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
8장, 파워 게임(power game) (1)
박우식의 보고를 받은 한지호는 급히 전화를 걸어 양성문과 약속을 잡았다.
조준혁이 자신의 인맥과 힘을 동원해 비공개 심사위원단 구성에 관여한다는 소식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위천 한방병원이 K-메디컬 타운에 참여 할 의료기관으로 선정될 수도 있다.
연이은 위기로 흔들거리는 조준혁에게 다시 날개가 달릴지 모른다.
오죽하면 한지호가 실례를 무릅쓰고 양성문에게 급히 만나자는 청을 했겠는가.
양성문은 평소처럼 세종시의 정부청사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한지호는 퇴근 시간 교통 체증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종시로 달려갔다.
서울을 빠져나가기까지 차가 무진장 막혀 짜증이 났지만, 작은 걸림돌에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K-메디컬 타운을 위천 한방병원에 뺏기면 앞으로 몇 년을 후회할 수 있다.
운전대를 잡은 한지호의 눈빛에 서린 예기(銳氣)가 심상치 않았다.
최근 들어서 이만큼 날이 바짝 서 있었던 적이 드물었다.
부우우우웅-
그는 정체 구간을 벗어나자마자 엑셀을 강하게 밟았다.
마음 같아서는 차를 내팽개치고 경공술에 해당하는 오금희 조공(鳥功)을 펼치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성난 맹수처럼 고속도로를 헤집으며 세종시 정부 청사에 도착했을 때, 주위는 이미 어두워진지 오래였다.
본의 아니게 양성문을 퇴근도 못하고 기다리게 만든 셈이다.
한지호는 차에서 내려 급히 걸음을 옮겼다.
보건복지부 건물은 전에도 와본 적이 있어 길을 찾기 쉬웠다.
퇴근 시간을 넘겨서인지 대부분의 층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장관실 문 앞에 다다른 한지호는 다소 황망한 마음으로 노크를 했다.
양성문은 괜찮다고 했지만, 자신의 일로 한 나라의 장관을 붙잡아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들어와요.”
노크가 끝나자 양성문의 목소리가 울렸다.
오늘 이 시간에 장관실을 찾아올 사람은 한지호 밖에 없었다.
이미 비서와 직원들도 퇴근을 한 모양이다.
문을 열고 장관실 안으로 들어간 한지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장관님. 급한 마음에 제가 결례를 범한 것 같습니다.”
“아니에요, 그 무슨 말입니까. 한 원장이 내게 도움을 준 것이 얼마인데.”
“저 때문에 늦은 시간까지 퇴근도 못 하시고…… 면목이 없습니다.”
“괜찮대도 그래요. 어차피 검토해야 할 서류들이 많아서 야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괘념치 말아요.”
양성문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저었다.
그는 한지호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거듭 괜찮다는 말을 했다.
사실 일반 공무원도 아닌 장관이 갑작스런 약속을 받아준 것 자체가 특별한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장관은 며칠 전, 혹은 몇 주 전부터 전화를 넣고 여러 번 확인을 해야 겨우 약속을 잡을 수 있는 존재다.
그마저도 공무상의 확실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한지호는 퇴근길에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았고, 양성문을 장관실에서 늦게까지 기다리게 만들었다.
그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는지 확실하게 드러난 것이다.
사실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한지호는 양성문의 정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고, 동백장을 받으며 청와대에서도 주목하는 인물이 됐다.
양성문으로서는 두고두고 은혜를 갚은 동시에 좋은 관계를 다져놓을 필요가 있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를 하십시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급히 오느라 고생했어요, 한 원장.”
“사실 서울에서 좋지 않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나와 의논할 일이니 K-메디컬 타운과 관련된 소식이겠지요?”
“맞습니다, 장관님. 조준혁 이사장의 행보가 심상치 않습니다.”
“조 이사장이 최근 정계와 의료계 인물들을 두루 만나고 다닌다는 소문은 나도 들었어요. 그게 한 원장이 이렇게까지 신경을 쓸 일인 줄은 몰랐다만…….”
양성문도 돌아가는 사정은 알고 있었다.
장관 자리에 앉아있으면 여의도와 세종시의 온갖 소문을 접하게 된다.
정보력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한지호가 생각하는 것만큼 사태를 심각하게 보지 않는 눈치였다.
“제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조준혁 이사장이 비공개 심사위원단 구성에 깊이 관여할 계획을 세웠다고 합니다.”
“음.”
양성문은 짧은 신음을 토해내고 인상을 찡그렸다.
불쾌함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K-메디컬 타운 조성은 보건복지부 주관 사업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가 깊이 관여해서 정부와 함께 추진을 할 예정이지요. 헌데 조 이사장이 다른 마음을 먹었다는 건 우리 보건복지부를 무시하겠다는 것이네요.”
