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77화 (177/255)

# 177

5장, 금단의 끝 (1)

“4일 뒤에 보는 겁니다. 잘 견디고 있어요.”

“걱정 말아요. 지난 3일도 잘 해냈잖아요?”

한지호의 우려에 금링링이 당찬 표정으로 화답했다.

3일 동안 둘은 제법 친해진 것 같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한지호는 홍콩 원화 한의원 진료가 끝나면 다른 약속을 잡지 않았다.

그가 머무는 레지던시 아파트 바로 위층에는 금링링이 반쯤 감금 되어 있다.

매일 저녁 위층에 들러 금링링의 상태를 체크하고, 기경팔맥을 자극하는 침술로 탁기를 배출시키며 시간을 보냈다.

원래 사람은 치부를 보이면 급격히 가까워지는 법이다.

친구들끼리도 발가벗고 사우나를 다녀오면 한결 친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릴 때는 남몰래 나쁜 짓을 같이 한 친구와 특별한 유대감을 쌓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금링링은 매일 속옷만 입은 채 엎드려서 자기 몸을 한지호에게 맡겼다.

더구나 땀구멍에서 까맣고 찐득한 불순물을 배출하는 광경을 그에게 오롯이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여배우가 아니라 평범한 여자로서도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고, 금링링도 금방 치료 과정에 익숙해졌다.

대신 그녀가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준 유일한 대상인 한지호를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선식이랑 한약, 절대 빼먹으면 안 됩니다. 알람 맞춰놓고 있죠?”

“듣기 좋은 말도 계속 하면 싫댔어요, 한 선생님!”

“귀에 딱지가 앉을 때까지 계속 해야겠습니다. 금링링 씨가 의사 말을 잘 듣는 환자는 아니니까요.”

“뭐라고요?”

“서울에 다녀와서 아무 문제없이 선식과 한약을 잘 먹은 걸 확인하면 잔소리는 반으로 줄이겠습니다.”

“정말이죠? 그 약속 꼭 지켜요!”

입술을 삐쭉거리며 말하는 금링링은 절세가인다웠다.

화장을 안 한 맨얼굴인데도 뚜렷한 이목구비와 다양한 표정으로 그녀에게서 눈을 못 떼게 만든다.

한지호도 3일 동안 금링링을 치료하며 선입견을 허물었다.

그전에는 일찍 톱스타가 되어 싸가지 없는 천방지축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금링링은 나름대로 방어벽을 친 것이다.

자신이 스타라는 이유로 앞에서는 진심 없이 떠받들고 뒤에서 욕을 하는 사람들을 무수히 많이 봤기 때문에 상처를 입었던 것 같다.

그래서 차라리 표독스럽고 건방진 모습으로 먼저 벽을 쳤던 것이다.

그러나 한지호에게는 못 볼꼴을 다 보여주게 됐으니 자연스럽게 벽이 허물어진 셈이었다.

“마지막 당부. 바이룽 부원장에게도 친절히 대해줘야 합니다.”

“그 중국인 의사요? 꺼림칙한데.”

“금링링 씨도 중국인이면서…….”

“소문내면 어떻게 해요?”

“내가 믿는 사람입니다. 가벼운 사람이 아니니 신뢰해도 좋습니다.”

“알겠어요.”

금링링은 바이룽이 미덥지 않은 눈치였다.

하지만 서울과 홍콩을 오가는 한지호의 스케줄을 알기에 별 다른 수가 없었다.

한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파트 현관문을 열었다.

그대로 나가려던 그는 또 한 가지가 떠올랐는지 고개를 돌렸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 당부.”

“또 잔소리가 남았어요?”

“중요한 이야기를 까먹을 뻔 했습니다.”

“뭐에요?”

금링링은 귀찮은 티를 내면서도 한지호가 계속 말을 하는 게 싫지 않은 눈치였다.

한지호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3일 동안 약물로 인한 탁기를 많이 배출시켰습니다. 그 자리를 선식과 한약으로 채우고 있지만, 몸이 일시적 진공 상태에 빠져들며 금단 증상이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금단 증상…… 맞아요, 그렇죠.”

금링링은 소름이 돋는 듯 양 팔로 어깨를 감싸며 고개를 내저었다.

