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9장, 기적이 아닙니다. (2)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더.”
“편한 마음으로 검사를 받으시면 됩니다.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한지호의 말에 김금순의 입이 귀에 걸렸다.
옆에서 듣고 있던 그녀의 아들도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의사가 해주는 한 마디가 환자와 보호자에겐 무엇보다 큰 의미를 지닌다.
한지호는 두 사람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몸을 돌렸다.
단순히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주치의로서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환자에게 전달할 수는 없다.
그는 명확한 의학적 근거를 가지고 소견을 전달 했을 뿐이다.
복도로 나온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환자 앞에서는 감정 표현을 절제해야 하기에 억지로 누른 기분을 뒤늦게 누렸다.
‘내가 틀리지 않았다면…… 오늘 일이 날 거야, 일이.’
그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교수 회의실로 걸어갔다.
조금 있으면 김금순 환자는 정해진 스케줄을 따라 정밀 검사를 받을 것이다.
그동안 교수 회의실에서 결과를 기다리고, 점심이 지나면 센터장과 함께 퇴원 심사를 할 예정이다.
오후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질 것 같았다.
검사 결과가 나쁘면 퇴원은 미뤄지고, 한지호가 계속 치료의 주도권을 잡기도 어려워진다.
반면 수치가 좋게 나오면 한의학 치료를 밀어붙일 수 있는 확실한 명분을 얻게 된다.
더 이상은 김기준 교수나 박상욱 교수도 항암과 방사선 치료를 강권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한지호의 걸음이 사뭇 가벼워진 것 같았다.
교수 회의실에 가장 먼저 도착한 그는 편한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김기준과 박상욱의 놀란 표정을 보겠다는 일주일 전의 다짐을 이룰 수 있을지, 오늘 해가 떨어지기 전에 알게 될 터이다.
예감이 좋은 걸까.
은은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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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마 한 원장이 큰 코를 다치게 되겠지.”
“그럼요, 교수님. 항암을 안 하고 한의학 치료라니 말이 됩니까? 침 좀 놓고, 보약을 먹인다고 환자 상태가 안정될 거라니……. TV 나오고 유명해졌다고 이렇게 막 나가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김기준 교수의 시니컬한 말을 젊은 의사가 열성적으로 거들었다.
김기준 주위에는 서너명의 의료진이 원을 그리고 서있었다.
그들은 학과장 급 주임 교수인 김기준의 직계 후배이자 제자들이었다.
췌장 담도 암센터뿐 아니라 소화기내과 전반에서 김기준은 신망을 얻고 있다.
실력도 뛰어나거니와 자기 라인의 사람들을 잘 챙기기 때문이다.
몇 년 뒤면 그가 췌장 담도 분야의 책임자가 될 거란 전망이 유력했다.
그래서일까.
김기준이 한 마디만 흘려도 주위에 몰린 다른 의사들이 날선 말을 쏟아냈다.
첫 째는 김기준의 눈에 들기 위해서이고, 둘 째는 암센터 내부의 의료진들이 한지호를 달갑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유 교수님과 센터장님께서 무리하게 추진하신 프로젝트입니다. 한지호 그 사람, 이제 겨우 서른 살인데……. 우리로 치면 인턴 막 끝내고 레지 할 나이 아닙니까? 그런데 주임 교수님들과 같은 선상에서, 그것도 자기가 주치의라고 고집을 부리다니요.”
“유명세가 무섭긴 무서운 건가 봅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우리 암센터에서 어린 한의사가 활개치는 모습을 다 보게 되다니… 쯧쯧.”
“아무튼 검사 결과가 다 나오면 본인도 부끄러움을 느끼겠지요. 그럼 우리 김 교수님께서 절차대로 항암을 시작하시고, 암센터에 굳이 번잡스러운 협진 같은 건 필요치 않다는 게 증명 될 겁니다.”
“그럼, 그럼. 양한방 협진은 무슨. 이번에는 유방 교수님이 크게 무리수를 두셨어. 어쩌면 차기 췌장 담도 암센터 헤드 자리를 의식하셨는지도 모르겠군.”
