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7장, 런런런 (2)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유대성이 기자회견에서 간접 광고가 의심될 정도로 소개를 해주고, 런런런 멤버들이 리펄스 베이의 홍콩 원화 한의원을 단체 방문한 다음날.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아침부터 예약과 문의 전화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안내 데스크를 맡은 홍콩 현지 직원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부원장 바이룽도 잔뜩 상기된 기색이었다.
“원장님, 다음 주에 오시면 사흘 내내 쉴 틈이 없으실 것 같습니다.”
“서울에 이어 홍콩에서도 예약이 풀이라니……. 기대했던 것보다 시기를 훨씬 앞당겼습니다.”
“이게 다 류따이승과 런런런 멤버들 덕분입니다. 물론 류따이승을 치료하신 원장님께서 스스로 기회를 만드신 것이지만 말입니다.”
바이룽의 얼굴이 평소보다 훨씬 밝아보였다.
매사 진지한 그도 늘어난 예약과 뜨거운 반응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페이스라면 머지않아 홍콩 원화 한의원도 서울처럼 100% 예약제를 실시해도 될 것 같았다.
“너무 들뜨지는 말고, 오늘도 변함없이 힘차게 달립시다!”
“네, 원장님!”
한지호의 말에 바이룽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오늘 오후부터 예약을 하지 않고 바로 찾아오는 환자들도 늘어날 게 분명하다.
똑똑-
그때 간호사가 노크를 한 뒤 원장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간호사 뒤에는 환자와 한지호 사이의 의사소통을 도와주는 통역 직원도 서있었다.
“원장님, 조금 일찍 오후 진료를 시작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환자들이 대기하고 있어요.”
“네? 벌써요?”
간호사의 말을 들은 한지호가 눈을 크게 떴다.
아침에는 비교적 조용했다.
그런데 점심 시간부터 환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리펄스 베이에 거주하는 현지인들이 어제 홍콩 언론을 장식한 기사를 보고 발걸음을 한 모양이다.
밥상이 차려지고 있다.
차려진 상을 잘 떠먹어 소화시키는 건 한지호의 몫이다.
한류스타 유대성과 런런런 멤버들 덕택에 한 번 방문한 환자들을 두 번, 세 번 찾아오는 단골로 만들어야 한다.
한지호는 마음을 다잡고 간호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진료 준비 들어가죠. 부원장님, 그리고 다른 직원들도 스탠바이 합시다.”
“네!”
모두 우렁차게 대답을 했다.
좋은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중국 언론의 대대적인 주목을 받으며 원화 한의원이 널리 알려졌으니 직원들의 사기가 오를 수밖에 없었다.
머릿수는 적지만 용기백배한 병사들은 대군(大軍)도 쉽게 무찌른다.
전쟁에서 중요한 건 덩치보다 기백이다.
한지호가 이끄는 홍콩 원화 한의원은 유대성과 런런런 멤버들의 방문을 계기로 똘똘 뭉치게 됐다.
홍보 효과 이상의 수확을 거둔 셈이다.
아무래도 홍콩에서 일을 내도 아주 크게 낼 듯 싶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진료를 준비하기 시작한 한지호의 얼굴에 뿌듯한 빛이 엿보였다.
마치 홀로 일기토에 나가 적장의 목을 베고 돌아온 장수와 같은 표정이다.
개인기로 유대성을 치료하고 기회를 잡았으니 일기토에서 적장을 베어 전세를 바꾼 것이나 다름없다.
원화(元化)라는 이름의 군단은 더 많은 승전보를 울리기 위해 진군할 것이다.
그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
한지호가 홍콩에서 유대성을 치료했다는 소식은 한국에서도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당연한 일이었다.
유대성은 국민 MC로 10년 가까이 연예계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중국 투어 도중에 불거진 그의 건강 문제는 한국 팬들도 근심하게 만들었었다.
그런데 국민 한의사로 알려진 한지호가 한국도 아닌 홍콩에서 유대성을 치료한 것이다.
영화 같은 인연과 스토리다.
그 사건을 계기로 중국에서 우리나라 한의학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한지호는 환자 한 명을 치료했을 뿐인데 외국에서 국위선양을 한 영웅 대접을 받았다.
잠잠해질만 하면 꼭 한 번씩 대형 뉴스를 터트리며 주목을 받는 한지호를 오뚝이라 부르는 팬들도 생겼다.
