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
1장, 인간의 본능 (1)
헨리오에게 스위트 룸 카드 키를 미리 받아두길 천만다행이었다.
부리나케 리츠 칼튼으로 달려온 한지호는 번개처럼 움직였다.
스위트 룸 전용 엘리베이터에 타고, 원하는 층에서 내리자마자 한 달음에 복도를 가로질러 방문을 열었다.
“헨리오! 헨리오!”
한지호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스위트 룸 거실로 향했다.
세계적인 영화 음악의 거장 헨리오 무크를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가 넓은 소파에 반쯤 널부러져 골골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닥터 한…… 우욱-!”
그는 한지호를 보고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헛구역질을 했다.
이미 여러 번 구토를 해서 더 이상 게워낼 게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헛구역질을 할 정도면 이상 증세가 확실했다.
“이제 괜찮을 겁니다. 마음을 편하게 먹어요.”
급하게 말하느라 영어 발음이 뭉개졌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한지호는 헨리오를 바로 앉힌 다음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무리 위급한 비상 상황에서도 진맥은 필수다.
한의사라면 맥박을 통해 인체의 신비를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
어떠한 의료기구도 존재하지 않을 때부터 맨손으로 인간을 이해하고 연구해온 사람들이 바로 한의사다.
한지호는 맥을 짚는 자신의 능력을 믿었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겠어.’
속전속결로 진맥을 마친 한지호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위험한 상태는 아니다.
거듭된 구토는 일시적인 부작용일 따름이다.
이대로 오래 방치했다면 탈수, 탈진 등 심각한 문제가 생겼겠지만 자신이 왔으니 괜찮다.
그는 우선 너무 차갑지 않은 물을 따라서 헨리오에게 건넸다.
“넘어가지 않겠지만 마셔야 합니다. 내가 왔으니 다 괜찮아질 겁니다.”
“물을 마시면… 또 토해버릴 거요.”
“그래도 마셔야 됩니다. 몸에 수분이 부족해지면 진짜 심각한 문제가 터져요.”
“으읍…….”
헨리오는 괴로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한지호의 다그침에 억지로 물을 마셨다.
바싹 말라있던 입술에 물기가 감돌았다.
한지호는 헨리오가 생수 한 컵을 다 마시는 걸 본 다음 침을 꺼냈다.
“구토 증상부터 진정시키겠습니다. 중간에 속에서 뭔가 올라오거든 힘줘서 반항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세요.”
이제는 대답할 힘도 없는지 헨리오는 고개만 끄덕였다.
한지호는 그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 침을 놓았다.
다음에는 곡지혈을 깊이 찔렀다.
곡지혈은 팔을 접었을 때 겹치는 부분과 팔꿈치 사이에 있다.
위와 직접 연결되어 속을 안정시키는데 효과적인 혈도다.
그렇게 차례차례 내부를 진정시키는 혈도에 침을 놓았다.
어찌나 빠르게 침을 놓는지 누가 보면 깜짝 놀랄지 몰랐다.
작은 침도 아닌 장침을 혈도 깊이 찌르면서도 막힘이 없었다.
한지호를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야매로 아무렇게나 침을 놓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후우-.”
집중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려 침을 놓은 한지호가 깊은 숨을 내뱉었다.
그의 이마에서 어느새 한 줄기 굵은 땀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서두르며 리츠 칼튼 호텔까지 달려왔고, 도착하자마자 침술을 펼쳤으니 한지호의 체력이 소진될 법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잠깐 숨을 돌린 직후 환자인 헨리오 무크의 상태부터 면밀히 체크했다.
“좀 어떻습니까?”
“여전히 속이 울렁거리지만, 그래도 토할 것처럼 올라오지는 않아요.”
“다행이군요. 그럼 침을 꽂은 상태에서 물 한 컵만 더 마시죠.”
한지호는 침을 맞아 움직이기 힘든 헨리오를 대신해 물을 따랐다.
너무 차가운 물을 마시면 몸이 깜짝 놀라 이상 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다.
평소에서 냉수는 피하는 게 건강을 위해서 좋다.
찬물로 신체 내부의 온도가 내려가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헨리오는 한지호가 건네준 미지근한 물을 한 컵 더 마셨다.
