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85화 (185/255)

# 185

8장, 파워 게임(power game) (2)

한지호는 인천시 경제부시장 백성필과 통화하며 힘을 모아줄 것을 부탁했다.

동시에 조준혁이 어떤 카드를 준비하고 있는지도 어렴풋하게 알게 됐다.

그는 민시헌이라는 거물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야당 정치인이긴 해도 민시헌은 실세 중의 실세다.

차기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이니 인맥과 권력 또한 막강할 수밖에 없다.

그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조준혁을 도와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물론 한지호를 돕기 위해 뛰는 사람들의 면면도 대단하다.

하지만 그들은 기회가 왔을 때 우호적인 액션을 취할 뿐이다.

자기 일처럼 적극적으로 나서서 한지호의 일을 해줄 사람은 드물다.

그러기엔 다들 너무 바쁘고 대단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민시헌은 독특한 입장에 처해있다.

그는 한지호와 악연이 있고, 앙심을 품었을 가능성이 높다.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서건 조준혁이 어떻게 구워삶았건 민시헌이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플레이어로 나서면 여파가 상당히 클 것이다.

정계와 재계 인사들을 더 많이 확보하는 머릿수 싸움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똑, 똑, 똑-

한지호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깊은 고민에 빠져 정신을 집중할 때 나타나는 습관 중 하나였다.

“민시헌 하나만 믿지는 않을 텐데……. 조준혁, 무엇을 노리는 거지?”

한지호는 조준혁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마무리가 가장 어려운 법이다.

조준혁이라는 호랑이의 숨통을 거의 다 끊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발악이 심상치 않다.

상대의 패를 모르니 확실한 대비책을 세우기도 어려웠다.

“원장님, 다음 환자분 모실게요.”

그때 인터폰을 통해 간호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지호는 조준혁과 K-메디컬 타운에 대한 생각을 억지로 묻어뒀다.

당장은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에 전념해야 한다.

아무리 큰 국책 사업이 중요하고, 파워 게임에 피가 말라도 환자를 도외시 할 수는 없다.

눈앞의 환자를 정성껏 치료하는 것이 한지호가 추구하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들여보내주세요.”

목소리를 가다듬은 한지호가 간호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하루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진료가 끝난 후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대책 마련에 돌입하면 된다.

그는 K-메디컬 타운이 걸린 상황에서도 평상심을 잃지 않았다.

사업가 이전에 한의사.

이러한 본분을 잊지 않는 이상 한지호가 세상 풍파에 휩쓸릴 일은 없어 보였다.

+++

홍콩에서 이틀을 보냈다.

하루만 더 지나면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

한지호는 홍콩에 오기 전까지 서울에서 자기 사람들을 든든하게 다져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여전히 조준혁의 노림수를 100%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시헌을 적극적인 참가자로 만든 그가 또 무슨 계략을 꾸미는지 모른다.

한지호는 먼저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상대의 카드를 확인할 수 없다면,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선제조치를 취하는 게 최선이다.

그는 확실히 군략(軍略)을 알고 있었다.

전생의 규호가 천하를 떠돌며 직접 목격한 병법과 전략이 머릿속에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다.

적의 동태를 알지 못할 때는 언제나 최악을 대비하라.

한지호는 전생의 기억에서 배운 그대로 행동했다.

진료를 마친 그는 홍콩 최고의 호텔로 손꼽히는 리츠 칼튼에 다다랐다.

홍콩의 마천루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리츠 칼튼은 로비부터 호화롭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한지호는 다른 곳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익숙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탔고, 미리 받아놓은 호텔 카드를 이용해 스위트 룸이 있는 층에 내렸다.

홍콩 리츠 칼튼 호텔의 스위트 룸이라면 100% 보안을 유지할 수 있다.

스위트 룸 전용 카드가 없이는 해당 층에 내리는 것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저벅저벅-

한지호는 대리석과 크리스탈 샹들리에로 장식된 복도를 거침 없이 걸어갔다.

복도마저 때깔이 달랐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곧이어 그는 카드를 꺼내 굳게 닫힌 문제 가져갔다.

띠리릭!

짧은 전자음이 울리고, 일반 객실보다 두 배는 더 커다란 스위트 룸의 문이 좌우로 활짝 열렸다.

“기다리고 있었네.”

문이 열리자마자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한지호는 드넓은 공간에서 홍콩의 빌딩을 내려 보며 서있는 남자를 확인했다.

탁 트인 전면유리 아래로 펼쳐진 홍콩 도심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먼저 스위트 룸에서 한지호를 기다리던 남자가 마치 홍콩을 다스리는 것처럼 보였다.

한지호는 그에게 다가가며 한동안 수없이 불렀던 이름을 다시 꺼냈다.

