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31화 (131/255)

# 131

3장, 무공과 의술 (2)

‘생각보다 더 심각하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한지호가 인상을 썼다.

두 눈을 감은 채 이마를 찡그리니 표정이 무척 심각해 보였다.

그를 지켜보고 있는 첸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내막을 몰라도 상황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림커창의 등에 두 손을 붙이고 추궁과혈을 시작한지 벌써 한 시간이 흘렀다.

빠르면 한 시간 안에 치료가 끝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아무래도 긴 밤 내내 고전을 해야 할 모양이다.

한지호는 한 시간 동안 림커창의 기혈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파악했다.

지금 림커창의 몸 안에는 한지호의 내공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한지호가 직접 자신의 내공을 조정하며 림커창의 혈도 구석구석을 살피는 중이었다.

마치 내시경 시술을 펼치는 것과 비슷한 원리였다.

“후우-.”

한숨을 길게 내뱉은 한지호가 눈을 떴다.

림커창의 등에서 손을 뗀 그가 첸에게 말을 전했다.

“잠시 쉬었다 하겠습니다. 내부 상태를 알았으니 본격적인 치료는 이제 시작할 겁니다.”

“그렇게 전하겠어요.”

한지호는 넓은 병상 침대 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스트레칭을 하며 굳은 몸을 풀었고, 지속적으로 소모한 내공을 잠시 쉬게 해주는 걸로 충분하다.

림커창도 가부좌를 풀고 잠깐이나마 휴식을 취했다.

그는 벽면에 등을 기다며 중국어로 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동안 첸과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은 림커창이 고개를 돌려 한지호를 쳐다봤다.

한 시간 전과 달리 그의 표정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적어도 치료를 받겠다는 최소한의 의욕은 생긴 것처럼 보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 한지호와 림커창은 서로를 바라보며 흐릿한 미소만 지었다.

한지호는 영혼이 떠나간 것 같았던 림커창이 웃는다는 사실 자체가 기뻤다.

한 시간의 탐색전이 끝나고 상황이 어렵다는 걸 알게 됐지만 확실한 동기부여가 됐다.

이어진 첸의 말도 한지호의 기운을 북돋워 줬다.

“닥터 한, 여기 이 사람. 아니, 이제 림 백부라고 불러야 할까요……. 아무튼 몸 안에서 뭔가 꿈틀꿈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고 하네요. 그러면서 닥터 한은 분명 자기를 낫게 해줄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첸이 새삼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한지호를 쳐다봤다.

그가 보기엔 림커창의 등에 손을 붙이고 한 시간 동안 앉아있었던 게 전부였다.

그런데 모든 의욕을 상실했던 림커창이 한지호를 신뢰하게 된 것이다.

첸은 한지호라는 한국의 한의사가 자신의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는 존재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한지호는 한지호대로 첸이 전해준 림커창의 말에 만족하고 있었다.

림커창은 기공 수련에 심취했던 사람이다.

주화입마에 빠진 것도 기공을 수련하며 생긴 부작용이다.

당연히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주화입마라는 부작용을 겪을 정도라면 일정 레벨 이상으로 기공 수련을 했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몸 안에서 한지호의 내공이 움직이는 걸 느꼈고, 그로인해 한지호가 의사이기 전에 기공을 다스리는 고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유야 어찌됐건 환자의 신뢰를 얻었다는 게 중요하다.

한지호는 기운을 차리고 다시 가부좌를 틀었다.

그가 자세를 취하자 림커창도 알아서 한지호 앞에 부좌를 틀었다.

첸을 통해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방금 전까지는 상상하기 힘든 림커창의 능동적인 모습이었다.

주화입마.

그 상상 못 할 고통에서 해방 될 실마리가 보이니 능동적으로 변한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한지호는 미소를 지우고 진중한 얼굴로 팔을 내밀었다.

처억!

그의 두 손바닥이 림커창의 보기 흉한 등에 맞닿았다.

맨살과 맨살이 접촉했지만 느껴지는 감촉은 까끌까끌했다.

사람의 피부가 아니라 쓰고 버려진 사포에 손을 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촉감에 신경 쓰고 있을 여유가 없다.

탐색전이 끝나고 진짜 시험이 시작 됐다.

삼국지 시대에는 무수한 고수들이 즐비했었다.

