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10장, 남자 (2)
“닥터 한, 내 모든 것을 맡기겠다고 했지만…… 이거 정말 맞는 방법이지요?”
헨리오 무크가 의심스런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는 불과 몇 분 전에 한지호의 설명을 듣고 완전한 신뢰를 표현했었다.
그런데 금방 또 난감한 기색을 드러낸 것이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인간은 원래 끝없이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존재다.
그런 특성이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 지구라는 행성을 지배하게 했다.
한지호는 별 거 아니라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시범을 보여줬다.
“이 약재, 양기를 일으키는데 탁월한 녹용으로 만든 환단입니다.”
“사슴의 뿔이요?”
“그렇습니다. 사슴 뿔에서도 가장 윗부분, 중대나 상대보다 몇 배 더 비싼 분골로 만든 환단이죠.”
한지호는 왼손에 잡은 환단을 헨리오의 왼쪽 가슴에 갖다 붙였다.
녹용의 분골로 만든 약재와 헨리오의 심장이 가까워진 것이다.
그 상태에서 한지호가 오른손을 움직였다.
푸욱-
한지호의 검지가 헨리오의 단전을 찔렀다.
손가락으로 살짝 아랫배를 누른 것뿐이다.
“흐읍!”
그런데 헨리오가 숨을 집어삼키며 아픈 티를 냈다.
“아프죠?”
“순간적으로 따끔 했어요. 닥터 한이 힘을 준 것인지……?”
“아닙니다. 평범하게 찔렀을 뿐입니다. 그럼 다음 약재를 테스트 해보겠습니다.”
한지호는 왼손에 쥐고 있던 녹용 분골 환단을 내려놓았다.
그 다음 테이블에 진열된 약재 중 다른 환단을 집었다.
“그건 무엇인가요?”
“인삼입니다.”
“오오! 고려인삼?”
“맞습니다. 유명하긴 유명한가 보군요.”
한지호는 고려인삼이라는 어려운 발음을 썩 잘 해낸 헨리오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헐리우드의 거장도 알고 있을 만큼 한국 인삼의 브랜드 파워는 대단했다.
문제는 우리나라 정부가 인삼처럼 좋은 상품을 홍보하고 세계적인 유행으로 만들어낼 역량이 없다는 것이다.
처억-
이번에도 한지호는 인삼으로 만든 환단을 왼손에 쥐고 헨리오의 가슴에 붙였다.
약재의 성분만 녹용 분골에서 인삼으로 바뀌었을 뿐, 똑같은 행동이었다.
헨리오도 곧이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눈치챘다.
검지를 세운 한지호가 방금 전처럼 헨리오의 단전을 살짝 찔렀다.
푸욱!
정확히 같은 힘, 같은 속도로 아랫배를 찌른 것이다.
그런데 헨리오의 반응은 이전과 너무 달랐다.
녹용 분골을 가슴에 붙인 상태에서 단전을 찔렸을 땐 호들갑이다 싶을 만큼 아파했었는데 지금은 눈만 깜박였다.
그도 스스로 이해되지 않는지 한지호를 빤히 쳐다봤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해달라는 눈빛이었다.
“헨리오의 몸에 인삼이 더 잘 맞는 겁니다.”
“하…… 이거 참, 분명히 닥터 한이 힘을 더 주지는 않은 것 같았는데.”
“똑같은 힘으로 찔렀습니다. 하지만 느껴지는 고통은 달랐겠죠.”
“그래요, 이상할 정도로 달랐어요. 처음에는 찌릿하고 아팠는데 지금은 그냥 가볍게 누르는 느낌밖에 없었어요.”
“왜 그런 것 같습니까?”
“글쎄…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헨리오의 몸이 안 좋아진 근본적인 원인이 심신불교라고 했을 겁니다. 심장과 신장이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죠. 꼭 그렇지 않더라도 심장에 약재를 가져가면 몸이 반응을 합니다. 이 약재가 내 체질과 어울리는 것인지 아닌지 몸은 거짓말을 못 해요.”
“역시 동양의 전통의학은 심오하네요.”
“심오하지만 분명한 원리를 가지고 있죠. 단전은 인체의 중심이자 모든 기운이 모이는 곳입니다. 내게 맞는 약재를 붙이고 단전을 누르면 아무렇지 않지만, 체질이 거부하는 약재를 붙이면 똑같은 힘으로 눌러도 단전에서 고통이 퍼집니다. 몸이 주인에게 말을 해주는 겁니다, 이 약재는 나와 어울리지 않으니 먹지 말라고.”
