연구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해결책은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한지호는 정제된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단순한 립 서비스가 아니다.

전문성이 바탕이 된 한의학 권위자의 의견이다.

혈액암에 이어 대체의학 통섭 연구로 관심을 돌린 안토니 콜린스 입장에서 한지호는 받들어 모셔야 할 마스터다.

특히 최근 미국 유수의 의대들은 침술의 효능에 주목하고 있다.

다른 한의학적 치료는 효과에 있어서 과학적 인과관계를 밝혀내기 쉽지 않다.

반면 침술학은 통증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입증 되어 체계적인 교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닥터 한. 혹시 제가 드린 제안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셨어요?”

한지호는 콜린스 교수의 제안을 떠올렸다.

존스 홉킨스 의대로 와서 특별 강연을 해달라는 제안이었다.

이제껏 한의사가 미국 명문대에서 특강을 한 사례는 전무후무하다.

한의사뿐 아니라 웬만한 대체의학 전문가라고 해도 미국 명문 의대의 문턱을 넘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혈액암으로 세계 최고라는 인정을 받은 존스 홉킨스 의대 교수가 한지호를 모시려고 몇 달에 걸쳐 애를 쓴 것이다.

그만큼 한지호가 여러 거물들을 치료하며 쌓은 국제적 명성과 의학적 성과가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저에게도 많은 공부가 될 제안이기에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만, 솔직히 물리적으로 일정 조율이 자유롭지만은 않습니다.”

“아, 물론 그러시겠지요. 서울과 홍콩을 오가며 진료를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원화 아카데미에서 한의학의 체계화 작업과 신약 개발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맞아요, 맞아. 바로 그 한의학의 체계화 작업 성과를 우리 존스 홉킨스의 다른 교수진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어서 닥터 한을 초청한 것입니다. 힘들겠지만 꼭 한 번 시간을 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안토니 콜린스가 이토록 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의사로서의 호기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텍사스 의대 M.D 앤더슨 센터의 대성공 이후 대체의학을 접목하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됐다.

하버드 의대와 조지타운 의대, 그리고 텍사스 의대는 이미 대체의학 접목에서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그에 비해 세계 최고의 의대라는 자부심을 지켜온 존스 홉킨스는 성과가 미진하다.

그렇기에 안토니 콜린스가 통합의학 연구센터 연합 활동에도 열성이고, 또 한지호를 초청하기 위해 노력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닥터 한, 극비이지만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도 조지타운 의대처럼 대체의학 대학원 과정을 신설하려 합니다. 그리고 초빙 교수로 닥터 한을 모시고 싶어서 특강을 부탁드린 것이지요.”

안토니 콜린스는 연예인보다 바쁜 한지호의 스케줄을 확보하기 위해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한지호의 눈빛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존스 홉킨스 특강은 한의사로서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실질적인 이득은 별로 없다.

어쩌면 동물원 원숭이 노릇을 하고 와야 할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것을 이룬 한지호에게 딱히 매력적인 제안은 아니었다.

그러나 존스 홉킨스에 대체의학 대학원 과정이 신설되고, 초빙 교수가 되기 위한 인사 차 특강을 하는 것이라면 말이 완전히 달라진다.

특강에서 그동안의 의학적 성과를 설명하면 다른 교수진과 학장에게 확실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한의사라고는 해도 학부 학력이 전부인 30대 초반의 한지호가 존스 홉킨스 의대의 교수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의학의 위상을 끌어올려 역사에 새롭게 각인시키려는 한지호는 놓칠 수 없는 사냥감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오래 고민 할 필요는 없었다.

스케줄을 관리하는 박우식 사무장에게 달달 볶이겠지만 감당해야 한다.

한지호는 숨죽인 채 대답만 기다리고 있는 안토니 콜린스에게 확답을 해줬다.

“콜린스 교수님. 조만간 미국에서 만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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