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74화 (174/255)

# 174

3장, 가시를 숨긴 장미 (2)

한지호는 편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직접 내린 커피를 가져왔다.

바(bar) 모양의 테이블에 앉아 있던 금링링이 눈을 빛냈다.

커피 잔에서 풍겨 나온 향기가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부드럽게 바꿔놓고 있었다.

참 묘한 일이다.

중국을 대표하는 섹시 여배우와 한 집에 둘이서 커피를 마실 줄이야.

한지호는 금링링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봤다.

조막막한 얼굴 안에 화려하고 뚜렷한 이목구비가 오밀조밀 자리잡고 있다.

괜히 헐리우드에서도 러브 콜을 보내는 게 아니다.

그녀는 확실히 단번에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미녀다.

그렇지만 호흡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마주앉아도 가슴이 떨리지 않았다.

한지호의 마음에 다른 누군가가 자리를 잡았기 때문일까.

그때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금링링이 입을 열었다.

“맛있네요. 의외지만.”

“의외… 입니까?”

“그럼요. 잘 나가는 의사가 직접 커피 같은 걸 내릴 줄은 몰랐어요.”

“취미이기도 하고, 한의사로 성공한 것과 커피를 직접 내리는 건 아무 상관이 없죠.”

“특이하시 네요. 난 귀찮은 건 딱 질색이라서.”

금링링이 어떤 캐릭터인지 대강 파악이 됐다.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모든 것을 회사와 매니저에게 맡기며 공주님 대접을 받아야 하는 스타일이다.

한국 연예계에도 이렇게 스타병에 걸린 사람이 적지 않다.

금링링 정도의 슈퍼스타라면 꼴사납긴 해도 이러는 게 이해가 갔다.

주위에서 공주님이 아니라 여왕님처럼 받들어 모시는데 이골이 났을 것이다.

소속사도 막대한 돈을 벌어다주는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못한다.

하지만 한지호는 달랐다.

그는 다소 차가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한의원에서 하던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대마초를 계속 피고 있다는 건데 중국에서는 매우 심각한 죄 아닙니까?”

“맞아요. 감옥에서 몇 년씩 썩어야 하고, 연예계 생명도 끝날 수 있죠. 운 좋게 미국으로 도망가서 활동할 수 있으면 모를까.”

“그런 심각한 일을 왜 하필 나에게 털어놓은 겁니까? 잘 알겠지만 쉽게 치료를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한지호는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금링링이라는 거물을 치료해서 중국 연예계에도 이름을 날리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위험한 일에 뛰어드는 것 같기도 했다.

괜히 금링링의 마약 스캔들에 연루되면 기껏 쌓아올린 중국에서의 이미지가 와르르 무너질 것이다.

금링링도 한지호의 고민을 아는 눈치였다.

안하무인의 톱스타라고 해도 생각이 없지는 않다.

험한 연예계 바닥에서 최고의 자리를 찍은 사람들은 일반인보다 더 머리가 잘 돌아간다.

그녀는 버릇처럼 혓바닥으로 자신의 붉은 입술을 핥은 후 말을 이었다.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했으니까요.”

“어떤 조건인지 궁금하군요.”

“먼저 중국인이 아닌 외국인 중에서 실력을 갖춘 의사여야 할 것, 그래야 소문이 날 가능성이 낮아지죠.”

“두 번째는?”

“든든한 뒷배경을 가졌을 것. 중국은 권력자들의 마음대로 움직여지는 나라에요. 배경이 확실하다면 말이 새어나가도 한 번은 용서를 받을 가능성이 있을 테고, 내 문제도 덩달아 무마 될 수 있지 않겠어요?”

한지호는 금링링에 대한 평가를 추가했다.

단순히 콧대 높은 톱스타인 것만은 아니었다.

영악하다는 말이 그녀를 설명하기에 딱 어울릴 것 같았다.

자신의 영악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도 무서운 점이다.

어설프게 감추려들지 않고, 영악한 면모를 과시하며 캐릭터를 구축한다.

“생각보다 더 재밌는 사람이네, 금링링 씨.”

한지호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가 어쩐지 서늘해 보였다.

이전과 달라진 태도를 느낀 것일까.

금링링도 살짝 긴장한 듯 눈을 깜박였다.

