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62화 (162/255)

# 162

8장, 전초전(前哨戰) (1)

한지호는 진료를 마치고 여의도로 이동했다.

국회의사당에서 보건복지부 장관 양성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의사당 본청에 들어선 한지호는 보건복지위원회 회의실을 찾아갔다.

예전에도 정책 자문위원들이 모여 회의를 했던 곳이기에 길이 낯설지 않았다.

똑똑-

노크를 하고 회의실 문을 열자 양성문이 홀로 앉아있었다.

다른 정책 자문위원이나 복지부 소속 공무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보건복지위원회의 다른 공간은 위원장을 맡은 국회의원이 사용한다.

하지만 저녁을 넘긴 시간이라 그쪽 직원들도 모두 퇴근한 것 같았다.

“장관님, 혼자 계셨습니까?”

한지호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양성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를 맞이해줬다.

“이것저것 정리하느라 혼자 시간을 보냈어요. 가끔은 이래야 한창 때 일 하던 생각도 나고. 그나저나 바쁜데 여의도까지 불러서 미안하게 됐네요, 한 원장.”

“아닙니다. 당연히 와야죠.”

“이번에 홍콩에서 아주 큰일을 했다면서? 뉴스를 보니 중국 사람들도 한 원장의 진가를 알게 된 것 같더니만.”

“한류스타인 유대성 씨를 치료하게 되면서 홍보가 잘 됐습니다. 한동안 고전했는데 예상보다 일찍 한의원이 알려지게 되면서 금방 자리를 잡을 것 같습니다.”

“역시! 우리 한 원장 수완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말이오. 워낙 의술이 뛰어나니 그런 기회도 들어오는 것이겠지.”

양성문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여러 차례 끄덕였다.

최규열 센터장의 소개로 인연을 맺은 후 양성문과 선운열은 한지호의 팬을 자처했다.

Y대 암센터 센터장을 포함해 보건복지부 장관, 그리고 굴지의 건설회사 회장이 후견인을 해주겠다고 나섰으니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무엇보다 이들 삼인방은 Y대의 황금세대를 이끄는 주축이다.

세 명이 학연으로 동원할 수 있는 인맥은 가히 대한민국 최고 수준일 것이다.

학연, 지연이 나쁜 것이지만 아직까지 거기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다.

한지호는 다시 한 번 뿌듯함을 느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장관님, 중국 공산당 간부가 한의학적 치료를 원한다는 말씀은 어떤 일인지요?”

“아, 이거 참. 바쁜 사람 불러놓고 내 정신 좀 보게. 그 이야기를 하려고 보자 한 건데 말이에요.”

양성문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아무도 없는 회의실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살짝 낮췄다.

“아직 대외적으로 알려져서는 안 됩니다.”

“제 입은 무겁습니다.”

“물론 믿고 있어요. 사실 굉장히 큰 기회이지만 동시에 까다로운 문제이기도 해서……. 중국 공산당 중앙조직부장 추위안차오, 한 원장도 들어봤나요?”

“뉴스에서 들어본 기억은 납니다만,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쉽게 말해 중국의 차세대를 책임질 거라 평가받는 실세 중의 실세이지. 상무위원에 오를 유력한 후보이기도 하고 말이오.”

“상무위원이라면 공산당의 대소사를 주관할 수 있는……?”

“맞아요, 맞아. 추위안차오는 바로 그 상무위원에 무난히 오를 거라 예상되고 있소.”

“그럼 엄청난 거물이군요. 국제 사회에서도 알아주는.”

“거물이지. 거물이니 나에게 직접 연락을 해오는 것 아니겠소, 허허.”

양성문이 편하게 웃었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한지호의 눈앞에 앉아있는 양성문도 한국에서 손에 꼽히는 인물이다.

국가 운영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장관인 것이다.

그런 장관에게 직접 의료진 물색을 부탁할 정도면 추위안차오의 위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한지호가 다른 질문을 하려는 찰나, 양성문이 먼저 설명을 덧붙였다.

“이게 정치적으로도 간단치 않은 문제라오. 추위안차오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건 중국 공산당 간부들도 알고 있소. 그러나 치료가 불가능하고 상세가 심각해지면 상무위원으로 추대 받지 못 할 것이오. 그 사람 입장에서는 반드시 치료를 받고 건재함을 증명해야만 상무위원이 될 수 있지.”

“상무위원이 되느냐 못 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하늘과 땅 차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에요, 한 원장. 추위안차오가 상무위원이 되면 나도, 그리고 우리나라도 중국과의 외교에서 든든한 우군을 얻게 되는 셈이고……. 반대의 경우는 그동안 공들인 카드 하나를 아쉽게 잃는 것이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추위안차오가 한의학적 치료를 원하는 것입니까? 어떤 증상인지도 궁금합니다.”

