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
6장, 영웅이 영웅에게 (1)
S대 병원에는 제법 많은 기자들이 모여 있었다.
공식 기자회견이 있는 것은 아니기에 기자들끼리 우르르 몰려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1층 로비에 드문드문 나눠서 앉아있는 기자들은 딱 봐도 티가 났다.
환자와 보호자들, 면회객이 대부분인 병원 회합실에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있을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자들은 특유의 냄새를 풍긴다.
진짜 코 끝으로 맡는 냄새는 아니지만, 사회생활을 좀 했다면 누가 기자이고 아닌지를 알아보는 게 어렵지 않다.
한지호는 1층에 포진한 기자들을 피해서 남궁훈을 만났다.
남궁훈도 쓸데없이 이목이 집중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비밀스럽게 만나는 방법은 간단했다.
한지호가 자신의 하얀 벤틀리를 S대 병원 지하주차장에 세웠고, 혼자 내려온 남궁훈이 조수석 문을 열고 탄 것이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누군가와 은밀하게 접선할 때 종종 쓰는 방법이다.
물론 현실에서 이렇게 첫 대면을 할 일은 거의 없다.
그렇기에 한지호와 남궁훈 모두 약간은 어색함을 느끼며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지호입니다.”
“이거 정말 영광입니다. TV에서 많이 봤는데……. 남궁훈입니다.”
“저도 남궁훈 씨를 TV에서 많이 봤습니다.”
한지호의 농담에 둘이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왕년의 스타라고 해도 남궁훈은 최근까지 TV에 자주 나오는 연예인이다.
그가 먼저 한지호에게 TV에서 많이 봤다는 말을 하는 게 재밌었다.
너무 무겁지 않게 분위기를 풀어간 한지호가 먼저 말을 이었다.
“처음 뵙는 자리가 협소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한 원장님 차가 커서 하나도 안 불편합니다. 그리고 기자들 눈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지요.”
“제가 도움을 드릴 부분이 정해지기 전에 기사부터 나가면 가족분들이 더 불편해질 것 같아서요.”
“맞습니다. 깊게 배려해주셔서 해진이 가족들도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남궁훈이 자연스레 고해진을 언급했다.
그와 고해진은 비슷한 시기에 데뷔해서 오래도록 우정을 나눈 친구 사이다.
그렇기에 남궁훈은 연예인 동료들을 대표해서 고해진 사건 대책위원장으로 나서고 있었다.
만약 남궁훈이 없었다면 고해진의 가족들은 경황이 없는 가운데 갈피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연예인들도 남궁훈이라는 선배가 중심을 잡아주자 서명에 동참하며 힘을 보탰다.
지금 고해진에게 가장 큰 힘이 되는 사람을 딱 한 명만 꼽으라면 단연 남궁훈이다.
한지호는 몸을 살짝 틀어 그를 제대로 쳐다봤다.
초면의 어색함을 풀기 위해 서글서글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눈가에는 슬픔이 가득해 보였다.
짙은 슬픔은 숨긴다고 해서 숨겨지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눈 밑도 어두웠다.
다크 써클이 심하게 내려앉은 것이다.
가장 친한 친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혼자서 대형 병원과 맞숴 싸워야 하는 책임감 때문에 남궁훈은 일주일 째 잠도 잘 못 자고 있었다.
그의 눈을 바라보니 한지호도 새삼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런 말씀 묻기 조심스럽지만, 고해진 씨는 좀 어떻습니까?”
“여전히……. 의사 말로는 천공으로 장 내출혈이 심해서 깨어나도 고생을 많이 할 것 같다고 합니다. 우선은 깨어나기라도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S대 병원에서 재수술을 한 거죠?”
“병원을 옮긴 날 바로 재수술을 했습니다. 다행히 재수술은 성공적이었는데 쇼크가 컸나봅니다. 계속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 걸 보면. 지금은 욕창과 폐렴이 생기지 않게 조심하면서 지켜보고만 있습니다.”
“재수술로 천공과 내출혈을 잡았는데도 계속 쓰러져 있다는 건 충격이 뇌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일 겁니다.”
“의사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몸이 충격을 받으면 검사로 알아낼 수 없는 다양한 반응이 나타나는데, 뇌 손상이 의심된다고…….”
아직 고해진을 보지 않았지만, 그가 어떤 상태인지 대충 감이 왔다.
척 하면 척이다.