무공으로 천하를 놀라게 한 장수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추궁과혈이나 내기도인술은 무공만 잘한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공을 자유롭게 다루면서 동시에 인체의 혈도를 훤히 꿰고 있어야 한다.

무공과 의술 모두에 해박해야 하니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전생의 기억과 의술을 가진 한지호라고 해도 쉽게 생각 할 수는 없었다.

“통증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참아야 합니다.”

내력을 주입하기 전, 한지호가 경고를 했다.

첸은 한지호의 말을 그대로 림커창에게 전했다.

자발적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은 림커창은 그만한 각오를 했을 것이다.

기공을 익힌 림커창이 주화입마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해소를 위해서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모르지 않을 터.

한지호는 정신을 집중하며 단전의 내공을 두 손으로 밀어 넣었다.

곧바로 두 손이 뜨거워졌다.

평소에는 오금희로 쌓은 내공을 쓸 일이 많지 않다.

침을 놓으며 치료를 할 때도 내공의 일부만을 사용할 뿐이다.

이따금 신체 능력을 한계 이상으로 발휘할 때가 있지만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러나 타인의 몸에 내공을 주입해 치료를 하려면 지속적으로 많은 기운이 소모된다.

한지호로서도 경험이 거의 없는 일에 뛰어들어 도전을 하는 셈이었다.

“크흠.”

림커창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 나왔다.

한 시간 동안 탐색전을 펼칠 때와는 반응부터 달랐다.

그때는 엉클어진 기혈을 확인하기 위해 최소한의 내공만 주입했었다.

지금은 본격적인 치료를 위해 방대한 양의 내공을 림커창의 몸 안으로 주입하고 있다.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묵직한 충격을 느낄 수밖에 없다.

고통을 참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한지호는 림커창의 신음을 무시하고 그의 몸 안으로 들어간 내공을 움직였다.

슈우우욱-

귓가로 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기분이었다.

내공을 통해 연결 됐기에 림커창의 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즉시 전해져왔다.

한지호는 먼저 림커창의 단전으로 내공을 내려보냈다.

림커창의 혈도를 타고 한지호의 내공이 움직여 단전에 가 닿았다.

‘여기서부터 모든 게 시작이지.’

림커창의 단전은 황폐화 된 상태였다.

기공 수련을 꾸준히 했으면 미약하게나마 내공이 쌓여 있어야 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일반인보다 건강하게 사는 것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림커창의 단전에서 내공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주화입마 증상을 앓으며 평생 쌓았던 내공이 완전히 흩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전이라는 그릇 자체가 쪼그라들었다.

단전은 내공 말고도 생명의 진원지기를 담는 그릇이다.

그렇기에 동양의학에서는 두뇌나 심장만큼이나 단전을 중요하게 여긴다.

인체의 기를 다스리는 모체인 단전을 회복시키는 것이 급선무다.

‘찌그러진 그릇을 편다. 다시 기가 모여들 수 있도록.’

한지호는 목표를 분명히했다.

단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관이다.

그러나 인간의 몸 안에 확실하게 실존하고 있다.

마음을 먹은 그가 림커창의 단전 안으로 들어간 내공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화아아악-

파파팟!

원형으로 퍼져나간 내공이 찌그러져있던 단전의 벽을 두드렸다.

동시에 견디기 어려운 충격이 림커창의 하복부를 강타했다.

“커흐흡!”

이전보다 강도 높은 신음, 아니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새어 나왔다.

첸이 미리 주의를 주지 않았다면 8층의 의료진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을지 모른다.

“괜찮은 건가요?”

첸이 영어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한지호에겐 대답을 해줄 여유가 없었다.

제멋대로 엉클어지고 망가진 기혈을 원상복귀시켜 죽을 사람을 살려내는 치료다.

손쉽게 목표를 이룰 수 있을 리 없다.

한지호와 림커창 두 사람 다 인내력을 발휘해 이겨내야만 한다.

‘한 번 더!’

한지호가 마음을 굳게 먹고 내공을 퍼트렸다.

림커창의 단전 안에서 또 다시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큽…….”

고통은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림커창의 입술 사이로 신음과 함께 침이 새어나왔다.

체면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단전이 있는 아랫배에서 큰 충격이 올라온 것이다.

만약 한지호를 신뢰하지 못한다면 당장 몸을 틀었을 게 분명했다.

등에 붙어있는 한지호의 손을 떼어내면 고통도 사라진다.