한지호는 그녀가 위축 되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그러니까 나에게 치료를 받다가 혹시 대마초 중독이 알려지면, 그때 추위안차오 조직부장에게 부탁을 해서 같이 수사를 무마하겠다는 계산을 세우고 왔다는 뜻입니까?”

“맞아요. 저도 웬만한 고위 간부들을 잘 알고 있지만, 상무위원이 될 사람은 차원이 다른 존재잖아요. 게다가 그 분이 생명의 은인을 외면하시진 않을 것이고요.”

“그만합시다. 굳이 그런 것까지 생각하며 금링링 씨를 치료하고 싶지 않습니다. 생명에 지장이 가는 병도 아니고. 비밀은 지킬 테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한지호는 생각을 정리했다.

영악한 슈퍼스타의 계산대로 놀아나주고 싶은 마음 따윈 요만큼도 없었다.

만약 건강이나 생명에 위험을 초래하는 병이었다면 치료를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마초 흡연 자체는 건강에 큰 무리를 가하지 않는다.

물론 중독 증세가 심해지면 이야기가 달라지고, 중국 사법 당국의 위험이 실재하지만 의학적으로 당장 손을 써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치료를 안 하겠다고 말을 해도 마음이 편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어요. 하지만 내 말을 한 번만 들어줘요.”

금링링은 침을 꼴깍 삼키고 한지호를 쳐다봤다.

아직 할 말이 남은 것일까.

곧이어 그녀가 흘려듣기 힘든 조건을 제시했다.

“대마초 중독을 치료해주면 100만 위안을 줄게요. 그리고 원화 한의원의 모델이 되어주죠.”

한지호의 머릿속에서 곧바로 계산기가 작동됐다.

최근 환율로 1위안이 190원에 거래 된다.

100만 위안이면 1억 9천만 원이다.

약물 중독을 치료하는 건 무척 까다로운 일이다.

그러나 목숨이 달린 것도 아닌데 엄청난 치료비를 제시 받은 것이다.

아무리 고액을 지불하는 VIP 환자들이 서울과 홍콩에 많아졌어도 한 사람이 1억 9천만 원의 치료비를 내는 경우는 드물다.

금링링이 굳이 상대하고 싶지 않은 골칫덩이에서 점점 놓치고 싶지 않은 대어로 변해가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모델 출연료는 100만 위안의 몇 배는 족히 넘을 터.

여러모로 매력적인 카드다.

한지호가 망설이기 시작한 것을 눈치 챘는지 금링링이 쐐기를 박았다.

그녀는 대마초 중독이라는 사실을 고백한 이상 기필코 한지호에게서 치료를 받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그리고 원한다면 헐리우드에 선생님을 소개해줄 수도 있어요. 요즘 LA와 비버리힐즈에서 동양의 전통 의학이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는 것, 아시죠?”

한지호는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는 섣불리 대답하는 대신 금링링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녀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다.

그러나 가시를 숨기기는커녕 드러내놓고 자랑하는 위험한 장미다.

대륙의 여신, 중화의 장미 금링링.

한지호의 선택에 따라 그녀의 운명이 달라질 것 같았다.

+++

장미를 쥐었다.

가시 때문에 포기하기엔 장미의 향이 너무 매혹적이었다.

여자로서의 매력을 이야기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금링링은 김해수처럼 남자의 영혼을 뒤흔드는 여자지만, 한지호는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내건 조건을 놓치고 싶지 않을 따름이었다.

100만 위안, 우리 돈 1억 9천만 원에 해당하는 치료비를 포함해서 무료로 홍콩 원화 한의원의 모델이 되는 것.

마지막으로 헐리우드의 관계자 또는 유명 배우를 진료할 수 있게 다리를 놓아주는 것.

이 모든 조건을 빠짐없이 지키겠다는 친필 각서를 받았다.

단서는 하나뿐이다.

금링링의 대마초 중독, 그리고 이참에 담배를 피는 습관까지 한 번에 해결해주기로 했다.

치료를 약속한 한지호는 그녀에게 일주일의 기한을 줬다.

일주일 동안 스케줄을 정리해서 보름의 여유를 만들어 오라고 한 것이다.

금링링 같은 탑스타가 보름을 통째로 비우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홍콩 원화 한의원에 방문하며 하루를 비운 것도 애를 썼기 때문이다.