의료 사고로 인한 천공과 장 출혈, 그로인한 쇼크가 뇌에 충격을 줘 혼수상태에 이르게 만들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S대 병원에서의 재수술이 무사히 끝났다는 사실이다.
성공적인 재수술 덕분에 천공과 장 출혈은 상당 부분 수습이 됐다.
하지만 쇼크를 받은 몸은 여전히 깨어나길 거부하고 있다.
예상되는 뇌 충격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도 고해진이 의식을 되찾아야 확인이 가능하다.
“한 원장님, 해진이의 가족들은 최악의 경우만 아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감당할 수 있으니 최악만 피했으면 하는 것이지요. 의료사고를 낸 의사와 병원에 법적인 책임을 묻는 일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해진이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습니다.”
남궁훈은 최대한 담담하게 감정을 억눌러가며 말을 뱉어냈다.
그러나 말 끝에 이르러서는 음성이 떨리는 걸 막을 수 없었다.
한지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질문을 던졌다.
“후우- 가족분들이 생각하는 최악의 경우는 어떤 것입니까?”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지요. 죽거나, 식물인간으로 남거나…….”
고해진의 가족들은 상황의 엄중함을 비교적 잘 이해하고 있었다.
비슷한 케이스의 환자들 중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거나 식물인간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미 일주일 가량 의식불명 상태가 유지 됐다는 것은 적신호다.
천공과 장 출혈, 뇌의 충격으로 인한 부작용은 나중 걱정이다.
우선은 깨어나느냐 마느냐가 가장 화급한 문제다.
고해진이 깨어나지 못하면 나머지 걱정은 굳이 할 필요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먼저 의료 소송에서는 제가 도울 부분이 확실히 있을 것 같습니다. 재수술을 하신 S대 병원 교수님의 소견서를 확인하고, 의료 사고가 확실하다면 제가 앞장서서 여론전을 펼치겠습니다. 제 이름이 가볍지 않으니 국민 여론을 식지 않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정말, 정말로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해진이 가족들도 그렇고, 저와 동료들도 한 원장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다만 고해진 씨의 상태에 대해서는… 직접 확인을 해본 다음에야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제 의술이 고해진 씨가 의식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될지 감히 확언을 하기 힘듭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더 고맙습니다. 막연한 기대감을 주는 것… 해진이의 가족들을 훨씬 힘들게 하는 일이니까요. 한 원장님의 태도에 신뢰가 갑니다.”
남궁훈은 거칠고 험한 연예계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티가 났다.
함부로 말을 앞세우지 않는 한지호의 모습에서 진정성을 읽어낸 것이다.
그래도 남궁훈 같은 친구가 있어서 참 다행스러운 것 같았다.
어려울 때 힘이 되는 친구야말로 진짜 친구다.
“그럼 기자들 눈을 피해 조용히 병실로 올라가보죠.”
“번거롭겠지만 비상구 계단을 이용하면 될 것 같습니다.”
“계단으로 걷는 거 아주 좋아합니다.”
한지호는 일부러 환하게 웃으며 계단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남궁훈에게서 작은 부담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비상구를 향해 움직였다.
한지호와 남궁훈은 불과 10분 남짓 대화를 나눈 것뿐이지만, 어느새 꽤 가까워진 것처럼 보였다.
아픔을 나누는 것만큼 빨리 친해지는 길이 또 없다.
나이와 직업을 넘어 고해진을 위해 마음을 하나로 모은 둘의 걸음에 속도가 붙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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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아, 부탁 하나만 하자. 그냥은 아니고 정확하게 페이를 해줄게.”
고해진이 입원해 있는 1인실 병실에 들어서기 전, 한지호는 조기운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궁훈은 잠깐 자리를 비운 고해진의 가족들을 부르러 갔다.
그 사이 해결해둘 문제가 있었다.
“형님,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떻게 형님께 돈을 받겠습니까.”
“페이는 무조건 챙겨줄 거고, 아무튼 너희 회사 직원들. 직접 훈련시킨 거지?”
“네! 제가 직접 훈련시킨 친구들이라 빠릿빠릿하고 쓸만 합니다.”
전화기 너머 조기운이 아주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는 한지호의 품에서 독립해 VIP 에스코트 회사를 창업했다.
경호원 업무뿐 아니라 VIP들의 사소한 요구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엘리트 에스코트 요원을 양성하고 파견하는 업체다.
조기운이 독립을 선언하고 나간지도 벌써 몇 달이 흘렀고, 그의 회사는 조금씩 자리를 잡으며 실적을 올리는 중이었다.