이슈의 중심에서 사라지면 다시 복귀하고, 사라지면 또 복귀하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연예인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던 한지호는 명동이나 홍대를 마음 놓고 다니기 힘들어졌다.
그를 알아보고 폰을 꺼내 사진을 찍거나 인증샷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지난번에는 강남에서 식사를 하는데 대뜸 손목을 내밀며 진맥을 요구한 아주머니도 있었다.
막무가내식 요구에 단호하게 대응하면 인터넷에 악플이 올라온다.
유명인의 고충을 한지호도 체감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지호는 눈이 보이지 않는 짙은 미러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짧은 치마를 입은 유초아가 함께였다.
여름방학임에도 학과 연극 준비에 여념이 없는 그녀가 오랜만에 시간을 냈다.
둘은 한지호가 홍콩에 있을 때도 틈틈이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유초아가 성인이 되어 D대에 들어간 후 연락하는 횟수가 늘어난 것 같았다.
아무래도 고등학생 시절보다는 자유로워졌으니 부쩍 가까워졌다.
사실 유초아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한지호는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며 지방에 머물렀었다.
전역을 하고, 개원을 한 타이밍과 그녀의 대학 진학이 잘 맞아떨어진 것이다.
“괜찮은 것 같지?”
나란히 걷던 한지호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유초아는 큰 눈망울로 사방을 돌아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빠. 사람들이 못 알아보는 거 같아요.”
“얼른 들어가자. 거의 다 왔어.”
보통 한지호는 차를 타고 이동한다.
새하얀 벤틀리 역시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무분별한 관심을 피하기 쉽다.
그러나 오늘은 차를 세우고 길을 걸어야만 했다.
차가 진입하기 힘든 이태원 경리단길에서 유초아를 만났기 때문이다.
작년부터 서울에서 가장 핫한 장소로 떠오른 경리단길은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들이 천지다.
이런 길에 차를 들고 오는 건 자살행위다.
한지호는 인터넷에서 미리 검색해둔 멕시칸 레스토랑으로 얼른 들어갔다.
끼이이익-
가게 문을 열고 실내에 들어오니 긴장이 좀 풀렸다.
물론 레스토랑 안에서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나오겠지만, 거리에서 불특정다수의 폰 카메라를 상대해야 하는 것보단 훨씬 낫다.
한지호는 구석 자리에 앉아서 선글라스를 벗었다.
“미안. 나 때문에 너도 괜히 불편하겠다.”
“아니에요. 나보다는 매번 어디 다닐 때 오빠가 피곤할까봐 걱정이에요.”
“어디서 배웠는지 말도 참 예쁘게 하네.”
“어디긴요, 천사원에서 배운 거죠.”
한지호와 유초아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천사원의 사춘기 청소년과 꼬마 소녀로 만났던 두 사람이 이렇게 번듯하게 큰 건 기적이다.
그 기적을 계속 이뤄내기 위해 한지호는 원화 재단을 세워 천사원을 후원하고 있었다.
앞으로 제2의 한지호, 제2의 유초아가 천사원을 통해 꾸준히 배출되기를 바랐다.
주문을 받으러 온 점원에게 타코와 브리또, 무알콜 칵테일을 시킨 한지호는 물을 따르며 말을 이었다.
“연극 준비는 잘 되고 있어? 곧 무대에 오르지?”
“힘들긴 해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제가 신입생인데 여주인공을 맡아버려서…… 많이 부담 되지만 열심히 하려구요.”
“오픈 공연은 언제야?”
“다음 주 금요일이에요. 학교 소극장에서 2주 동안 공연하니까 혹시 오빠도 시간 된다면…….”
“당연히 가야지. 오프닝에는 못 가도 꼭 보러 갈게. 수녀님이랑 아이들도 봐야겠네.”
“마리아 수녀님과 아이들은 오프닝 공연 때 오기로 했어요.”
“참 신기하다. 초아 니가 언제 이렇게 다 커서 연극도 하고 말야.”
“지호 오빠, 저도 이제 성인이에요, 성인.”
유초아가 볼에 바람을 불어넣고 일부러 삐진 표정을 지었다.
아이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녀의 말대로 더 이상 애 취급을 하긴 어려웠다.
옅은 화장을 하고 짧은 치마를 입은 유초아는 누가 봐도 매력적인 여성이다.