“추위안차오 조직부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 선생은 얼굴이 더 좋아진 것 같아.”

리츠 칼튼 스위트 룸을 접선 장소로 선택한 사람은 다름 아닌 추위안차오였다.

중국 공산당 중악조직부장이자 차기 상무위원 1순위에 해당되는 국제적인 거물.

한지호 덕분에 몸 안의 독을 제거하고 목숨을 구한 그가 사뭇 건강해진 모습으로 서있었다.

꽈악-!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눴다.

포옹도 아닌 악수에 불과하지만, 말로 전할 수 없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안색이 밝으십니다.”

“전부 한 선생 덕분이지. 얼마 전에 보내준 약도 잘 먹고 있네.”

“다행입니다. 많이 좋아지셨어도 당분간은 건강을 유의하시며 약을 챙겨 드셔야 합니다.”

“암, 어떻게 다시 찾은 건강인데 허투루 날릴 수는 없지 않나.”

말을 마친 추위안차오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한지호의 잔소리가 싫지 않은 듯 했다.

자신의 건강을 챙겨주는 주치의의 권고를 고맙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한지호는 조심스레 화제를 돌렸다.

“무슈라이 일파에 대한 숙청이 끝났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공식 기사에도 떴더군요.”

“정리하는 김에 떨거지들까지 다 엮어서 한 방에 보내버렸네. 어떻게 보면 내가 아니라 한 선생이 무슈라이를 실각시킨 것이나 다름없지.”

“감당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그보다 무슈라이가 조직부장님께 독을 썼다는 내용은 보도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부끄러운 일을 대외적으로 알릴 수는 없으니 부패와 비리로 처리하는 수밖에.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독살 시도라니, 지금도 잘 믿겨지지 않는다네.”

추위안차오가 본능적으로 자기 턱 밑을 어루만졌다.

턱과 목이 맞닿은 부분, 한지호가 소도로 절개하여 독환을 갈라냈던 지점이다.

그곳에 아주 작은 흉터가 남아 치료의 흔적이 됐다.

추위안차오는 드문드문 목의 흉터를 만지는 버릇이 생긴 듯 했다.

그 흉터는 추위안차오가 더 대단한 인물이 되어도 계속 교훈을 줄 것이다.

한지호는 그를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슈라이 일파의 숙청이 끝났으니 상무위원이 되시는 건 시간 문제이군요.”

“이미 내부적으로 날이 나왔지. 자네만 알고 있게. 다음 달, 공산당 중앙회의에서 내가 상무위원으로 추천을 받을 예정이야.”

“축하드립니다. 이제 조직부장님이 아니라 상무위원님이라 불러야겠습니다.”

“그리고 나면 한 선생을 따로 불러 샴페인을 터트리도록 하지. 술은 마오타이가 좋겠네.”

추위안차오는 웃음를 머금은 채 한지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는 중국을 대표하는 명주(名酒) 마오타이를 이미 준비해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계속 마주선 채 이야기를 나눴다.

광활하다 싶을 정도로 넓은 스위트 룸의 공간을 내버려두고 같은 자리에 서있는 것이다.

편해 보여도 그만큼 대화의 집중도가 높다는 뜻이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보지. 한 선생이 내게 꼭 부탁하고 싶다는 게 뭔가?”

추위안차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한지호는 무엇이든 소원을 빌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 구속 돼 있던 유우선을 풀어달라고 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부탁이 있다고 연락을 한 것이다.

마침 홍콩에서 일정을 보내는 중이던 추위안차오는 두 말 없이 약속을 잡았다.

이번에야말로 시원하게 목숨을 빚진 값을 갚을 작정이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체면과 염치를 뒤로하고 어려운 부탁을 드리려 합니다.”

한지호의 눈매가 다부져 보였다.

그도 결심을 단단히 한 것이다.

지금은 자존심이나 체면을 챙길 때가 아니었다.

K-메디컬 타운을 놓고 벌어질 파워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동원하기로 마음먹었다.

조준혁이 민시헌을 포함한 어떤 카드를 들고 나와도 압살할 수 있는 승부수.

모든 패를 무효로 만드는 조커(Joker).

그 조커가 바로 다음 달이면 상무위원이 될 추위안차오다.

“무엇을 부탁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지 궁금하네. 말해보게. 애초에 유우선 따위를 풀어주는 걸로 내 목숨값을 치르고 싶지 않았었으니.”

“정계와 재계를 막론하고 한국의 거물들이 제 편이 되게 해주십시오.”

한지호의 말에 추위안차오가 눈을 빛냈다.

너무 황당하면서도 막연한 부탁이지만, 한지호가 괜히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닐 터.

추위안차오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가 한지호의 얼굴 앞에서 오른손 주먹을 쥐며 말했다.

“한 선생의 부탁, 대륙의 방식대로 아주 화끈하게 들어주겠네.”