각종 CF 스케줄과 예능 프로그램 출연, 작품 검토와 영화사 미팅 등.

그녀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쁜 사람이다.

당장 드라마나 영화를 촬영하고 있지 않아도 소화해야 하는 스케줄은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하지만 한지호는 단호했다.

보름의 기간을 완전히 비우지 않으면 절대 치료를 할 수 없다고 밝혔다.

결국 금링링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홍콩으로 돌아온 한지호는 리펄스 베이에서 금링링을 기다렸다.

홍콩 원화 한의원에는 한지호와 바이룽,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직원들을 퇴근시킨 한지호는 바이룽을 따로 불렀다.

원래라면 치료가 끝난 후 바이룽에게 사실을 알려주려 했었다.

그러나 보름 동안 집중적으로 금링링을 치료하기 위해선 그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금링링은 중국인 의사인 바이룽에게 사실이 알려지는 걸 달가워하지 않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홍콩에서는 한지호와 바이룽이 하나의 팀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정말 믿기 힘든 사실입니다, 원장님.”

자초지종을 들은 바이룽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신으로 추앙 받는 금링링이 대마초 중독이라니, 누구라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말을 해준 사람이 한지호가 아니었다면 바이룽도 한낱 연예계 루머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곧 치료를 받기 위해 금링링이 이곳으로 온다.

그녀는 무려 보름, 2주간의 스케줄을 통째로 비워뒀다.

한지호는 아주 강력한 중독 치료로 2주만에 금링링의 체질을 바꿀 계획을 세웠다.

그녀가 버티고 따라온다면 담배 따위는 물론, 대마초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

물론 중도에 포기하고 뛰쳐나간다면 모든 게 없던 일이 된다.

과연 평상시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금링링이 보름의 중독 치료를 견딜 수 있을까.

치료 계획을 세운 한지호도 쉽게 장담할 수 없는 문제였다.

지이잉-

그때 마침 금링링이 한의원 안으로 들어왔다.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늦었지만, 한지호는 굳이 따지지 않았다.

앞으로 2주 가까이 그녀가 겪어야 할 고통이 엄청나다는 걸 알기에 작은 결례쯤은 봐주는 것이다.

“왜 혼자가 아닌 거죠?”

금링링은 한의원에 들어오자마자 손가락으로 바이룽을 가리켰다.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 대신 부원장에게 삿대질을 한 것이다.

한지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중독 치료를 함께 할 바이룽 부원장입니다. 칭화 병원의 중의학과장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이건…….”

“싫으면 나가도 됩니다. 가는 사람 안 붙잡습니다.”

“…….”

금링링이 말을 하지 않고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불만 가득한 표정이지만 더 이상 문제를 삼진 않을 것 같았다.

지금 그녀에게도 한지호 외의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텅 빈 환자 대기실에 그녀를 앉히고 설명을 시작했다.

“오늘부터 보름 동안 중독 치료가 시작 될 겁니다. 이 치료 기간을 견디기만 하면 금링링 씨의 몸에 쌓인 불순물이 사라지고, 모든 중독 증세로부터 자유로워질 겁니다.”

“금단 증상도 없어지는 거죠?”

“치료가 끝난 다음에는 당연히 금단 증상도 느껴지지 않을 겁니다. 다시 약물에 손을 댄다면 몰라도.”

“그럴 일은 절대 절대 없을 거예요.”

“LA에서 헐리우드 관계자들과 파티를 하며 대마초에 손을 댔다고 했었습니까?”

“맞아요. 그 분위기에서 나만 뺄 수 없었고, 중독성도 약하다고 해서. 약하긴 뭐가 약해!”

“본래 대마초, 마리화나, 위드, 어떻게 부르든 담배보다 중독성이 약한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금링링 씨가 대마초에 중독 됐고, 강한 금당 증상을 느낀다는 건 보통 사람보다 향정신성 약물에 취약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요?”

“그래서 체질을 바꾸고, 약물 반응을 뿌리 뽑기 위해 극단적인 치료가 필요합니다.”

한지호의 말에 금링링이 살짝 겁을 먹은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구체적인 치료 방법에 대해 듣지 못한 바이룽도 긴장한 표정이었다.

“오늘부터 보름 동안 금링링 씨의 24시간을 제가 컨트롤 해야겠습니다. 먹고 마시는 건 물론이고, 숨 쉬는 것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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