아직 앳된 구석은 남아있어도 여성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사실 한지호도 가끔 유초아가 여자로 보여 당혹스러울 때가 있었다.
“타코와 브리또 나왔습니다.”
그때 마침 점원이 주문한 음식을 들고 테이블로 다가왔다.
한지호는 언제쯤 스케줄을 비워 유초아의 연극 공연을 보러 갈지 생각하며 포크를 들었다.
“연극 오프닝까지 일주일 남았으니 더 힘내. 지치지 말라고 쏘는 거야.”
“네! 바쁠 텐데 이렇게 시간 내줘서 진짜 고마워요, 오빠.”
“시간이야 얼마든지 낼 수 있지. 그런데 너야말로 나 만날 시간에 소개팅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냐?”
“소개팅이요?”
“응. 신입생 때 그런 거 엄청 많이 들어오잖아. 연영과면 인기 폭발인데.”
“안 해요. 무슨 소개팅이에요. 그리고 비슷한 나이대의 남학생들 보면 다 애 같아요.”
유초아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인상을 찡그리는 것마저도 CF에 나오는 한 장면 같았다.
한지호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타코를 들어 유초아의 접시에 놓아줬다.
집중력을 최고조로 발휘해야만 했던 홍콩에서의 시간을 지나 여유로운 일상을 즐기니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서울에서 훨씬 더 많은 환자를 진료하지만, 그래도 외국이 아닌 우리나라가 편하다.
고향이 최고라는 건 다른 나라에서 부대껴봐야 느낄 수 있다.
유초아와 같이 보내는 서울의 저녁, 날씨는 무덥지만 공기는 달달했다.
+++
“원장님, 확인하셔야 할 연락이 왔습니다.”
사무장 박우식이 원장실 문을 열고 들어와 말했다.
한지호는 서울 원화 한의원에서 환자들을 진료하고, 다음 예약 환자가 올 때까지 잠시 쉬는 중이었다.
부원장 문재영도 출근하지 않는 날이라 평소보다 진료 스케줄이 빽빽했다.
그렇기에 중요한 일이 아니면 휴식을 방해하지 말라고 일러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우식이 직접 2층 원장실로 올라왔을 정도면 보통 일은 아닐 것이다.
박우식은 웬만한 일에 호들갑을 떠는 성격이 아니다.
그렇게 묵직한 태도 때문에 한지호의 신뢰를 사고 있다.
한지호는 끊이지 않았던 진료로 인해 피곤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박우식을 쳐다봤다.
“무슨 일입니까?”
“보건복지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양성문 장관님께서 원장님께 전화를 드렸는데 받지 않으신다고……. 가능하시면 장관님께 직접 전화를 부탁한다는 연락입니다.”
“양 장관님께서? 직접?”
“네, 그렇습니다.”
박우식이 왜 2층으로 올라와 휴식을 방해했는지 수긍이 갔다.
무려 장관의 호출이다.
한지호는 가운에 넣어둔 스마트 폰을 꺼냈다.
진료 시간에는 무음으로 바꿔 놓기에 전화가 와도 알아차릴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폰에는 몇 통의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그 중에 양성문의 이름도 보였다.
Y대 암센터의 센터장 최규열의 소개로 인연을 맺은 양성문은 한지호를 무척 아꼈다.
양성문의 권유로 한지호는 보건복지부의 정책 자문위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양성문은 장관이라는 이유로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그가 보건복지부 직원을 시켜 호출까지 할 정도라면 중요한 사안일 게 확실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전화해보죠.”
한지호는 박우식을 내보내고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얼마 울리지도 않았는데 전화기 너머에서 양성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원장!”
“장관님,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진료 중이라 전화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겠지요. 바쁜 시간에 전화한 내가 미안한 일이지. 그런데 꼭 알려야 할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한의학 치료를 받길 원하는 중국 공산당 간부가 있어요. 비공식적으로 내게 도움을 요청했고, 우선 중국 영토에 진출해있는 원화 한의원과 위천 한방병원을 알려줬소. 한 원장이 미리 대비를 하면 좋은 기회가 생길 수 있지 않겠어요?”
한지호는 양성문의 말을 들으며 눈을 빛냈다.
쉴 틈이 없다.
또다시 전력으로 질주 할 순간이 다가온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