한지호의 물음에 양성문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무위원이 아니라도 중국 공산당 중앙조직부장이면 나는 새도 떨어트릴 수 있다.

중국은 물론이고 세계 최고의 의료진으로부터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한의학적 치료를 받겠다며 양성문에게 도움을 요청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지호는 예상되는 바가 있었다.

온갖 치료 방법과 최고의 의료진을 동원해도 답이 안 나오니 궁여지책으로 한의학을 선택했을 것 같았다.

보통 난치병에 시달리는 환자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한의사를 찾는다.

“그게 말이지……. 내로라하는 의사들이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고 해요. 현대 의학으로도, 중의학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러던 중 한류 열풍에 힘입어 한의학 관련 기사가 소개된 걸 보고 문의를 해온 것이지요.”

한지호의 예상대로였다.

추위안차오는 가능한 모든 수를 다 써봤고, 막다른 절벽에서 한의학을 찾는 것이다.

황만금도, 김해수도 마지막 희망으로 한의사를 찾았었다.

이런 경우 무척 까다로운 난치병일 확률이 높다.

한지호는 무거운 마음으로 추위안차오의 증세를 물었다.

“어떤 병입니까, 장관님.”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일종의 마비 증상이 매우 심각해지고 있다네요.”

“마비란 말이죠, 마비.”

현대 의학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마비 환자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야말로 손을 쓰기가 극히 까다롭다는 사실이다.

증상을 조금이나마 개선하는 것도 쉽지 않다.

한지호는 머릿속으로 마비와 관련된 여러 질병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 양성문이 결정적인 말을 내뱉었다.

“복지부에서는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두 곳의 한의원을 추천할 수밖에 없었어요. 한 원장의 원화 한의원과 위천 한방병원을 추천했고, 추위안차오의 측근이 두 곳을 시찰한 후 결정을 할 예정이라 하네요. 개인적으로는 한 원장이 추위안차오를 치료하고 중국 공산당의 후광을 등에 업길 바라고 있어요.”

또 다시 위천의 이름이 함께 거론됐다.

양성문 입장에서는 한 곳의 한의원만 추천하면 책임을 뒤집어 쓸 우려가 생긴다.

그렇기에 원화와 위천을 동시에 추천할 수밖에 없었다.

두 곳을 대표하는 한의사인 한지호와 유우선 모두 보건복지부 정책 자문위원을 맡고 있어서 명분도 살았다.

중국 정치의 거물인 추위안차오의 치료를 맡는 게 기회가 될지 위기가 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위천 한방병원과의 경쟁에서 이겨야만 진료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운명의 장난 같지만 예고된 필연이다.

원화와 위천의 싸움은 한쪽이 완전히 승리하기 전까지는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한지호는 묘한 웃음을 지었다.

계속되는 충돌이 싫지 않고 즐거웠다.

그의 내면에 잠든 군주의 피가 뜨겁게 끓고 있었다.

+++

조만간 중국 공산당 중앙조직부장 추위안차오의 측근이 홍콩 원화 한의원을 시찰할 것이다.

추위안차오 입장에서도 신중하게 선택을 해야 하는 문제다.

현대 의학과 중의학으로도 마비 증세를 치료하지 못한 그는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었다.

건강을 회복하고 예정대로 상무위원이 되느냐, 아니면 쓸쓸히 중국 정치의 중심에서 뒤로 밀려나느냐가 달려있다.

양성문 장관에게 추천을 받은 두 곳의 한의원 중에서 어디를 선택할지 무척 까다롭게 재어 볼 것 같았다.

한지호는 곧바로 대비에 들어갔다.

우선 칭화 그룹의 도움을 받아 많은 양의 질 좋은 약재를 홍콩으로 옮겼다.

수량을 초과하는 약재는 해외 통관이 어렵다.

중국 약재를 한국으로 들여오는 것도 힘들지만, 한국의 것을 홍콩에 가져가는 것도 쉽지 않다.

세관과 검역 당국의 깐깐한 심사를 통과하는 건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극악한 난이도를 자랑한다.

특히 다른 나라도 아닌 중국 당국의 막무가내 심사는 국제적으로 악명이 높다.

칭화 그룹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서울에서 약재를 대량으로 옮기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지호가 약재를 운반한 건 여러 이유 때문이었다.

두고두고 홍콩에서 약을 짓기 위해서인 동시에 추위안차오 측근의 시찰을 앞둔 준비다.

질 좋고 깨끗한 약재가 넉넉하게 있어야 좋은 인상을 심어줄 것 아닌가.

한지호는 일단 위천과의 경쟁에서 이겨 추위안차오를 만나기로 결심했다.