믿기 힘든 말이지만 직접 체험한 이상 멍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성 기능 장애와 다른 부작용의 본질적인 원인을 설명할 때부터 한지호의 말은 청산유수였다.
한지호는 인삼으로 만든 환단을 테이블 구석에 따로 빼놓았다.
헨리오의 체질에 맞는다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양기를 일으키는 약재로는 녹용보다 인삼이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심장의 화기를 다스려야 하고, 신장을 활성화시켜 두 장기가 서로 소통하게끔 도와주는 약재도 같이 써야 합니다.”
“그 약재들도 이 방법으로 찾아내면 되는 거지요? 참으로 신기해요.”
“약도 중요하고, 침과 시술도 중요하지만 마음을 편히 먹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알겠어요, 닥터 한. 일단 앞으로 한 달은 홍콩에서만 있을 예정이니 조급해 하지 않도록 하지요.”
“좋습니다. 그럼 계속 하죠.”
한지호는 다시 다른 약재를 집어들었다.
그는 금링링과 함께 헨리오를 처음 만났을 때 진맥을 했었다.
그렇기에 한국에서 필요한 약재들을 환단으로 만들어 준비해온 것이다.
사실 약재든 환단이든 해외에서 중국으로 반입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추위안차오라는 막강한 권력자로부터 생명의 은인 대접을 받는 한지호에게 중국 공안들은 껌뻑 죽어나갔다.
공항에서도 X-ray만 통과하고 나면 감히 그의 짐을 따로 건드리고 확인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수월하게 헨리오의 체질에 맞는 약재를 체크 할 수 있는 것이다.
꾸욱-
“읍!”
“이건 좀 아팠나보군요.”
계속해서 한지호가 신비한 방법으로 다양한 약재를 테스트했다.
헨리오는 이제 의심의 여지없이 대한민국, 아니 세계 최고의 한의사에게 빠져들었다.
영화 음악의 전설을 남자로 되살리기 위한 치료가 탄력을 받기 시작한 것 같았다.
+++
타닥, 타다닥!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적막을 깨웠다.
어두운 밤, 한지호는 리펄스 베이의 레지던시 아파트에서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환자를 진료하는 것만이 그의 일은 아니다.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미래를 위해 비전을 제시하고, 꿈을 현실로 구체화시키는 것 또한 한지호의 몫이다.
“중국 관광객들이 메인 타겟이라면 가격을 너무 높게 책정하는 건 위험해. 우리 네트워크의 부원장들이 경험을 쌓으며 실적을 올릴 수 있는 계기로 만드는 게 낫겠어.”
한지호는 다름 아닌 K-메디컬 타운 계획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이미 부지를 매입했고, 대규모 의료 타운 조성을 위해 공사를 시작했다.
내년이면 김포 한강 신도시에 K-메디컬 타운이 들어설 것이다.
한지호가 이끄는 원화 정의 네트워크는 한방 의료 기관으로 유일하게 입주를 확정지었다.
네트워크의 다른 원장들과 총괄 이사 박우식도 K-메디컬 타운 입주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다.
하지만 역시 최종 결재는 한지호가 내려줘야 한다.
그는 정부 쪽 관계자와 수시로 메일을 주고받으며 계획을 수정하고, 또 수정했다.
“일단 이렇게 보내자!”
서류를 다 정리한 한지호가 전송 버튼을 눌렀다.
정부 담당자에게 메일을 보낸 것이다.
그는 원화 정의 네트워크에서 공동으로 키우고 있는 부원장들을 K-메디컬 타운에 적극 기용할 생각이었다.
부원장들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고, 중국 환자들은 적정한 가격에 양질의 한방 의료 서비스를 체험할 수 있다.
추가 진료나 더 고급스러운 서비스를 원하는 환자들은 자연스레 수도권 각지의 원화 정의 네트워크 한의원으로 찾아올 것이다.
한지호는 K-메디컬 타운으로 엄청난 수익을 거두는 것을 목표 삼지 않았다.
어차피 정부의 투자 지원금과 세제 혜택만으로 막대한 이득을 볼 수 있다.