대마초와 담배를 혼자 끊지 못했던 것도 금단 증상 때문이다.

보통 대마초의 금단 증상은 심하지 않은 걸로 알려졌지만 그녀에게는 예외였다.

일주일 넘게 흡연을 하지 않으면 여지없이 금단 증상이 찾아와 그녀를 괴롭혀왔다.

“아직 일주일이 되려면 멀었어요. 여기 오기 전날까지도 피웠으니까.”

“그게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상황이 안 좋아지면 바로 내게 전화를 해요.”

“그럴게요.”

“그럼 진짜 갑니다.”

“잘 가요.”

금링링은 짐짓 시크하게 인사를 했다.

한지호는 그녀의 스타일에 익숙해진 듯 미소를 지으며 현관문을 닫았다.

다시 서울로 돌아가 그를 기다리는 한국 환자들을 진료 할 시간이다.

또 금링링을 보고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만들어준 소중한 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이다.

캐리어를 들고 아파트 밖으로 나선 그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

서울에서의 시간은 쏜살 같이 흘러갔다.

문재영 부원장이 점점 이름을 알리고 있고, 3층의 명징 약초만 찾는 환자들도 늘어났다.

그렇지만 역시 원화 한의원의 간판은 한지호다.

그에게 진료를 받기 위해 오래전부터 예약을 해놓은 환자들의 줄이 끊이지 않았다.

한지호는 일주일에 절반 가량은 홍콩에 있기에 서울에서 볼 수 있는 환자의 수가 정해져있다.

그래서 원장 특진비를 더 높였지만, 환자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오히려 희소성이 생기면서 오직 한지호의 진료만 고집하는 VIP 환자들이 더 많아졌다.

바빠진 일정으로 본의 아니게 고도의 마케팅을 한 셈이었다.

물론 그가 서울에 머무는 내내 진료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지호도 숨을 쉴 수 있는 개인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첫 날 진료를 마친 그는 강남에서 유초아를 만났다.

국내 굴지의 대형기획사에 연습생으로 들어간 그녀는 한층 더 아름다워졌다.

성형을 한 건 아니지만, 기획사에서 스타일링을 받으며 연예인 티가 나기 시작했다.

데뷔하기 전부터 이정도 미모를 갖춘 여배우는 찾아보기 힘들 것 같았다.

학업과 연습생 생활을 병행하느라 힘들게 분명하지만 유초아는 무척 밝아보였다.

한지호 덕분에 학교 선배들의 괴롭힘에서 벗어나 배우 지망생으로서 미래를 준비하게 됐기 때문이다.

D대 연극영화과에서도 유초아가 대형기획사에 소속된 걸 알고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다고 한다.

한층 밝아지고 예뻐진 유초아와의 데이트는 한지호에게도 활력소가 됐다.

그는 서울에 머무는 4일 중 이틀 저녁을 유초아와 함께 먹었다.

그녀가 대학에 입학한 후 부쩍 가까워진 둘은 학내 연극 사건 이후로 평상시에도 더욱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다.

한지호도 유초아도 아직은 자신들의 마음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서로 함께 시간을 보낼 때 편하고 즐겁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게 서울에서 일정을 잘 마무리한 한지호는 가뿐한 마음으로 홍콩 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매주 한 번씩 타는 비행기지만 이번엔 마음가짐이 특별했다.

홍콩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아주 독특한 환자가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금링링과 바이룽은 그가 서울에 있는 동안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비상사태가 발생했다면 둘 중 누구든 전화를 했을 것이다.

적어도 지난 4일 동안 금링링이 심각한 금단 증상 없이 선식과 한약을 잘 먹었다는 뜻이다.

여느 때처럼 밤 비행기를 탄 한지호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홍콩 공항에 도착했다.

택시에 짐을 싣고 레지던시 아파트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1시 무렵.

너무 늦은 시간이라 위층에 머물고 있는 금링링을 들여다보긴 힘들 것 같았다.

정상적인 일정대로 생활한다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시각이기 때문이다.

“궁금하긴 하지만… 역시 내일 봐야겠지?”

한지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신발을 벗었다.

그도 누구 못지않게 금링링의 컨디션이 알고 싶었다.

선식과 한약을 꾸준히 복용한 그녀의 상태가 얼마만큼 개선 됐는지 눈으로 보고픈 마음이 컸다.