“가능성이 없는 일이라면 조준혁 이사장이 뛰어들지 않았을 겁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말을 잘 했어요, 한 원장. 내 한 번 자세히 알아봐야겠네요. 그리고 당부할 게 있어요.”
“네.”
“조 이사장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K-메디컬 타운 사업을 따내려 한다면 한 원장도 그만한 각오를 해야 하겠지요.”
“정치적인 싸움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상대가 암투를 시작했는데, 한 원장만 신사적인 태도를 취하면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으니 하는 말이지요. 정치권에 있으면서 숱하게 봐온 일이기도 하고.”
“명심하겠습니다, 장관님. K-메디컬 타운을 위천에게 빼앗기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요. 나도 그러도록 최선을 다해 도울 거랍니다. 한 원장이 국책 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주고, 우리가 계속 서로를 도울 수 있다면 참 좋지 않겠어요?”
“물론입니다.”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양성문 장관은 의심할 필요 없이 한지호의 편에 서줄 사람이다.
처음에는 Y대 암센터장 최규열의 소개로 만났지만, 추위안차오 사건을 겪으며 줄이 확실히 잡혔다.
그가 이끄는 보건복지부는 K-메디컬 타운 공모에서 원화 정의 네트워크를 밀 것이다.
문제는 조준혁의 카드다.
조준혁은 양성문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면 보건복지부 장관보다 더 강한 카드를 찾는 게 마땅한 순서다.
적의 패를 알아야 대비를 할 수 있는 법.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는 말이 그저 그런 옛말은 아니다.
한지호는 양성문과 대화를 나누며 심기일전을 했다.
정치적인 암투, 수면 아래에서 벌어지는 더러운 싸움.
모두 한지호가 딱 질색하는 것들이다.
의료인이라면 정정당당하게 의술로 실력을 증명하는 것이 왕도(王道)다.
그러나 조준혁은 K-메디컬 타운을 따내기 위해 진흙탕으로 들어갔다.
혼자 깨끗한 척 고고하게 서있다간 실속을 다 빼앗기고 만다.
‘이참에 확실히 숨통을 끊어주겠어.’
한지호는 벼랑 끝에 매달린 위천 한방병원을 절벽 아래로 밀어줄 작정이었다.
K-메디컬 타운을 놓고 벌이는 경쟁에서 승리하면 위천은 탈출구가 없어진다.
자신을 위해, 그리고 원화 정의 네트워크의 수많은 식구들을 위해 지저분한 싸움이라도 감수해야만 한다.
각오를 되새긴 그가 양성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장관님, 오늘부터 가능한 모든 수를 다 쓰겠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제가 사용할 수 있는 카드도 어디서 꿀리지 않을 겁니다.”
“이번 싸움, 한 원장이 더 큰 인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될 것 같네요.”
양성문이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의료기관이 한국을 대표할지를 두고 벌어진 싸움이다.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한지호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그가 과연 정치력으로 승부를 보는 암투에서도 빛을 발할 수 있을지 사뭇 기대 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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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호에게는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일주일의 절반은 홍콩에서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절반도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역삼동의 원화 한의원에 묶여 있어야 한다.
그가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은 오후 6시 이후다.
7일 내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조준혁에 비해 불리한 입장이다.
조준혁은 한의사가 아닌 경영자이기에 진료를 할 필요가 없다.
그만큼 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지호는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그는 이미 쌓아둔 인맥의 양과 질이 대한민국 누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했다.
정치계, 재계, 연예계, 의료계.
분야를 막론하고 최고의 거물들이 한지호와 인연을 맺어왔다.
먼저 시동을 건 쪽은 재계다.
재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움직이면 정치권도 덩달아 요동친다.
사실상 재계와 정치계는 한 몸으로 묶인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기 때문에 재계에서 일방적으로 조준혁을 두둔하지 않도록 대비를 하는 게 급선무였다.
한지호는 진료 사이사이 쉬는 시간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두터운 신뢰를 맺은 사람들에게 전화로 도움을 구하는 것이 1단계다.
그리고 진료 후 저녁과 밤에는 그들이 연결해준 인물을 만나 연대를 구축한다.
어떻게 보면 국회의원이 선거와 비슷한 방법이다.
K-메디컬 타운 공모가 정치적인 싸움이 됐다는 증거이기에 새삼스러울 건 없다.
“네, 선 회장님.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한지호는 동양 건설 선운열 회장과 기분좋게 통화를 끝냈다.
최규열, 양성문, 선운열.
Y대 황금라인을 대표하는 3인방이 모두 한지호의 편에 서있다.
그들과 연결된 인물들이 뜻을 모으면 대한민국을 움직일 수 있는 정도다.
한지호는 자신이 정리해둔 메모를 확인하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건설업계는 선운열 회장님, 금융은 플래티넘 홀딩스의 이재박 부사장님과 유건영 팀장님, 강북과 강남의 건물주들은 평창동 황 회장님 라인으로 단속하고……. 이만하면 조준혁 이사장이 날고 기어도 뚫기 힘든 벽인 것 같군.”