토하지 않고 끝까지 물을 마시는 걸 보니 차츰차츰 진정이 된 것 같았다.
그의 몸에 놓은 침을 뽑으려면 10분이 더 지나야 한다.
일각, 15분 가량이 일반적으로 침술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시간이다.
한지호는 시계를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너무 놀랄 필요 없습니다. 심신불교 상태가 치료되며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멈추지 않고 계속됐던 구토가 치료 과정이란 말이요?”
“원래도 다양한 부작용과 합병증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그 일환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확실히 무기력증은 좀 가시고, 식욕도 많이 회복되는 중이었는데…….”
“질병은 사라지기 직전에 더 기승을 부립니다. 우리의 치료가 옳은 길로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한지호가 계속해서 헨리오를 다독거렸다.
확실하게 완치가 되기까지 또 어떤 부작용 증상이 나타날지 모른다.
그때 환자가 패닉 상태에 빠지지 않게 하려면 미리미리 안심을 시킬 필요가 있다.
“닥터 한이 가까이에 있어서 다행이요, 정말로.
“위급 상황이 발생하면 바이룽 부원장도 달려올 겁니다. 너무 걱정 할 필요 없습니다.”
한지호는 생각했던 것보다 헨리오의 징후가 양호하다고 판단했다.
태자병을 앓았던 황만금은 죽기 직전까지 내몰렸었고, 구음절맥을 타고난 김해수도 목숨이 위태로웠었다.
그에 비하면 헨리오 본인은 괴로울지 몰라도 주치의로서 위기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한지호는 수많은 희귀병 환자들을 치료하며 느낀 게 있었다.
바로 인간은 절대 쉽게 죽지 않는다는 점이다.
살고자 하는 본능은 그 무엇보다 강하다.
헨리오의 경우 목숨과 비교할 수 있는 남자의 본능이 걸린 문제이고, 약재를 이용한 치료는 궤도에 올랐다.
교류가 원활하지 못했던 심장과 신장이 다시 연결되며 자잘한 거부 반응이 튀어나오겠지만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이제 다시 침을 뽑겠습니다.”
“속이 좀 나아진 것 같긴 해요, 닥터 한.”
“괜찮을 거라고 했죠?”
“그래요. 하지만 언제 또 무슨 일이 생길까봐 혼자 있는 시간이 두려워지니……. 이 나이에 참 부끄러운 일이요.”
헨리오의 자조적인 말에 한지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헨리오 무크의 푸른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병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살고자 하는 의지, 낫겠다는 의지도 인간의 본능이지만 아픈 것을 두려워하는 것 역시 본능이니까요. 의사라고 해서 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탓하지 마세요.”
가식이 섞이지 않은, 진심을 있는 그대로 내던지는 한지호 특유의 위로가 헨리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누구든 환자가 되면 몸이 아픈 것뿐 아니라 마음도 아프게 된다.
손가락 끝이 살짝만 베여도 온갖 호들갑을 떠는 게 인지상정이다.
몸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질병을 얻으면 성인군자라고 해도 어린 아이처럼 약한 마음을 먹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좋은 의사는 몸과 함께 마음도 치료해야 하는 것이다.
몸을 치료하는 게 마음을 치료하는 것이고, 또 마음을 치료하는 게 몸을 치료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모른다면 의사가 아닌 의료 기술자에 지나지 않는다.
예기치 못한 사고가 터진 밤, 한지호는 진정한 의사란 어떤 존재인지 보여주며 거장을 진정시켰다.
이렇게 또 하루의 시간이 역사 속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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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호가 특별한 방식으로 처방한 약은 확실히 효과를 내고 있었다.
환자인 헨리오 무크 스스로 효능을 체험할 정도였다.
고작 3주가 흘렀지만 그는 눈에 띄게 살이 붙었다.
식욕이 회복되어 평소보다 식사량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그는 무기력증이 심했고, 볼품없이 말라붙은 몸으로 휘적휘적 걸어 다녔다.
하지만 요즘은 달랐다.
홍콩의 맛집들을 섭렵하고 다니며 정상 체중을 회복해 외모도 훨씬 보기 좋아졌다.
아직 성 기능 장애는 완전히 개선되지 않았지만 사람이 사람다워진 것이다.