내일 홍콩에서 진료를 마치고, 저녁 시간에 침술을 펼치면 많은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녀의 땀구멍을 통해 배출되는 탁기가 줄어들었으면 성공이다.

만약 금링링이 한지호가 말한 원칙을 잘 지키지 않았다면 큰 변화가 없겠지만 말이다.

“후- 모르겠다. 믿어봐야지.”

한지호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누웠다.

서울에서 수십 명의 환자를 치료하고 곧장 밤 비행기에 탔기 때문에 여독이 만만치 않았다.

얼른 푹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 운기조식으로 피로를 풀고 싶었다.

마크 트웨인은 모레 할 고민을 내일 하지 말라는 명언을 남겼다.

내일이면 부딪칠 일을 오늘 밤부터 미리 걱정해봐야 바뀌는 건 아무 것도 없다.

한지호는 일부러 금링링에 대한 생각을 지우고 눈을 감았다.

오늘 밤은 아무 생각 없이 깊이 잠들고 싶었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고, 그만큼의 책임감이 한지호의 어깨를 짓누를 것이기에.

이제는 익숙해진 홍콩의 밤이 짙은 어둠으로 깊이 물들고 있었다.

+++

“금링링 씨는 좀 어땠어요?”

홍콩에서의 진료를 마치고 퇴근하기 직전, 한지호가 바이룽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가 없는 동안 바이룽이 금링링의 상태를 체크했기 때문이다.

바이룽은 언제나 그렇듯 진지한 표정으로 성실하게 대답했다.

“원장님께서 만들어놓으신 선식 식단과 한약을 스케줄대로 빠짐없이 복용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틀에 한 번씩 맥을 짚었는데 모두 정상이었습니다. 아직까지는 특별한 금단증상도 없었습니다.”

“예후가 좋다는 말이네요. 아직까지는.”

“일반적인 중독 치료라면 약물을 끊은 후 1주에서 2주부터 금단증상이 시작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보통은 2주부터 본격적인 금단증상이 나타나죠. 하지만 금링링 씨는 1주일, 그러니까 오늘 내일이면 고비가 시작 될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내가 홍콩에 있던 사흘 동안 기경팔맥에 침을 놓아 몸 안에 쌓인 탁기를 배출시켰습니다. 약물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시간이 훨씬 단축 된 거죠. 그러니 금단증상도 빨리 찾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아…….”

바이룽은 크게 배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지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가 좋아할 이야기를 해줬다.

“금링링 씨의 치료가 끝나면 몸에서 독소와 탁기를 빼내는 침술법을 정리해서 넘겨드리겠습니다. 도움이 될 겁니다.”

“저, 정말이십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원장님!”

바이룽은 한지호가 비법을 전수해준다는 말에 눈을 크게 뜨고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그동안 적지 않은 노하우를 배웠지만 침술 비법을 전수 받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지호는 기뻐하는 바이룽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부원장님이 고생 많이 하고 있는 거 다 알고 있습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원장님.”

“그럼 난 이만 퇴근할게요. 금링링 씨의 컨디션이 어느 정도일지 궁금해서 신경이 많이 쓰이는군요.”

“네, 마무리 정리는 제가 하고 가겠습니다.”

바이룽을 남겨두고 한의원에서 나온 한지호는 마침 길 건너편에 멈춰선 택시를 잡았다.

레지던시 아파트도 리펄스 베이에 있지만 한의원에서 걸어가기엔 애매한 거리였다.

물론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오금희 조공을 펼칠 수 있다면 택시보다 빨라질 것이다.

하지만 홍콩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공술을 펼쳐 구경거리가 될 순 없었다.

호기심과 조바심을 억누르고 아파트에 도착한 한지호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당연히 그가 사는 층보다 한 층 위로 향했다.

집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금링링을 보려는 것이다.

딩동-

웬일인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한지호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가기 시작했다.

성큼성큼 걸어간 그가 금링링이 머무는 아파트 현관문 앞에서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피부에 와 닿는 감각이 심상치 않았다.

“이건…… 좋지 않아.”

한지호는 급히 번호키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때였다.

현관문이 열리기 전, 아파트 안쪽에서 여자의 고성이 들려왔다.

“끼야아아아-!”

금링링의 비명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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