그러나 림커창은 참고 또 참았다.

자신의 몸 안에서 움직이는 내공의 흐름을 느꼈고, 한지호가 아니면 계속 주화입마에 빠져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일시적인 고통보다 죽음이 훨씬 더 두려울 수밖에 없다.

평범한 사람도 죽음을 앞두고 초인적인 힘을 내는 경우가 왕왕 뉴스에 나온다.

림커창 역시 한계를 뛰어넘는 인내력을 끌어내고 있었다.

‘완전하진 않지만, 이만하면 단전이 제 기능을 할 수 있겠지.’

한지호의 손끝에서 퍼져나간 내공이 림커창의 단전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강한 자극으로 엉망이 된 단전을 회복시키는 충격 요법을 썼고, 이제는 더 중요한 문제로 눈길을 돌릴 차례다.

슈슈슉!

거대한 강줄기 같은 내공이 림커창의 아랫배에서 위로 치솟아 올랐다.

한지호는 단전을 시작으로 오장육부를 훑고 두뇌, 정확히는 백회혈까지 내공을 올려 보내 엉클어진 기혈을 바로잡을 작정이었다.

그렇게 내공이 머리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각기 다른 혈도를 자극하게 된다.

기혈이 엉클어졌다는 건 혈도가 막히고 몸 안 기의 흐름이 꼬였다는 뜻이다.

한지호의 내공이 인위적으로 막힌 혈도를 뚫으면 기의 흐름도 원활해질 것이다.

투둑! 투두둑!

강렬한 내공이 혈도를 거슬러 올라갔다.

강물을 거꾸로 헤엄치는 연어처럼 막힌 혈도 하나하나를 뚫어냈다.

꽉 막혀있던 혈도가 풀리는 소리, 혹은 느낌이 손바닥 끝으로 전해졌다.

림커창의 등과 한지호의 손바닥이 맞닿은 지점에서 계속 보이지 않는 전류가 튀고 있었다.

혈도가 하나씩 뚫릴 때마다 그 여파가 접촉 부위로 전달 되는 것이다.

단전에 충격을 가한 후 순조롭게 혈도들이 타통됐다.

한지호의 내공은 어느덧 림커창의 심장 부근에 도달해 있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시간을 꽤 썼다.

내기도인술을 당하고 있는 림커창도 힘들겠지만, 한지호는 만만치 않은 체력 소모를 감내하고 있었다.

이만큼 내공을 써본 적이 드물기에 체력이 급격히 저하됐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다.

기혈을 탐색만 했던 때와 달리 지금은 단전에서부터 혈도를 뚫어가는 중이다.

도중에 손을 떼고 쉬어가면 기껏 뚫어놓은 혈도들이 다시 막히고 기혈이 더 크게 엉킬 수 있다.

단전에서 솟아난 기운은 반드시 정수리의 백회혈까지 한 바퀴를 돌아야 한다.

이것을 대주천(大周天)이라 한다.

그 첫 번째 장애물이 단전에 충격요법을 가하는 것이었다면 한지호는 두 번째 관문을 목전에 뒀다.

심장 부근의 단중(丹中)이 백회혈로 가기 전 버티고 있는 중간 보스다.

뒤엉킨 기혈과 심장의 화기(火氣)가 만난 단중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무리하게 단중혈을 뚫으려 내공을 쏟았다간 림커창이 극심한 고통을 견디지 못할 공산이 크다.

최악의 경우 심장마비라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중혈을 제대로 지나치지 않고서는 내공을 정수리까지 올려 보낼 수 없다.

여기만 무사히 통과하면 백회혈까지 순조롭게 내공을 올려 대주천을 이룰 확률이 높아진다.

림커창의 주화입마를 해소시키느냐, 혹은 상태를 더 악화시키느냐의 기로다.

한지호는 자신의 단전에 남아있는 내공을 아낌 없이 두 손으로 보냈다.

고오오오-

손바닥이 더 뜨거워졌다.

강물을 넘어 파도라고 부를만한 기운이 림커창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한지호는 정공법을 선택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주화입마를 이겨낼 수 없다.

단중혈, 림커창의 심장 부근에 미증유의 내공이 모이고 있었다.

뚫느냐, 뚫지 못하느냐.

살리느냐, 죽이느냐.

림커창의 여생뿐 아니라 한지호의 운명과 기회까지 건 단 한 번의 시도가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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