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32화 (132/255)

# 132

4장, 타통(打通) (1)

‘망설일 바에는 아예 시도하지 않는 게 낫다.’

한지호는 무가(武家)에서 전해지는 오래 된 격언을 떠올렸다.

온힘을 다해 휘두르지 않을 거라면 절대 칼을 뽑지 말라.

어설프게 뽑은 칼은 주인의 목숨을 앗아가는 법이다.

환자를 치료할 때도 마찬가지다.

사실 모든 세상사가 그렇다.

고민은 깊이 해야 하지만, 결심한 뒤에는 주저 없이 행동으로 밀어 붙여야 한다.

림커창의 심장 부근에 내공을 응집시킨 한지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용암과 같은 내공으로 단중혈을 뚫어내고 백회혈까지 올라간다.

환자인 림커창이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면, 그 여파로 심장이 마비되면 모든 책임은 한지호 혼자 뒤집어 써야 한다.

계속해서 최악의 사태를 떠올리면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한지호는 이곳이 홍콩의 낯선 병원이고, 등을 돌린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림커창이 칭화 그룹 회장의 이복 형이라는 사실을 머리에서 지웠다.

몰아(沒我)의 경지다.

나 자신까지 잊어버리고 한 점에 집중하는 궁극의 경지가 발현되고 있었다.

삼국지 시대의 무인들 중에서도 몰아의 경지에 도달한 인물들은 전설적인 신화를 만들어냈다.

조조의 대군 속에서 아두를 구해낸 조자룡은 몰아의 경지에 빠져 있었고, 뜨거운 술이 식기 전에 동탁의 맹장 화웅을 죽이고 돌아왔던 관우의 무예도 몰아의 경지로 설명할 수 있다.

무인이기 이전에 의원인 한지호는 림커창의 주화입마를 치료하며 처음으로 몰아의 경지를 맛봤다.

어려운 환자를 대할 때마다 한 단계씩 새로운 경지에 오르는 것이다.

파파파파팍-!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단단하게 모인 내공이 단중혈로 솟구쳤다.

기혈이 틀어지며 림커창의 단중혈은 부정한 탁기로 꽉 막혀 있었다.

한지호의 내공은 뜨겁고 순수한 힘으로 탁기와 충돌했다.

충격요법으로 단전을 펼 때보다 훨씬 더 강렬한 후폭풍이 몰아쳤다.

“쿨러억!”

앉아있던 림커창이 기침을, 아니 피를 토해냈다.

가부좌를 튼 그의 상체가 활시위처럼 격하게 꺾였고, 하마터면 한지호의 손이 등에서 떨어질 뻔 했다.

기침과 동시에 검은색 피를 한 움큼 뱉어낸 림커창의 눈동자가 반쯤 풀렸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고통이 일시에 몰아친 까닭이다.

“…….”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지켜보던 첸은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블랙문 카지노에서 조준혁이 자기 손을 내려 칠 때보다 더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림커창의 등에 손을 붙이고 있는 한지호도 말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두 눈을 감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피를 토해낸 림커창도 마찬가지다.

한 차례 몸을 꺾었던 그는 미동도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병상 위로 토해낸 검붉은 핏덩이만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렸다.

첸은 조심스레 한 걸음 다가가 핏덩이를 확인했다.

아무래도 검붉다는 표현을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붉은 핏기는 거의 없고, 새까만 덩어리가 선지처럼 뭉쳐져 있었다.

쳐다보기만 해도 비위가 상할 지경이다.

이런 덩어리가 사람의 몸속에 있었다는 걸 믿기 힘들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림커창과 한지호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첸은 슬슬 걱정이 깊어졌다.

혹시 치료가 잘못된 게 아닐까.

만약 림커창이 무리한 치료의 부작용으로 급사했다면, 그게 아니라도 상태가 더 나빠졌다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한지호를 적극적으로 추천한 첸 역시 책임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 이전에 사람이라면 눈앞에서 피를 토한 이의 안위가 염려되는 게 당연했다.

“닥터 한? 배, 백부……?”

첸이 두 사람을 불렀다.

과연 둘 중 한 명이라도 대답을 해줄 것인가.

먼저 입을 연 쪽은 한지호였다.

그는 여전히 두 손을 림커창의 등에 고정시킨 채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괜찮… 습니다.”

“네?”

한지호는 분명 It's Okay라고 느릿하게 말했다.

첸은 곧장 이해 할 수 없다.