통역과 비서 업무, 포토그래퍼 역할까지 커버 가능한 조기운의 직원들은 분야별로 다양한 능력을 선보이며 VIP 고객을 만족시킨다.
그래서인지 벌써 HJ 에스코트라는 회사 이름이 입소문을 타고 있었다.
HJ 에스코트의 투자자이기도 한 한지호는 처음으로 조기운의 힘을 빌리려 했다.
“여기 S대 병원인데, 기자들이 너무 많이 상주하고 있다. 남궁훈 씨나 연예인 동료들, 그리고 고해진 씨 가족들이 병원 입구에 모습만 보여도 기자들이 따라붙어.”
“관련된 분들이 많이 피곤해 하시겠네요, 형님.”
“강제로 기자들을 쫓아낼 수는 없고, 똑똑하고 융통성 있는 직원들 데려다가 현장 정리 좀 했으면 해서.”
“무슨 말씀이신지 알 것 같습니다. 문제 일으키지 않고 자연스럽게 현장의 기자들을 막아서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요?”
“바로 그거야. 고해진 씨 가족과 동료들이 나타났을 때 기자들이 무리를 지어서 모이려고 하면 적당히 진로를 막고 통제를 하는 거지. 그 사이 가족과 동료들은 편하게 병실이나 병원 밖을 오가면 되고.”
“우선 현장 파악을 위해 5명을 시범적으로 보내겠습니다. 인원이 부족하면 곧바로 추가 배치하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나중에 비용 꼭 청구해라.”
“꼼꼼하게 처리하겠습니다, 형님.”
“조만간 청담동에서 보자.”
한지호는 자신의 빌라에서 조기운과 만날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끝내고 나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HJ 에스코트 직원들이 나서주면 고해진의 가족과 동료들은 한결 편하게 병원을 드나들 수 있게 된다.
한지호 자신도 S대 병원을 출입할 때 수월하게 이목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을 해서 멋지게 자리를 잡고 있는 조기운이 참 고맙고 믿음직스러웠다.
“오래 기다리셨지요.”
그때 잠시 자리를 비운 남궁훈이 돌아왔다.
그의 뒤에는 수척한 인상의 중년 여성이 서있었다.
누구인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고해진이 방송에 출연할 때마다 자랑을 하던 와이프가 분명했다.
한지호는 고개를 숙이며 고해진의 아내에게 인사를 했다.
“바쁘고 유명한 분이신데…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고해진의 아내는 마르고 갈라진 음성으로 고마움을 표현했다.
얼마나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지 그녀의 목소리만 들어도 알 것 같았다.
“그럼 들어가시죠.”
남궁훈이 앞장서서 1인실 문을 열었다.
꽤 넓은 병실 저편에 고해진이 누워 있었다.
여느 중환자들처럼 생명 유지장치를 많이 달고 있지도 않았다.
재수술 후 바이탈(vital)은 안정적이다.
한지호는 아주 천천히 고해진의 병상으로 다가갔다.
사춘기의 버팀목, 어린 시절의 영웅.
팍팍한 일상을 아름다운 음악으로 녹여준 고해진이 눈을 꼭 감고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확실히 안색이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의식불명의 상태로 계속 누워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일어날 것 같은데 현실은 냉엄하다.
한지호는 고개를 돌려 남궁훈과 고해진의 와이프를 쳐다봤다.
“제가 잠시 진맥을 해봐도 괜찮겠습니까?”
“그럼요. 물론입니다.”
남궁훈이 기다렸다는 듯 흔쾌히 대답했고, 고해진의 아내도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한지호가 본격적인 치료를 할 거라면 S대 병원의 의료진과 의논을 해야 한다.
하지만 진맥 정도는 굳이 알리지 않아도 상관없다.
한지호는 병상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힘없이 축 늘어진 고해진의 손목을 잡았다.
남궁훈은 눈을 반짝이며 한지호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고해진의 아내 역시 기대를 하는 게 분명했다.
그들의 마음을 모르지 않기에 한지호도 막중한 부담을 느꼈다.
두우웅- 두우웅-
맥은 예상했던 대로 아주 약하게 뛰고 있었다.
웬만한 실력의 한의사가 아니라면 맥박을 잡아내는 것조차 힘들지 모른다.
그러나 한지호는 평범한 한의사가 아니다.
의성(醫聖)의 현신이다.
‘이건…… 찾았다!’
한참동안 맥을 짚던 한지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고해진을 구할 해법을 찾아낸 것일까.
그의 이마 위로 한 줄기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