생기(生氣)를 회복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수확이었다.
치료 과정에서 불규칙적으로 발생하는 부작용은 한지호와 바이룽이 번갈아가며 관리했다.
급작스러운 구토 증상이나 빈혈, 어지러움 등은 그동안 막혀있었던 심장과 신장의 기능이 소통하며 생긴 일시적 증상이다.
제때 조치를 할 수만 있다면 큰 문제는 아니다.
한지호는 머지않아 헨리오의 성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했다.
까다로운 치료였지만, 그는 분명한 원인과 해법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껏 헨리오를 치료한 세계적인 명성의 의사들이 무능한 것은 아니다.
다만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가 다른 것뿐이다.
심신불교라는 한의학적 진단을 내리고, 체질에 맞는 약재를 선별하여 성 기능 장애의 근본 원인을 치료하는 게 한지호의 전공이다.
대신 한지호도 심각한 외과적 증상, 이를테면 뼈가 부러지고 수십 바늘을 꿰매야 할 정도로 피부가 찢어진 상처에는 현대의사들 만큼 원활하게 대처하지 못한다.
전통 의학과 현대 의학이 서로 적대할 이유는 없다.
각자의 장점을 발전시켜 환자를 치료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힘쓰는 것, 그게 분야를 막론하고 의사가 가져야 할 기본 자세다.
홍콩에서 한 시름을 놓고 서울로 돌아온 한지호는 K-메디컬 타운 입주와 관련된 실무에 전력을 다했다.
물론 낮 시간은 서울에서 그를 기다리는 VIP와 환자들에게 온전히 할애해야만 했다.
하지만 서울의 밤은 길고, 낮보다 더 다양한 일들이 펼쳐진다.
진료를 마친 저녁, 역삼동 M 타워 건물에서 한지호의 하얀 벤틀리 컨티넨탈 쿠페가 미끄러져 나왔다.
그가 운전대를 잡고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평창동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큰손이라 불리는 황만금 회장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한남대교를 타고 강북으로 넘어가 평창동 언덕에 다다른 한지호는 골목길에 차를 세웠다.
그의 하얀색 벤틀리는 대저택이 즐비한 평창동 주택가와 제법 잘 어울렸다.
“예전에는 참 커보였는데.”
차에서 내린 한지호가 혼잣말을 읊조렸다.
처음 평창동에 왔을 때는 대한민국에 이렇게 큰 저택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평창동의 저택들도 익숙해졌다.
한지호의 눈높이가 올라갔고, 원한다면 언제든 이런 저택을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K-메디컬 타운의 실무가 마무리되면 한지호는 신사동 오피스텔 아파트를 떠나 청담동의 고급 빌라로 이사를 갈 예정이다.
연예인과 재벌 2세들이 주로 거주하는 청담동 고급 빌라의 가격은 평창동의 저택과 맞먹는다.
대중교통을 타고 평창동에 도착해서 감탄을 늘어놓던 한지호가 불과 몇 년 사이 한의학계 최고의 거물이 된 것이다.
딩동-
한지호는 감상을 접어두고 벨을 눌렀다.
곧이어 별다른 확인 절차 없이 커다란 대문이 열렸다.
대문에서 정원으로 연결 된 계단을 오르는 것도 몇 달만인 것 같았다.
저택 입구에는 언제나처럼 집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원장님.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잘 지내셨죠?”
“네, 덕분에.”
한지호는 집사의 안내를 받아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새삼 처음엔 싸늘한 태도를 보였던 집사를 완전히 감동시킨 기억이 솔솔 났다.
이러나 저러나 황만금의 태자병을 치료한 것은 한지호의 인생을 바꾼 전환점이었다.
“회장님께서는 2층 서재에 계십니다.”
“혼자 올라갈게요.”
한지호는 저택 안에서 더 이상의 안내를 사양했다.
황만금이 주로 시간을 보내는 2층의 서재는 아무리 오랜만에 왔어도 익숙했다.
항상 그곳에서 황만금의 태자병을 치료했었기 때문이다.
똑똑-
“들어오게.”
서재 문 앞에서 한지호가 노크를 하자 황만금의 음성이 들렸다.
한지호는 문을 열고 들어서며 미소를 지었다.
“회장님.”