림커창이 피를 토해낸 것, 그리고 아직까지 고개를 숙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하지만 한지호보다 더 림커창의 상태를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의 내공이 림커창의 몸 안에 들어가 내부를 속속들이 살피고 있기 때문이다.

내시경이 연결된 것처럼 내공으로 이어졌으니 한지호가 괜찮다고 한 건 정말 괜찮아서이다.

바로 그 때, 한 박자 늦게 림커창이 고개를 들었다.

푹 숙였던 고개가 들리며 림커창의 얼굴이 드러났다.

첸은 또 다시 놀라고 말았다.

어쩌면 림커창이 핏덩어리를 뱉어낼 때보다 더 놀랐는지도 모른다.

그의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기 때문이다.

피를 토해내고 채 5분이 지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짧은 시간 안에 안색이 밝아질 수 있단 말인가.

돈으로 할 수 있는 세상의 모든 경험을 다 해봤다고 자부하는 첸도 납득이 안 됐다.

“마, 말도…… 이건 정말 말이 안 되잖아요.”

“아직 모든 과정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설명은 나중에 하겠습니다, 첸.”

한지호가 어안이 벙벙해진 첸을 진정시켰다.

림커창은 모든 것을 한지호에게 맡겼다는 듯 편안한 표정으로 허리를 곧추세웠다.

단중혈을 뚫어냈으니 백회혈까지 내공을 대주천시키는 일만 남았다.

그 사이에도 림커창의 혈색은 빠르게 좋아지고 있었고, 까칠까칠했던 피부에도 윤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첸은 기적을 체험한 사람처럼 넋이 나가 둘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칭화 병원 센트럴 지점 808호 안에서 인간의 상식과 한계를 넘어선 치료 현장이 열렸다.

한지호의 의술은 홍콩의 황태자라 불리는 첸도 겸손하게 만들었다.

808호 안이 다시 고요해진 가운데 뜨겁고 순정한 기운만이 거세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

휘이이이-

한줄기 바람이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지호와 첸은 칭화 그룹 센트럴 지점의 옥상 난간에 서있었다.

길고 고된 치료를 마친 림커창은 조용히 몸을 추스리고 있다.

병실 안에서 대화를 나누면 그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아 옥상으로 올라온 것이다.

진땀을 한 바가지 넘게 흘린 한지호는 바람을 쐬고 싶기도 했다.

“컨디션은 괜찮아요? 힘들어 보이는데.”

“솔직히 말해 썩 좋지는 않습니다.”

한지호가 옅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첸이 말한 것처럼 그의 눈 밑에 진한 다크 써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림커창을 치료하기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몇 시간 동안 주화입마를 해소하는데 매달리면서 너무 많은 기력을 소진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체력과 집중력만 썼어도 보통 사람이면 진즉 탈진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한지호는 내공까지 소모했다.

사용한 내공은 시간이 지나고 운기조식을 하면 다시 채워지겠지만, 일시적 공백은 어쩔 수 없다.

묵직하게 느껴지던 단전이 헐렁거리는 느낌이었고, 급격한 체력 저하와 맞물려 피로감이 몇 배 더 심해졌다.

죽어가던 림커창이 생기를 얻은 대신 한지호가 잠시나마 그의 몫을 짊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다가 닥터 한도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렇게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괜찮아질 겁니다.”

“그럼 정말 다행이구요. 그나저나 블랙문에서보다 더 놀랐어요. 닥터 한의 한계는 어디인지 내가 감히 예상할 수가 없네요.”

“림커창 환자를 치료한 것 말입니까?”

“맞아요. 다 죽어가던 사람이 새로운 영혼을 받아들인 것처럼 의욕 넘치는 눈빛을 하게 됐잖아요? 피를 그만큼 토하고서 완연히 건강해졌죠. 얼굴색부터 피부 윤기까지 모든 게 눈으로 봐도 알 만큼. 정밀검사를 해도 놀라운 결과가 나올 것 같아요, 보나마나.”

“주화입마로 인한 구토와 설사 문제가 해결 됐으니 식사도 가능해질 테고, 점점 더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올 겁니다.”

한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첸의 감탄을 받아들였다.

단중혈을 뚫는 고비를 무사히 넘겼고, 정수리의 백회혈을 통해 한지호가 쏟아 부은 내공을 온전하게 대주천 시켰다.

찌그러졌던 단전과 엉킨 기혈이 제자리를 잡았으니 림커창이 건강해지는 건 시간문제다.

