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
9장, 딜레마 (1)
한지호는 홍콩 리츠 칼튼의 스카이 라운지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즐겨 마시는 싱글 몰트 위스키 보모어 12년을 몇 잔째 마셨는지 모른다.
더 비싼 18년이나 30년보다 12년이 그의 입에 딱 맞았다.
혼자 구석 자리에 앉아 홍콩 시내를 내려다보며 위스키를 마시는 한지호의 모습은 마치 고독을 씹는 느와르 영화 주인공 같았다.
탄탄한 몸에 착 감긴 명품 정장, 왼쪽 손목에서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수천만 원짜리 시계, 무표정하게 있으면 다소 사나워 보이지만 뚜렷하기 그지없는 이목구비.
그는 은근한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몇몇은 구석에서 위스키를 마시는 남자가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한의사임을 알아봤다.
촌스럽게 사진이나 사인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용감하게 말을 걸면서 접근한 여자들이 벌써 3명이나 지나갔다.
화려한 차림새의 아름다운 홍콩 여자들은 어떤 남자라도 침을 흘릴만 했다.
그런 여자들이 먼저 한지호에게 말을 걸면서 술 잔을 청했었다.
남몰래 지켜보는 사람들은 당연히 한지호가 미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줄 알았다.
하지만 한지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습관적으로 짓는 미소조차 보여주지 않으며 혼자 있고 싶다며 선을 그었다.
무려 3명의 미녀에게 퇴짜를 놓고 나서야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괜히 튕기거나 더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는 게 아니라 진짜 혼자 있고 싶다는 걸 모두 깨달은 것이다.
“하아-.”
또 한 잔을 깔끔하게 비운 한지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눈도, 입도 전혀 웃고 있지 않다.
한의원을 시작한 이후 늘 미소를 짓고 사는 그가 무표정이라는 것은 고민이 깊다는 뜻이다.
“원 모어.”
그는 바텐더에게 똑같은 보모어 12년을 한 잔 더 주문했다.
이렇게 많이 마실 거였다면 차라리 한 병을 사는 게 나았을지 모른다.
“썰, 얼 유 파인?(sir, are you fine?)”
걱정이 됐는지 바텐더가 새 잔을 갖다주며 조심스레 질문을 해왔다.
한지호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인, 돈 워리.(fine, don’t worry.)”
“오케이, 썰. 이프 유 니드 애니띵, 저스트 콜 미.(okay, sir. if you need anything, just call me.)”
한지호는 정중하게 관심을 보인 바텐더에게 100달러짜리 팁을 건넸다.
홍콩에서 가장 비싼 호텔의 라운지 바지만 이만한 팁을 주는 손님은 흔치 않다.
사실 나에게 관심을 끄라는 의미로 건넨 팁이었다.
다시 혼자가 된 한지호는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요시모 유타의 환부를 봤던 날, 바로 어제의 기억이 끝없이 재생 되고 있었다.
+++
“와이프와 아이들은 교육 때문에 미국에 있고, 그렇다보니 홍콩에서 종종 관계를 가졌는데…….”
우물쭈물하던 요시모 유타가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한지호는 저도 모르게 오금희의 기운을 발휘하며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아무리 일본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고위 공무원이라 해도 한지호가 작정하고 추궁하면 위축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지호는 비밀을 털어놓지 않으면 치료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끔찍한 고통을 겪고 있는 요시모 유타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종종 관계라면, 어떤 식으로. 성매매를 하신 겁니까?”
“부끄럽지만… 콜걸들을 사저로 불러서…… 비밀은 꼭 지켜주시겠지요?”
“치료 도중 알게 된 환자의 신상은 철저히 함구합니다.”
“그, 그래요. 아무튼 그 중에 유독 어린 콜걸이 있었는데…….”
“어린? 설마 미성년자였습니까?”
“…….”
요시모 유타가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은 곧 긍정이다.
한지호는 눈동자에 경멸의 빛이 스며들지 않게 주의하며 말을 이었다.
“홍콩 현지에서는 미성년자가 성매매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들었습니다. 말씀하신 그 콜걸, 국적이 달랐겠군요?”
“브로커 말로는 네팔에서 막 넘어온 아이라고 했어요.”
“네팔 출신의 미성년자와 관계를 가진 후 증상이 시작된 겁니까?”
“분명 그때 이후로 갑자기… 성기 위쪽부터 피부가 보라색으로 물들더니 고름이 터지고, 통증과 진물 때문에 멀리 움직이기 힘들 정도가…… 되었어요, 닥터 한.”