김기준은 다른 의사들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한지호와 유방에 대해 다소 과한 언급도 있었지만 말리지 않았다.
그는 흐뭇한 얼굴이었다.
굳이 자기 입으로 험담을 안 해도 충직한 의료진들이 대신 해주기 때문에 속이 시원한 것이다.
이들이 단지 김기준 앞에서만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의 주위에 몰린 의사들은 Y대 암센터 내부의 분위기를 대변하고 있었다.
단지 췌장 담도 암센터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Y대 암센터라는 거대한 의료 조직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들끓고 있었다.
협진 프로젝트로 언론의 관심이 지나치게 한 쪽에 쏠렸고, 유방의 수술 이후 다른 의사들을 납득시킬 확연한 성과가 나오지 않은 탓이다.
Y대 암센터의 의사들은 한국 현대 의학의 최고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새파랗게 젊은 한의사를 끌어들인 유방과 최규열 센터장을 좋게 바라보지 않았다.
만약 오늘 김금순의 검사 결과가 기대만큼 좋지 않으면 단순히 협진 프로젝트의 주도권이 바뀌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암센터 의사들이 단체로 들고 일어나서 협진 프로젝트 자체가 폐기 될 가능성도 있다.
그리 되면 한지호뿐 아니라 한의학계 전체가 국민적인 망신을 당하는 셈이다.
“두고들 보지. 이 협진 프로젝트, 그리고 한 원장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말이야.”
김기준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앳된 얼굴의 인턴 의사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교수님!”
그의 부름에 김기준과 다른 의사들이 고개를 홱 돌렸다.
김기준 옆에 서있는 의료진은 모두 전문의들이다.
레지던트만 해도 인턴에게는 까마득한 선배다.
갑자기 주목을 받은 인턴 의사는 얼굴이 빨개진 채 조심스레 말을 전했다.
“저, 저기… 센터장님께서 김 교수님을 회의실로 모셔 오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그럼 가봐야지.”
김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실로 소집령이 떨어진 걸 보니 김금순의 검사 결과가 하나 둘 나오기 시작한 모양이다.
“김 교수님, 멋있게 한 방 먹이시고 이야기 들려주십시오.”
“오늘 밤에 센터 앞에서 간단히 맥주라도 한 잔 하며 무용담 듣겠습니다.”
“하하하하하!”
김기준의 옆을 지키던 의사들은 결과가 이미 정해진 것처럼 자기들끼리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내가 아주 크게 한 턱 살 테니까 다들 기다리고 있으라고!”
김기준도 그들과 함께 웃은 뒤 인턴을 앞장세우고 교수 회의실로 향했다.
한바탕 대리 뒷담화를 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 것일까.
김기준은 인턴의 어깨를 두드리며 괜한 덕담을 늘어놓았다.
“힘들지? 그래서 인턴 생활을 인생이라 부르잖나. 인생만큼 길고 힘들게 느껴지는 인턴 생활이라서 말이야.”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교수님.”
“힘들어도 잘 버티게. 그럼 밝은 미래가 열릴 테니. 나처럼 말이야. 하하하하.”
어색해하는 인턴의 등을 또 한 번 세차게 두드려준 김기준은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회의실 문 앞에 섰다.
여기까지 그를 안내한 인턴이 대신 문을 열어줬다.
김기준은 마치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하는 영화 주인공처럼 당당한 자세로 들어갔다.
교수 회의실 안에는 이미 센터장 최규열과 유방 교수, 박상욱 교수와 한지호가 도착해 있었다.
“다들 와 계셨습니까? 검사 결과가 나왔나봅니다!”
김기준이 들뜬 목소리로 말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박상욱 교수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나빴다.
창백하게 질린 것이 꼭 귀신이라도 본 사람 같았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박상욱 교수에게 안색이 왜 그렇냐고 질문을 할 순 없었다.
그저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걸 느낄 뿐이었다.