병원에서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며칠만 지내면 원래대로 쌩쌩해질 터였다.

다만 한지호는 그에게 신신당부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앞으로 두 번 다시는 기공 수련에 관심을 가지지 말라고 전한 것이다.

기공 수련을 잘 하면 건강에 도움이 되지만, 한 번 주화입마에 빠졌던 사람은 두 번 빠지기 쉽다.

림커창은 주화입마 위험군에 속하는 사람이다.

이미 죽을 고비를 경험해서인지 한지호의 경고에 림커창도 순순히 다짐을 했다.

“닥터 한이 아니었으면 세상 누구도 해내지 못 할 일이었어요.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사람 하나를 살리다니, 그것도 칭화 병원에서 손을 쓰지 못하던 사람을…….”

첸은 감탄을 하고 또 해도 모자라지 않는다는 듯 계속 탄성을 흘렸다.

절대 오버 하는 게 아니었다.

한지호는 진맥으로 림커창의 상세를 정확히 맞췄을 때부터 808호 안의 모두를 소름 돋게 만들었다.

기적 같은 치료로 화룡점정을 이뤘으니 오늘 일은 두고두고 회자 될 것이다.

“그런데 검붉은 핏덩이가 나온 건 대체 뭐였죠? 그러고 한동안 두 사람이 움직이지 않아서 얼마나 불안했다고요.”

첸이 투정하듯 질문을 던졌다.

한지호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무덤덤한 어조로 답했다.

“혈도에 쌓여 있던 탁기와 어혈입니다. 주화입마에 빠지기 전부터 체내에 누적 된 어혈까지 제거 됐으니 림커창 환자는 앞으로 꽤 장수 할 겁니다.”

“의술의 세계는 정말 심오하네요.”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고, 쉽게 생각하면 또 단순한 게 의술의 이치죠.”

한지호는 선문답 같지만 깊은 깨달음이 담긴 말을 했다.

첸이 100% 알아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 그런데…….”

이번에는 한지호가 질문을 던질 차례였다.

그가 고개를 돌려 옆에 선 첸의 얼굴을 쳐다봤다.

“재키 마는 왜 안 오는 겁니까? 웨이 림 회장님의 직인이 찍힌 서류를 들고 오기로 했었는데.”

“약속을 어긴 건 절대 아니에요. 중간에 치료가 길어지는 것 같아서 내가 연락을 했어요. 괜히 와서 방해가 될까봐.”

“그랬군요.”

“방금 옥상으로 올라오기 전에 아버지와 통화를 마쳤어요. 아버지께서 재키 마와 함께 병원으로 오고 계세요.”

“네? 웨이 림 회장님이 직접?”

“직접이요. 이복 형이 죽다 살아났다는데 얼른 확인하고 싶으시겠죠. 그리고 닥터 한에 대해서도 궁금해 하시는 것 같네요. 우리 아버지의 흥미를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하하.”

첸이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한지호는 그가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느꼈다.

웨이 림이 온다, 바로 그 웨이 림이.

칭화 그룹의 회장이자 홍콩의 의료계와 금융계를 지배한 마이더스의 손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

평창동의 현금 부자인 황만금 회장보다, 위천 한방병원의 이사장인 조준혁보다 더 거물인 존재다.

사실 황만금과 조준혁은 세계 어디에 가도 꿀리지 않을 인물이다.

그러나 칭화 그룹의 회장과 동일 선상에서 거론할 수는 없었다.

자기 손으로 일구어낸 경영 능력만 따지면 조준혁은 입지전적이다.

언젠가 칭화 그룹을 능가할 회사를 만들어낼지 모른다.

하지만 현재에는 홍콩을 좌우하는 웨이 림의 영향력을 따라가긴 힘들었다.

느와르 영화에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삼합회도 웨이 림의 휘하에 들어갔다는 게 정설이다.

차이나 갱 중에서 가장 독한 조직이라는 삼합회까지 거느렸으니 홍콩에서는 황제라고 불리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한지호는 이미 재키 마와 첸으로부터 약속을 받았다.

림커창을 치료했으니 홍콩 중심지에 한의원을 열고 10년 치 임대료를 보장 받으면 된다.

그러나 웨이 림이라는 국제적인 주요 인사를 만나게 된다는 기대감이 더 컸다.

특별한 존재감을 가진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공부가 되기 때문이다.

고비를 넘기고 어마어마한 기회를 손에 넣은 한지호는 또 다른 운명을 예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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