대수롭지 않게 평소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을 열거했지만, 한 명 한 명이 대단한 거물이다.
조준혁이 재계의 인맥을 통해 힘을 발휘하려 해도 쉽지 않을 듯 싶었다.
한지호가 자기 사람들에게 부탁한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정부에서 추진하는 K-메디컬 타운 사업에 대해 알아보고, 비공개 심사위원단으로 참여할 수 있다면 무조건 참여해라.
결국 심사위원 평가는 머릿수 싸움으로 정해질 것이다.
각 의료기관에 대한 서류 평가와 면접, 실사 등은 심사위원이 점수를 주기 나름이다.
우호적인 사람들 더 많이 확보한 쪽이 이긴다.
물론 정부에서는 공정한 평가를 위해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비공개 심사위원단으로 위촉하려 애쓸 것이다.
보통 정부 측의 제의를 받으면 바쁘다는 핑계로 사양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미리 언질을 받은 사람들은 기꺼이 정부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원화 정의 네트워크에 우호적인 평가를 내리면 된다.
조준혁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각계각층의 거물들을 포섭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다음 진료까지 10분이 남았으니 한 통 정도는 더 할 수 있겠다.”
한지호는 시계를 보고 다시 스마트 폰을 들었다.
한국에서 쓸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된 만큼 조준혁보다 한 수 앞서야만 한다.
재계를 챙겼으니 정치계 쪽 사람들을 체크 할 차례다.
“한 원장! 유명인사가 오랜만에 전화를 다 해주고, 이거 아주 반갑소.”
전화를 받은 사람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한지호는 상대의 깐깐한 면모를 떠올리며 인사를 했다.
“그동안 격조했습니다, 부시장님. 최근 좋은 소식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소문이 벌써 난 거요? 우리 시장님께서 다음 총선에 출마하게 됐고, 당에서 지방선거 주자로 나를 확정했다오. 당연히 오프 더 레코드이니 알아서 입단속은 해주시오.”
“축하드립니다. 인천시장이 되신 거나 다름없으시군요.”
“뭘 또 그렇게까지, 허허허!”
상대는 바로 인천시 경제부시장 백성필이다.
그는 영종도에 블랙문 카지노를 유치하며 한지호와 한 배를 탔었다.
처음에 백성필은 한지호를 우습게 여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진가를 알아보고 마음을 열었다.
블랙문 카지노의 성공 이후 두 사람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한지호는 한국을 대표하며 홍콩에도 깃발을 날리는 한의사가 됐고, 백성필은 차기 인천시장의 유력 후보로 거듭났다.
마창우, 허충욱, 백성필 등 블랙문 카지노 프로젝트에 함께 했던 사람들은 모두 잘 나가고 있다.
한지호 역시 그때 얻은 기회들을 적극 활용했고,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이익을 봤다.
머지않아 블랙문 카지노의 지분을 처분하게 되면 엄청난 수익률로 천문학적 액수를 만지게 될 것이다.
이처럼 서로가 잘 된 일로 함께 했으니 태도가 호의적인 게 당연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오? 한 원장이 안부나 물으려 전화를 했을 것 같진 않소만.”
“사실 부시장님께 도움을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무엇이든 기탄없이 말하시오. 예전에 한 원장이 허충욱 위원장님을 급히 치료하지 않았다면 블랙문 카지노를 유치하는데 실패했을 것 아니오. 그 공로는 잊지 않고 있었소.”
“감사합니다, 부시장님. 실은 이번에…….”
“아, 잠깐만. 그런데 혹시 야당의 민시헌 의원과 안 좋은 일이라도 있소? 그 양반이 최근 묘한 소리를 하던데 말이오.”
백성필이 자기 할 말을 먼저 했다.
도무지 그냥 넘길 수 없는 말이라는 게 문제였다.
민시헌.
야당의 잠룡으로 손꼽히는 유력한 정치인이자 한지호와는 악연으로 얽힌 사이다.
한지호가 가짜 백수오 사건을 터트려 유명인사가 됐을 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인물 중 한 사람이 바로 민시헌이었기 때문이다.
불길한 느낌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한지호는 원래 하려던 말을 잠시 미루고 질문을 던졌다.
“민시헌 의원이 제 이야기를 하던가요?”
“스치며 들었지만 한 원장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던데 말이오. 물론 그 사람을 높이 평가하고, 한 원장을 폄하했소. 주위에 그럴듯한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 말이오.”
“저와 비교를 한 사람의 이름이 혹시 조준혁이 아니었습니까?”
“맞소! 그랬던 것 같구만.”
한지호가 폰을 들지 않은 왼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조준혁의 노림수 하나가 우연히 드러났다.
민시헌.
결코 만만하지 않은 과거의 악연이 현재로 되살아나 그의 앞길을 방해하려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