“김 교수도 왔으니 자세히 브리핑을 시작해도 되겠군. 먼저 모인 사람들과는 간단하게 결과만 공유했네만.”
센터장 최규열이 검사 결과 브리핑의 시작을 알렸다.
말수가 적기로 유명한 그는 눈짓으로 유방에게 지시를 내렸다.
최규열의 시선을 받은 유방은 커다란 프로젝터 화면 앞으로 나갔다.
한지호가 김금순 환자의 주치의지만, 유방이 수술을 집도한 의사로서 브리핑을 대신 하는 것이다.
만약 한지호가 검사 결과를 발표하면 김기준이나 박상욱이 괜한 꼬투리를 잡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기에 협진 프로젝트 내부의 신빙성을 위해 유방이 나서기로 했고, 한지호도 이미 동의한 바였다.
자리에 앉은 김기준은 불안한 얼굴로 유방과 박상욱을 번갈아 쳐다봤다.
점점 더 하얗게 질려가는 박상욱의 안색이 심상치 않았고, 유방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려워지고 있었다.
후배 의사들의 뒷담화를 조장한 후 어깨를 쫙 펴고 회의실로 들어올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됐다.
“아시다시피 오늘 오전 김금순 환자가 여러 검사를 받았습니다. 결과가 나오려면 며칠이 걸리는 검사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후에 나온 결과들로도 김금순 환자의 현재 상태에 대한 판단을 내릴 근거가 될 것 같습니다. 말보다는 화면에 수치를 띄우도록 하겠습니다.”
유방 교수는 긴 설명 대신 눈에 보이는 데이터로 검사 결과를 알리려 했다.
일반인이나 어린 의대생들이 아닌 암센터의 주임 교수들을 대상으로 하는 브리핑이다.
몇 가지 수치만 보여주면 누구보다 먼저 검사 결과를 파악할 것이다.
타닥, 탁!
미리 말을 맞췄던 한지호가 랩탑 컴퓨터의 키를 눌렀다.
그러자 곧바로 검사 결과가 기록된 화면이 프로젝터에 떠올랐다.
김기준은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표정으로 화면을 쳐다봤다.
거의 노려본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얼굴빛이 안 좋던 박상준도 화면 안으로 빨려 들어갈 듯 집중했다.
“수, 수치가…….”
박상준이 말을 더듬었다.
김기준의 안색도 그를 닮아갔다.
턱밑에서부터 얼굴빛이 점점 새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최규열과 유방은 말을 아꼈고, 한지호는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두 교수를 쳐다봤다.
일주일 전의 각오.
놀라서 턱이 벌어지는 김기준과 박상준의 얼굴을 보겠다는 다짐이 지켜졌다.
두 교수의 턱이 벌어지진 않았지만, 훨씬 더 드라마틱한 표정 변화를 보여줬으니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이 결과가… 정말 맞는 겁니까?”
김기준이 당황해서 질문을 던졌다.
대답은 유방이나 한지호 대신 최규열이 해주었다.
과묵한 최규열의 목소리에서 언짢은 기색이 느껴졌다.
“김 교수, 우리 센터의 검사 실력을 의심하는 건가? 질문이 조금 과했네.”
“센터장님, 그런 뜻이 아니라……. 죄송합니다.”
김기준이 고개를 푹 숙였다.
검사 결과는 놀라웠다.
김금순의 모든 수치가 급격히 개선 됐고, 전반적인 건강 상태까지 정상인과 근접한 수준으로 회복 돼 있었다.
사실 암의 완치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문제다.
수술 후 3년에서 5년 동안 재발하지 않아야 완치 판정을 받는다.
그러나 다양한 검사 결과와 수치로 재발률을 어느 정도 예상하는 건 가능하다.
지난주에 비해 체내 수치가 많이 개선됐고, 이 페이스가 유지된다면 김금순의 완치를 긍정적으로 기대할 수 있다.
무엇보다 믿기 힘든 건 전반적인 건강 상태다.
항암 치료를 받는 환자는 면역력이 약해지고 극심한 고통을 겪기 쉽다.