그래서 K-메디컬 타운은 부원장 레벨의 인재를 육성하고, 해외 관광객들에게 한방 의료 서비스를 소개하는 관문으로 설정하려는 구상이었다.
“으아- 벌써 2시네.”
한지호는 눈을 문지르며 시간을 확인했다.
홍콩 원화 한의원에서 진료를 끝내고, 간단하게 저녁을 먹은 뒤 헨리오 무크를 만나러 리츠 칼튼에 다녀왔다.
그리고 계속 서류 작업에 몇 시간이나 집중했다.
내일도 아침부터 진료가 있으니 얼른 눈을 붙여야 될 것 같았다.
오금희 내공을 이용한 운기조식이 아무리 피로회복에 좋아도 잠보다 나은 보약은 없다.
“양치만 하고 자야지.”
자리에서 일어난 한지호가 욕실로 걸어갔다.
피곤하긴 했지만 기분은 개운했다.
홍콩 현지 환자들이 서울을 위협할 수준으로 늘어났고, 지난주부터 치료를 시작한 헨리오의 상태도 안정적이었다.
게다가 정부에 보낼 서류 작업까지 끝냈으니 속이 시원했다.
우우웅- 우우웅- 우우웅-
한지호가 막 욕실에 들어서 칫솔을 잡으려는 찰나, 책상 위의 폰이 요란스럽게 진동했다.
조용한 밤이어서 그런지 진동 소리가 유달리 더 크게 들렸다.
“뭐지, 이 시간에.”
한지호는 칫솔을 내려놓고 욕실에서 나왔다.
방금 전 확인한 시간은 새벽 2시였다.
서울도 아니고 홍콩에서 새벽 2시에 그를 찾을 사람은 많지 않다.
누가 무슨 이유로 건 전화일지 짐작도 안 됐다.
“헨리오?”
스마트 폰 액정 화면에는 헨리오 무크의 이름이 떠있었다.
개인 번호를 교환했지만, 그는 이제껏 한 번도 전화를 건 적이 없었다.
더구나 오늘 저녁에 리츠 칼튼 스위트 룸에서 진료를 하며 상태를 체크했다.
일주일 동안 약을 먹고 치료를 받은 것치곤 몸의 내기(內氣)가 많이 좋아져 있었다.
그렇지만 드라마틱한 변화를 체감하긴 아직 일렀다.
그런데 왜 뜬금없이 새벽 2시에 첫 전화를 한 것일까.
한지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폰을 들었다.
예감이 썩 좋지 않았다.
“여보세요.”
“닥터 한!”
“왜 그래요?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또 다시 부작용이…….”
“저녁까진 컨디션이 아주 좋았잖아요. 갑자기 어떤 부작용이 생겼죠?”
한지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분명 헨리오의 체질에 맞춰 지은 한약은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양기를 보태면서 심장의 화기가 날뛰지 않게 조절했고, 신장의 기운도 살아나고 있는 걸 진맥으로 확인했다.
이렇게 몇 시간 사이에 부작용이 나타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 했었다.
그러나 한지호보다 더 당황한 건 헨리오다.
그가 마치 2주 전처럼 맥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구토가 멈추지 않아요.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 했으나… 20분 간격으로 계속 구토를, 쿨럭! 먹은 것도 없는데 말이지요.”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억지로라도 물을 많이 마시면서 기다리세요.”
“알겠……어요.”
헨리오의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그는 가뜩이나 기력이 없고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않는다.
체력이 좋은 사람도 20분마다 구토를 하면 탈진하게 될 것이다.
일주일 동안 상태가 호전됐어도 버티기 힘들지 모른다.
왜, 어째서 다시 부작용이 도졌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외투를 챙긴 한지호는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부리나케 뛰었다.
‘고비가 하나씩 오는군!’
헨리오의 경우 성 기능 장애를 일으킨 심신불교 상태가 갖은 부작용을 불러왔었다.
치료를 하는 과정이지만 또 다른 뇌관이 터진 셈이다.
근본 원인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부작용을 하나 하나 다스릴 수밖에 없다.
‘탈진, 탈수. 이 두 가지가 제일 걱정되는데…….’
엘리베이터에 탄 한지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리츠 칼튼까지 가려면 30분은 족히 걸린다.
만약 헨리오가 탈수증을 동반한 탈진에 빠지면 어이없이 심각한 문제로 번질 것이다.
한지호의 마음이 점점 급해지고 있었다.
- 9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