“참으로 오랜만이네, 오랜만이야.”
“그간 격조했습니다. 건강은 괜찮으시죠?”
“태자병을 치료한 이후 몸이 전보다 더 좋아졌어. 큰 병 앓은 다음에는 잡병은 얼씬도 안 한다는 옛말이 맞는 모양이지.”
“회장님께서 제 말대로 관리를 철저히 하셨기 때문입니다. 안색은 아주 좋아 보이십니다.”
“그런가? 허허허허.”
안색이 좋다는 말은 흔한 인사말이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한의사 입에서 나오면 단순한 덕담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한지호는 황만금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자연스럽게 자리를 정해도 될 만큼 둘은 가까운 사이다.
“그래, 오늘은 무슨 일인가. 며칠 전 연락을 받고 싱숭생숭 했었네.”
“회장님, 일전에 제게 투자하신 10억 원. 예상하셨던 것보다 훨씬 빨리 갚았습니다.”
“그랬지. 그렇게 빨리 갚아버릴 줄은 몰랐네. 이제는 10억이 뭔가? 강남과 홍콩에서 돈을 긁어모으고 있고, 듣자하니 김포에 들어서는 의료 단지에도 입주하게 됐다면서?”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한지호는 중언부언 말을 돌리지 않았다.
땡전 한 푼 없던 시절, 의술 하나로 황만금과 인연을 맺었다.
그렇기에 속마음을 아무렇지 않게 터놓는 것이 가능했다.
“영종도 블랙문 카지노에 투자했던 금액을 회수해서 100억을 확보했습니다.”
“원금 50억을 투자하지 않았었나? 단기간에 2배를 불리다니, 역시 대단한 수완일세. 헌데 그 100억으로 뭘 하려는 겐가?”
“100억으로는 부족합니다. 회장님께서 100억을 더 빌려주시면 200억으로 역사에 남을 일을 해보겠습니다.”
본론이 나왔다.
10억이 아닌 100억.
황만금이 아무리 현금 부자라도 100억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니다.
하지만 한지호의 태도는 당당했다.
마치 맡겨놓은 돈을 찾으러 온 사람 같았다.
황만금도 인물은 인물이었다.
그는 갑자기 100억을 내놓으라는 한지호를 바라보며 화를 내는 대신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허허허허! 먼저 이야기부터 들어보지. 200억으로 무슨 재미난 그림을 그리려는 것인가?”
막간 외전(幕間 外傳)
- 장판파의 작은 복수
조조의 머리를 열겠다고 말한 화타가 죽었다.
신묘한 의술로 천하를 놀라게 했던 그의 죽음은 군주와 장수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됐다.
거친 난세를 살아가느라 피도 눈물도 다 말랐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화타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그가 민초들에게 베풀었던 선행을 생각하면 더더욱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누가 감히 조조를 향해 손가락질을 할 수 있겠는가.
전란의 시대, 각자의 목숨은 알아서 챙겨야 하는 법이다.
두두두두두두- 두두두두두두-
여기 이곳에서도 각자도생 적자생존의 참화가 펼쳐지고 있었다.
수를 헤아리기 힘든 민초들이 봇짐을 얹고 황야를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아비는 짐을 들면서 노모의 손을 잡았고, 어미는 아이들을 등에 업었다.
내리쬐는 태양 때문에 한 걸음도 떼기 힘들었지만 잠시도 쉴 수 없다.
행군 속도를 맞추지 못하고 뒤처지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조가 민초들을 붙잡기 위해 10만 대군을 풀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잡히면 죽는다.
절체절명의 위기감이 민초들을 채찍질 하고 있었다.
조조가 누구던가.
서주자사 도겸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이유로 죄 없는 서주의 백성들을 학살한 효웅이다.
그가 조조의 울타리를 벗어나 유비를 따라나선 민초들을 가만히 놔 둘 것 같지 않았다.
민초들만큼 선두에서 얼마 안 되는 병력을 이끄는 유비도 입이 바싹 마르긴 마찬가지였다.
지금이야 거리를 벌렸지만, 조조군이 정식으로 출정을 하면 금방 따라잡힐 것이다.
특히 조조의 왼팔 하후연은 천하에서 제일가는 군보(軍步)의 달인이다.