“알겠습니다, 대사님. 원인으로 추정되는 사건을 알았으니 치료법을 찾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치료가 가능하긴 하겠어요? 불가능하다면 하루라도 빨리 대사에서 물러나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기에…….”
“1주일만 시간을 주십시오. 그 안에 치료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깔끔하게 손을 떼겠습니다. 추위안차오 상무위원님의 얼굴을 봐서라도 최선을 다할 테니 다른 염려는 안 하셔도 됩니다.”
“고, 고마워요.”
한지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싸늘한 눈빛을 보여준 다음 별장에서 나왔다.
나오자마자 헛구역질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추위안차오는 분명 요시모 유타가 아시아 평화에 큰 기여를 하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공적으로는 틀림 없는 사실일 것이다.
추위안차오가 하찮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고, 한지호도 나름대로 알아본 바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사적으로는 이보다 더 실망스러울 수 없었다.
사저로 콜걸, 즉 창녀들을 불러들여 성관계를 하는 것은 어렵게 어렵게 이해한다고 칠 수 있다.
하지만 네팔에서 온 미성년자라니.
이건 해도 너무한 것이었다.
일본이라는 선진국의 대사가 후진국의 어린 소녀를 돈으로 사서 유린했다.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지면 국제적인 특종이 되고, 한동안 일본 정부는 국제사회에서 고개를 들지 못 할 것이다.
물론 뉴스를 터트리려고 해도 증거가 없으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지호는 입안에 맴도는 쌍욕을 억누르며 차에 올라탔다.
한시라도 빨리 요시모 유타가 머무는 별장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머릿속으로 전생의 기억 한 자락이 떠올랐지만 길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환자를 평등하게 대해야 하는 게 의원의 자세라지만, 이런 질병까지 치료해야 하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부와아아아앙-
한지호의 심경을 대변하듯 콰트로포르테가 신경질적인 배기음을 토해냈다.
침을 잡은 이후 한 번도 해본 적 없었던 고민이 한지호를 괴롭히고 있었다.
+++
어제 일을 생각하는 사이 또 한 잔의 위스키가 비워졌다.
체감하기로는 벌써 반 병 가까이 마신 것 같았다.
독하기로 유명한 아일라 섬의 싱글 몰트 위스키인 보모어 12년 반 병이면 웬만한 주당도 넘어가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한지호는 끄덕이 없었다.
일부러 내공을 일으키지 않아도 단전에 자리 잡은 오금희가 알콜을 불태운다.
적당히 취기가 올라 알딸딸한 기분은 느껴지지만 절대 만취할 리는 없다.
오금희를 익히고 내공을 소유하게 되면서 만취할 자유는 박탈 당했다.
그래서인지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오히려 머리가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자꾸 생각나네.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건가.”
한지호는 복잡하게 펼쳐지는 그림을 피하지 않고 직시하기로 마음먹었다.
솔직히 말해서 요시모 유타를 치료하고 싶지 않았다.
일본 정부의 고위직이라는 사실 때문에 처음부터 걸리는 게 있었다.
그런데 수시로 콜걸을 부르고, 네팔 출신의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가지다 이상한 병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됐다.
점잖은 얼굴에 겸손한 태도를 보이지만 속내는 쓰레기나 다름없다.
한중일 3국의 은인이 되고 싶은 욕망, 막대한 치료비, 이런 게 목표였다면 당장 치료를 그만뒀을 것이다.
하지만 아시아의 평화라는 거창한 말이 한지호의 발목을 붙잡았다.
추위안차오의 말대로 요시모 유타는 중일 관계, 그리고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10년 넘게 노력해온 외교관이다.
일본 국내의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외길을 걸어왔다.
국제사회, 특히 아시아의 이웃 국가들에게 일본이 사과해야 한다고 말하는 고위 외교관은 요시모 유타밖에 없다.
사적으로는 쓰레기지만 공적으로는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기여하는 인물인 것이다.
만약 그가 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대사 직위에서 물러나면 중국과 일본, 또 한국과 일본은 한층 감정의 골이 깊어질 게 분명하다.
친중파이면서 동시에 친한파인 고위 공무원이 중간에서 역할을 해줘야만 아시아 3국이 평화 무드를 조성할 수 있다.
외교적인 측면에서 요시모 유타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돈이나 명예로 대체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닌 것이다.
“분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한지호는 드디어 결심을 내렸다.
요시모 유타를 치료한다.