+++

한지호와 최 원장, 박우식은 세종시 정부청사로 함께 이동했다.

드디어 오늘, K-메디컬 타운 공모의 심사위원단 앞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비공개로 서류 심사와 현장 실사가 마무리 됐고, 프리젠테이션만 하면 공모 과정이 끝난다.

사실상 오늘이 가장 중요하다.

기존 심사위원단 외에도 주요 심사위원 몇 명이 추가 될 예정이었고, 그들이 각 의료기관의 프리젠테이션을 보고 어떤 점수를 주느냐에 따라 최종 결과가 달라질 것이다.

정부청사에 도착한 한지호는 최 원장과 박우식을 진정시켰다.

두 사람은 잔뜩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주요 심사위원으로 어떤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조준혁 이사장이 자기 쪽 사람들을 잔뜩 심어놓는데 성공했다면…….”

박우식이 말끝을 흐렸다.

최 원장도 우려를 하는 얼굴이었다.

한지호는 둘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며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심사위원 명단을 알 방법은 없습니다. 프리젠테이션을 할 시험장 안으로 들어가면 자연히 알게 되겠죠.”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데 표정이 너무 태연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없으면 나오기 힘든 태도 같았다.

그러나 최 원장과 박우식은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한지호가 절대 입을 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정부청사의 대회의실 앞에는 원화 정의 네트워크와 위천 한방병원 사람들밖에 없었다.

오늘은 한방 의료기관만 심사하는 날이고, 두 곳만이 서류 심사와 실사 평가를 거쳐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따지고 보면 예견된 결과였다.

위천과 원화를 제외하고 국책 사업을 책임질 한방 의료기관을 찾기 힘들다.

위천에서는 조준혁 이사장을 포함한 세 명이 먼저 도착해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고 있었다.

불명예스럽게 은퇴한 유우선 병원장은 당연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찌릿-

한지호와 조준혁의 눈이 마주쳤다.

굳이 입을 열어 말을 섞을 필요가 없었다.

눈빛만으로 서로의 전의(戰意)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원장님!”

그때였다.

뒤에 앉아있던 박우식이 한지호를 불렀다.

정부청사 복도 저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아마 그들이 오늘 프리젠테이션을 보고 점수를 줄 심사위원단인 것 같았다.

검은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이 정부청사 안에서도 수행을 빼먹지 않았다.

그 뒤로 양성문 장관의 얼굴이 보였다.

‘왔다!’

양성문을 본 한지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과연 다른 심사위원단의 면면은 어떠할지, 특히 오늘 추가로 참관하는 주요 심사위원은 누구일지 드러나기 직전이다.

조준혁도 기대가 되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민시헌, 그리고…… 신한구!’

믿기 힘든 일이었다.

야당의 거물 정치인 민시헌이 세계 그룹 회장 신한구와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조준혁이 준비한 비장의 카드가 바로 이 두 사람인 것 같았다.

잠재적 대선 후보와 재계 서열 10위 안에 드는 재벌 회장을 동시에 움직이다니.

민시헌과 신한구는 한지호가 기존에 쌓아놓은 정치계와 재계의 인맥들보다 윗줄에 선 존재다.

그러나 한지호의 얼굴색이 어두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유는 금방 나타났다.

“읍!”

조준혁이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토하며 신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양성문과 민시헌, 신한구의 뒤쪽에서 경호원들의 집중 엄호를 받는 사람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행정자치부 장관 정종걸과 이제 막 30대 후반이 된 것처럼 보이는 젊은 남자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한국 경제를 움직이는 손, 천성 그룹 부회장 이태용이 주요 심사위원으로 합류한 것이다.

재계 서열 1위 천성 그룹의 후계자 이태용은 5년마다 바뀌는 대통령보다 더 절대적인 존재다.

조준혁도 최강의 카드를 뽑았지만, 한지호는 조커로 게임의 판을 뒤엎었다.

보건복지부장관과 행정자치부 장관, 거기에 더해 천성 그룹의 후계자가 한지호의 편에 서서 K-메디컬 타운 공모를 심사한다.

게임은 끝났다.

나머지 심사위원들의 평가는 요식 행위에 불과하다.

정치력을 겨루는 파워 게임에서 한지호가 조준혁을 압도한 것이다.

한지호는 가까이 다가오는 심사위원단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조준혁의 동태를 살폈다.

포커 페이스는 온데 간데 사라졌고, 완전히 일그러진 얼굴 표정으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무너졌구나.’

한지호는 조준혁이라는, 한 때는 올려다보기도 버거웠던 기업가의 내면이 산산조각 났음을 직감했다.

효웅 조조를 닮은 기세로 한의학계를 손아귀에 넣은 조준혁과 위천이 몰락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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