만약 그가 조조군을 이끌면 기껏 벌린 거리는 하루만에 따라잡히고도 남는다.
게다가 뒤를 따르는 민초들의 행군 속도는 유비군의 병사들을 따라오지 못한다.
그렇다고 민초들을 버린 채 병사들만 이끌고 도망을 간다면 어렵게 지켜온 영웅의 칭호는 바닥에 떨어져 더렵혀질 것이다.
그야말로 진퇴양난, 사면초가의 처지다.
이럴 때 목숨을 걸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하지만 약체 유비군에게도 천하에 내세울 수 있는 장점 두 가지가 있었다.
첫 째는 신야에서부터 백성들이 따라붙을 정도로 높은 인덕이었고, 둘 째는 범 같은 장수들이다.
병력은 적어도 인덕과 인복이 넘치기에 누구도 유비를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 도원결의를 맺은 유관장 삼형제의 막내 장비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맹장(猛將)이다.
그가 고작 20여기의 병력을 이끌고 후군으로 나섰다.
유비군 본대와 백성들이 조조군에게 붙잡히지 않도록 시간을 벌기 위해서다.
물론 제 아무리 대단한 장비라고 해도 소수의 후군으로 10만 대군의 진격을 막아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때로는 불가능한 일에 몸을 던져야 할 순간도 있다.
게다가 유비의 책사 제갈량은 장비에게 남다른 비책을 알려주었다.
장비는 바로 그 비책을 찾아 힘들게 걸어가는 백성들 사이로 말을 몰았다.
“자네가 규호인가-!”
우렁찬 목소리였다.
짐승이 포효하는 듯한 외침에 수백 명의 백성들이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꾸역꾸역 유비군 본대를 쫓아 행군하는 중에도 시선을 뺏길 만큼 장비의 존재감은 특출 났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장비의 부름을 받은 남자는 천하에 위명이 쟁쟁한 장수를 옆집 어린아이 바라보듯 무심하게 쳐다봤다.
“무슨 일이오?”
깊고 검은 눈동자가 장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낡은 옷을 입은 젊은 사내는 사나운 눈매와 우뚝 솟은 콧날, 다부진 입술을 지니고 있었다.
천하에 무서울 게 없다는 장비마저 사내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랐다.
“화타의 제자, 규호가 맞나? 시급한 일이니 빨리 답을 하라!”
“이 몸이 규호가 맞소. 허나 진정 시급한 것은 행군에 지친 백성들을 돌보는 일이오!”
규호는 오히려 장비에게 호통을 쳤다.
그의 주위에 있던 민초들이 화들짝 겁을 먹고 어깨를 움츠렸다.
불같은 성정으로 유명한 장비에게 대들었으니 무슨 일이 터져도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장비의 반응은 험악하지 않았다.
“커허허허! 과연 공명의 말대로 일국의 장수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백이로군. 좋다, 규호! 내 원하는 바를 말하겠다!”
“원하는 게 무엇이오?”
“장판파에서 조조군을 막아서야 한다. 공명이 그대라면 능히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하더군. 내게 도움을 주겠나?”
“유비가 마음을 독하게 먹고 형주를 접수했다면 백성들이 이토록 고통스럽게 행군할 필요도 없었소. 그런데 이제 와서 도와 달라?”
규호가 민감한 구석을 찔렀다.
그는 화타가 죽은 후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고 천하를 떠돌았다.
전란의 현장에서 민초들을 돌보는데 목숨을 걸었다.
그렇기에 어느 군주, 어느 장수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다.
장비는 규호의 태도가 마음에 드는 듯 문제를 삼지 않았다.
대신 부리부리한 눈을 빛내며 진솔한 속내를 터놓았다.
“신야에서 따라온 민초들을 조조군에게 내어줄 수는 없지 않나. 자네 또한 조조에게 스승을 잃은 원한이 있을 터, 백성들을 돌아보고 힘을 보태 주게.”
“…….”
고민은 깊었지만 길지 않았다.
시간을 끌 여유가 없다는 것을 규호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에서 내리시오.”
투다닥-
규호의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장비가 말에서 뛰어내렸다.
육중한 거구가 성큼성큼 규호 앞으로 다가왔다.