치료 여부를 장담할 수 없지만, 주어진 기회는 잡고 보는 게 맞다.

특히 상대가 위천이라면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그는 약재 운반과 동시에 홍콩 현지 직원을 시켜 언론 자료도 정리하게 했다.

중국 언론에서 한지호와 원화 한의원을 소개한 기사, 그리고 한국에서 한지호가 주목 받았던 사건과 기사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시킨 것이다.

다행히 최근 유대성을 치료한 일로 중국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덕분에 기사 스크랩에 채워 넣을 자료가 풍부해졌다.

가만히 있으면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치열한 자기 PR과 홍보를 해야 살아남는 시대다.

한지호는 정리한 언론 자료를 추위안차오의 측근에게 보여줄 예정이었다.

통역을 대동하고 이러쿵저러쿵 길게 이야기하는 것보다 깔끔하게 정리된 자료를 보여주는 편이 낫다.

게다가 공신력 있는 언론의 기사를 모은 자료이니 신뢰를 얻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원장님, 그쪽 사람이 언제쯤 시찰을 하러 올 것 같습니까?”

“빠르면 내일, 늦어도 모레엔 올 겁니다. 하루라도 빨리 치료를 받으려 할 테니까요.”

한지호는 홍콩 원화 한의원의 부원장 바이룽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사히 오후 진료를 끝내고 시찰을 대비한 회의를 시작했다.

유대성과 런런런 멤버들의 방문 효과로 오늘 진료는 대성황이었다.

한지호와 홍콩의 직원들은 대기실을 가득 채운 환자들을 보며 피곤함도 잊었다.

뿐만 아니라 바이룽은 다른 직원들이 퇴근한 뒤에도 남아 회의에 참여하는 열성을 보였다.

진정으로 홍콩 원화 한의원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한지호도 그에 보답하듯 틈이 날 때마다 한의학 노하우를 전수해줬다.

진맥을 하는 다양한 방법부터 하나씩 알려주기 시작했고, 바이룽은 의술을 처음 배우는 학생처럼 눈을 빛내며 즐거워했다.

세상사에 공짜는 없다.

바이룽도 한지호 밑에서 얻는 것이 있기에 이토록 열의를 보이는 것이다.

“말씀해두신 준비는 모두 끝냈습니다. 한국에서 공수해 오신 약재도 정리를 해뒀고, 언론 자료 모음 역시 아주 잘 만들어졌습니다.”

바이룽의 보고에 한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개운한 표정은 아니었다.

“위천도 만만치 않게 준비를 할 겁니다. 공산당 간부를 치료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의 한의원 운영에 대로가 열리는 셈이니.”

“최근 류따이승과 런런런 멤버들이 방문한 게 우리 쪽의 호재 아니겠습니까? 추위안차오 부장도 홍콩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뉴스를 봤을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대부분 보수적이잖아요. 연예인을 치료한 걸 크게 받아들이진 않을 것 같습니다.”

바이룽에 비해 한지호는 신중한 태도로 상황을 바라봤다.

절대 섣부른 낙관을 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한의원 규모는 위천이 훨씬 큽니다. 우리는 현지의 상류층을 공략하기 위해 리펄스 베이로 왔지만, 센트럴에 개원을 한 위천 한방병원의 입지가 좋아 보일 확률도 높죠. 게다가 결정적으로 나이가 문제입니다.”

“원장님의 나이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동양에서는 나이와 경력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니까요. 언론의 주목을 받고, 여러 번 실력을 입증했어도 내가 너무 젊다는 게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반면 위천의 유우선 병원장은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고, 경력으로 따지면 나보다 한참 앞서 활동을 했습니다. 추위안차오의 성향을 모르지만, 우리가 유리하다고 자신하긴 힘듭니다.”

한지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바이룽은 덩달아 심각해진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그때 한지호가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바꿨다.

“집중은 하되 너무 몰입하진 맙시다. 우린 이미 현지 환자들을 모으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이번 일은 되면 좋고, 안 되면 아쉬운 것 정도로. 좋은 기회이긴 하지만 추위안차오 조직부장의 증세가 얼마나 심각한지도 알 수 없고, 변수가 많네요.”

“네, 원장님. 지나치게 마음 쓰며 흔들리진 않겠습니다.”

“그런 태도, 아주 좋아요.”

한지호는 바이룽을 바라보며 웃었다.

세상일은 참 모르는 것이다.

불과 얼마 전에는 칭화 병원에서 만나 기 싸움을 하던 두 사람이 지금은 원장과 부원장이 되어 한솥밥을 먹고 있다.

한지호는 신기한 인연에 감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를 끝내고 바이룽과 함께 고량주나 한 잔 기울일 요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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