그가 비록 미성년자 성매매나 일삼는 쓰레기라고 해도 일단 살려내고 본다.
그 다음 철저하게 빚을 지워 남은 평생을 아시아의 평화에만 기여하도록 만들 것이다.
주중 일본대사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서, 어쩌면 일본 수상이 되어서 한국의 전쟁 피해자들에게 직접 무릎 꿇게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작정을 해서인지 머릿속 그림들이 더욱 또렷하게 보였다.
한지호는 재즈가 흘러나오는 홍콩 리츠 칼튼 스카이 라운지 구석에 홀로 앉아 과거를 탐험했다.
이제껏 다가오는 족족 사람들을 뿌리쳐서인지 방해를 받을 염려도 없었다.
전생의 규호도 요시모 유타가 앓고 있는 병을 직접 치료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비슷한 증상에 대해 들어본 기억이 났다.
경험의 유무는 엄청난 것이다.
현대 의학으로는 이름조차 밝혀낼 수 없는 희귀병이지만, 전생의 기억 덕분에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현실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정보를 체득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무기다.
“전쟁터에서 소문을 들었던 기억이 나.”
과거로 흠뻑 빠져든 한지호가 혼잣말을 읊조렸다.
하루가 멀다하고 전투가 벌어졌던 삼국시대, 전장에는 온갖 소문이 다 있었다.
집채만한 호랑이가 나타나 일군단을 쓸어버렸다거나 원한을 품은 귀신 때문에 강건하던 장수가 시름시름 앓는다는 등 믿지 못할 소문도 많았다.
하지만 떠도는 풍문 중에서 믿을만한 소식이 섞여 있기도 했다.
특히 전염병에 대한 소문은 정확한 경우가 많다.
전군의 창칼에 찔려 죽는 병사만큼 전염병에 휩쓸려 죽는 병사들이 많기에 장수들도 촉각을 곤두세운다.
어느 지역, 어느 부대에서 전염병이 발생하면 곧바로 소문이 되어 천하를 강타하기 일쑤다.
한지호, 아니 규호는 그런 소문 중에서 유독 꺼림칙했던 이야기를 파헤치고 있었다.
‘공손찬의 병사들이 오랑캐 처녀들을 강제로 품었다가 전염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있었지. 원소에게 허망할 정도로 어이 없이 패망한 것도 전염병 탓이 컸다고……. 북방을 정벌하러 간 조조의 별동대도 함부로 어린 여자들을 품었다가 괴질에 걸려 고생했다고 들었어.’
두 가지 다른 소문이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한족이 아닌 다른 종족, 그리고 어린 여자들을 품었을 때 전염병이 창궐했던 것이다.
네팔 미성년자를 돈으로 사서 품에 안은 요시모 유타와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차이점도 있다.
공손찬의 부대는 전염병을 해결하지 못했으나 조조의 별동대는 달랐다.
곽가의 지휘 아래 별동 기마대는 북방 정벌의 목표를 이뤘었다.
그 대가로 천하제일의 책사 곽가가 중병을 얻어 요절했지만, 부대가 기이한 전염병을 이겨낸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곽가가 회유한 이족의 주술사가 해결책을 마련해 줬다고 들었어. 분명 그 이야기가 한동안 천하의 이름난 의원들 사이에서 화제였으니까.’
의성으로 추앙 받았던 규호 역시 비교적 정확한 소문을 들은 장본인이었다.
규호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는 한지호는 작은 실마리를 놓치지 않았다.
요시모 유타가 앓고 있는 괴상하고 흉측한 성병.
보랏빛으로 물든 피부와 고름을 치료할 수 있는 단서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 했다.
‘숙주! 병마의 숙주가 멀쩡한 성기였고, 괴질에 걸린 병사들을 내시처럼 만들자 역병이 멎었다 해서 의원들이 신기해 했었지. 사부님, 화타께서도 신기한 역병이라고 언급하셨던 기억이 나!’
어둠 속에서 빛이 보이고 있었다.
기억의 파편을 복원한 한지호는 술잔이 놓인 바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전생의 기억은 현실의 병마를 압살하는 최종병기다.
주중 일본대사, 요시모 유타.
그의 병을 치료할 방법을 찾아냈다.
치료와 동시에 징벌이 될지도 모른다.
한지호는 미성년자 성매매 사실을 고백하면서도 점잖은 표정을 짓던 요시모 유타가 어떤 얼굴을 할지 얼른 보고 싶어졌다.
연달아 마신 술이 단숨에 깨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