장비는 가까이서 보니 그야말로 압도적인 무용을 뽐내는 거한이었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백성들은 느리게 느리게 걸어가고 있었다.
이들을 사나운 조조군의 먹잇감으로 내줄 수는 없다.
규호는 품에서 침을 꺼냈다.
“혈도를 자극해 내공을 격발시키겠소. 앞으로 하루 동안 그대는 여포 봉선이 와도 한 손으로 가뿐히 막아낼 장수가 될 수 있소. 허나 하루가 지나면… 며칠은 골골 거리며 고생 꽤내 해야 할 것이오.”
“커허허허- 여봉선을 한 손으로 막아낸다? 이보다 좋을 수 없군. 후유증이야 내가 감내할 터이니 어서 침을 놓게!”
“그럼.”
규호는 거침없는 손길로 장비의 몸에 침을 꽂았다.
울퉁불퉁한 근육질 육체의 틈을 파고들어 정확히 혈도를 자극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화타의 의술을 계승하다 못해 넘어선 규호에게는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이었다.
“끝났소.”
“단전에서…… 뜨거운 기운이 용솟음을 치는구만!”
규호가 직접 침을 거둬들였다.
장비의 눈동자에 불꽃이 이글거리는 것 같았다.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가뜩이나 강렬한 장비의 위용이 증폭된 게 확실했다.
“이 은혜, 언젠가 꼭 갚고 말겠다!”
“은혜는 됐고, 하나만 묻겠소. 장판파의 다리는 어찌 할 생각이오?”
“공명이 말하기를 장판교는 남겨두는 게 좋다더군. 그래야 조조가 매복을 두려워 해 우리를 쫓지 않을 것이라고 했네.”
“아니오. 장판교를 끊으시오.”
“공명의 계략이 틀렸다는 것인가?”
“조조와 그 책사들은 두 시진이면 매복이 없음을 알아낼 것이오. 허나 다리를 복구해 강을 건너는데 반나절이 걸릴 터, 장판교를 끊어야 시간을 더 벌 수 있소.”
“자네의 조언, 깊이 새겨두마.”
장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에 올라탔다.
그는 20기도 안 되는 별동대를 이끌고 후군으로 달려가 장판교에서 10만 대군을 막아낼 것이다.
장비 익덕이 아니면 누구도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다.
그가 고삐를 잡고 말을 몰기 직전, 규호를 돌아봤다.
“민초들이 지치지 않도록 잘 부탁하겠네, 의성!”
“무운을 빌겠소, 익덕.”
의성 규호와 장비 익덕이 아주 짧게 교차한 지점이었다.
이들의 만남이 역사의 소용돌이를 바꿨다는 것을 누가 기억할까.
규호는 흙먼지를 휘날리며 멀어지는 장비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불굴의 의지로 조조에게 수치를 안겨주시오.”
그의 바람이 전해진 것일까.
천하에 두고두고 회자 될 장판파의 전설이 태어났다.
규호의 침술 덕분에 장비는 10만 대군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을 기운을 얻었다.
그는 단기필마로 장판교에 서서 조조의 대군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나는 장익덕이다. 누가 나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겠는가!”
서슬퍼런 호령에 누구도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조조 휘하의 유명한 장수들도 선뜻 장판교로 올라가 일기토를 벌일 수 없었다.
장비의 외침에 모골이 송연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장비는 10만 병력의 진군을 막아 세웠고, 규호의 조언대로 장판교를 불태워 시간을 벌었다.
그로인해 조조는 또 한 번 다잡은 유비를 놓치게 됐고, 향후 적벽대전에서 뼈아픈 일격을 당하게 될 여지를 허락하고 말았다.
조조가 화타를 죽이지 않았다면, 스승을 잃은 규호가 천하를 떠돌다 장비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조조군은 도망치는 유비를 손쉽게 붙잡았을 것이다.
적벽대전에서 역사적인 대패를 하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아주 작은 사건이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좌우하는 법.
그렇기 때문에 주어진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매사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나비의 날갯짓이 폭풍을 불어오는 것처럼 오늘의 노력이 어떤 열매를 맺을지 알 수 없다.
다만 역사는 도도하게 흘러갈 따름이고, 인간은 끊임없이 천하에 도전하며 역사의 일부가 된다.
그 가운데 의미 없는 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