그렇기에 암 수치가 낮아지는 대신 건강 상태가 악화되고, 그로인한 부작용이 많은 문제를 낳기도 한다.
하지만 김금순은 전혀 달랐다.
항암의 경과도 좋지만 인체의 밸런스와 건강이 더 빨리 회복되고 있었다.
아무리 1기암의 수술이었다고 해도 2주 만에 이만큼 컨디션이 좋아지는 케이스는 드물다.
한지호가 여러 번 강조했던 인체친화적 한의학 치료가 빛을 본 것이다.
잠시 교수진의 반응을 지켜본 유방은 담담한 목소리로 검사 결과를 정리했다.
“보신 것처럼 김금순 환자의 수치가 1차 항암 치료를 받는 환자들의 평균치와 근접하게 개선됐고, 종합적인 컨디션 회복 속도 역시 매우 우수합니다. 검사 결과와 환자의 의견을 미루어 봤을 때, 한 원장님의 한의학 치료가 항암과 방사선 치료를 대체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려도 될 것 같습니다. 물론 특정 상황에서만 적용할 수 있다는 전제를 붙여야겠지만 말입니다.”
군더더기 없는 정리였다.
한지호가 대신 검사 결과를 알리고 설명해준 유방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감사합니다, 유 교수님.”
“별 말씀을. 이것도 내 일이오. 환자 예후가 좋은 것을 보니 한 원장님이 정말 수고 많으셨소.”
“그것도 제 일이죠.”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신뢰어린 눈빛을 주고받았다.
반면 김기준 교수와 박상준 교수는 인턴 시절 레지던트 선배들에게 털릴 때만큼 멘탈이 흔들린 것처럼 보였다.
더 나올 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센터장 최규열이 나섰다.
“김금순 환자의 퇴원 수속을 허가하고, 당분간 통원 치료는 우리 센터가 아니라 원화 한의원으로 하도록 하겠네. 어차피 한의학 치료를 계속 할 거면 그게 나을 터이니. 오늘부로 그동안 금지했던 외부 접촉을 풀고, 협진 프로젝트의 1차 성과를 알리도록 하지. 한 원장의 진단과 한의학 치료, 그리고 우리 센터의 수술과 정밀 관리가 힘을 모아 좋은 결과를 낸 것 같군.”
최규열은 아예 김금순의 통원 치료를 원화 한의원에 맡겼다.
한의학 치료에 전념하고 있으니 굳이 Y대 암센터로 통원하게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주기적으로 암센터에서 검사를 하고 예후를 체크하겠지만, 이후의 치료에 대한 전권을 한지호에게 넘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지호는 목 끝까지 치솟아 오른 환호성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억눌러야 했다.
김기준과 박상욱이 말 한 마디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통쾌했다.
그들에게 사적인 악감정은 없었다.
의술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어 대립했던 것뿐이다.
그러나 한지호도 사람인 이상 속 시원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김금순 환자가 완전히 안정될 때까지 긴밀히 협조하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의 믿음직스러운 말에 최규열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협진 프로젝트를 제안한 당사자인 유방도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쨌거나 환자가 건강해지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협진 프로젝트는 최우선의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언론에서 공식적인 보도 자료를 받으면 앞 다퉈 대서특필을 할 게 뻔했다.
한지호는 또 다시 전국적인 화제의 주인공이 될 것 같았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지만, 쏟아질 국민적인 관심보다 더 뿌듯한 일은 따로 있었다.
양한방 협진과 항암 치료법에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는 점이 가장 기뻤다.
그는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한의사로 거듭나는 중이었다.
삼국지 시대였으면 진즉 의성(醫聖)이라는 칭호가 붙었을지 모른다.
어느새 현생의 한지호가 전생의 규호를 이만큼이나 따라잡은 것이다.
기적이나 우연에 의한 일이 아니다.
의술 하나만 믿고 환자를 진심으로 치료하는 것.
바로 그 마음가짐이 한지호를 꾸준히 성장시키는 밑거름이었다.
그의 성장은 앞으로도 쉽게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