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23화 (123/255)

# 123

9장, 진짜 중의 진짜 (2)

승부는 승부다.

한지호는 온정신을 집중해 의술을 펼쳤고, 조준혁과 첸을 납득시켰다.

만약 이 게임에서 패배했다면 한지호가 잃을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위험이 큰 곳에 더 많은 보상이 있다는 오래된 격언이다.

한지호는 두 명의 거물들에게 당당히 승리했고, 그만한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했다.

그는 조준혁의 의자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차르르륵-

1억 원짜리 칩 3개, 천만 원짜리 칩 6개.

합해서 3억 6천만 원짜리 칩을 쓸어 담았다.

조준혁이 특별한 게임을 제안하며 내걸었던 판돈이다.

“이사장님과 제가 소원을 주고받을 사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 판돈을 접수하겠습니다.”

첫 판에서 잃었던 천만 원을 빼고도 무려 3억 5천만 원을 벌게 됐다.

하룻밤 사이에 번 돈으로는 최고 기록이다.

조준혁은 잃은 칩보다 패배 자체가 쓰라린 듯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그는 오늘 일을 계기로 한지호가 진짜 명의라는 걸 알게 됐다.

미스테리한 의술을 몸소 체험했으니 한지호에 대해 완전히 재평가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의술이라니……. 도저히 계산이 되지 않는 능력. 생각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다, 한지호.’

조준혁은 한지호를 바라보며 상념에 빠졌다.

게임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한 수, 아니 두 수 아래의 애송이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계산이 서지 않는 적수로 여기게 됐다.

세력으로 따지면 원화 정의 네트워크는 위천 한방병원의 비교 대상이 못 된다.

전국에 있는 위천 한방병원의 지점은 수십 개에 다다른다.

그 규모와 매출, 한의학계 내부에서의 영향력과 권력은 독보적이다.

한국에서 삼성 그룹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한의학계의 삼성이 바로 위천이다.

원화 한의원이 아무리 센세이션을 일으켜도 5곳의 한의원 연합으로는 위천에 경쟁 상대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상식의 한계를 초월한 명의가 등장하면 어떻게 될까.

한 명의 영웅이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어설픈 가짜 스타가 아니라 진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스타 한의사가 독주하기 시작하면 위천 한방병원이라는 철옹성에도 금이 갈 수 있다.

조준혁은 한지호에게서 측정할 수 없는 가능성을 봤다.

싹을 틔우기 시작한 한지호가 얼마나 거대한 나무가 될지 예상하기도 힘들었다.

게임에서 진 대가로 날린 3억 6천만 원이 아닌, 한지호라는 존재의 진면목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칩을 챙긴 한지호는 첸을 돌아봤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 인생에서 손꼽을 정도로 기억에 남는 게임이었어요, 닥터 한. 무엇을 줄까요? 10억? 20억?”

첸은 말만하면 자기 앞에 놓인 칩을 모두 다 건네줄 것 같은 기세였다.

그러나 한지호는 고개를 저었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단호한 행동이었다.

“돈 대신 내 소원 하나를 들어줘야 합니다. 괜찮겠습니까?”

“물론! 게임에서 졌으니 당연히 들어줘야죠. 어떤 소원인지 궁금하네요.”

“올해가 가기 전에 홍콩으로 찾아가겠습니다. 그 때 제 소원을 말하겠습니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첸은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명함을 꺼냈다.

전야제 파티에서 만났을 때는 이름 외엔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았었다.

그랬던 첸이 직통 연락처가 담긴 명함을 준 것이다.

“알고 있겠지만, 한국에서 이 명함을 받은 사람은 30명도 안 됩니다. 닥터 한은 그 30명 안에 들 자격이 있어요.”

한지호는 첸의 명함을 소중히 간직했다.

칭화 그룹 후계자와 직통으로 연결되게 만들어주는 명함이다.

그는 첸에게 부탁할 소원으로 10억, 20억 이상의 가치를 창출할 거라고 확신했다.

꿈꾸고 있는 중국 대륙 진출의 기틀을 다지는데 첸의 힘을 빌릴 계획이었다.

조준혁에게 소원을 말하지 않고 칩을 받은 건 잠재적 경쟁 상대이기 때문이다.

한의학계 안에서 치열하게 싸워야 할 사람과 소원으로 엮이고 싶지 않았다.

기껏해야 아무런 실리 없이 모욕감을 주는 소원 정도를 말하는 게 고작이었을 것이다.

한지호는 명분보다 실리를 중시했다.

조준혁에게서 칩을 받고, 첸에게는 소원 하나를 킵 해둔 건 다분히 실리적인 선택이었다.

“오랜만에 손에 땀이 나는 밤이었군요. 만족스럽네요.”

소원을 들어주기로 약속한 첸의 말이 이 밤의 대미를 장식했다.

한지호는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나중에 딴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이쯤에서 정리를 하도록 합시다.”

조준혁이 포커 페이스를 되찾고 벨을 눌렀다.

호출을 받은 딜러가 들어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리가 될 터였다.

한지호는 쉽게 잊지 못할 밤을 보냈다.

3억이 넘는 돈을 딴 것, 어마어마한 가치의 소원을 확보한 것 외에도 두 가지 소득을 얻었다.

천외천에서 노는 두 명의 용을 알게 됐고, 게임을 하며 그들의 민낯을 목도한 것이다.

특히 조준혁은 한지호에게 엄청난 자극이 됐다.

자만하지 않고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보다 높이 올라가면 반드시 조준혁과 부딪치게 될 것이다.

조준혁도 같은 느낌을 받은 게 분명했다.

“즐거웠습니다.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겁니다, 우리는.”

“이사장님이 계신 곳으로 얼른 올라가겠습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런데 한 원장님, 이제 보니 이목구비가 아주 뚜렷한 게 호랑이 상입니다.”

“네?”

“호랑이 상을 타고나면 세상을 흔들거나 자기 자신을 다치게 만든다고 합니다. 한 원장님이 어느 쪽 길을 걸어갈지 지켜봐야겠습니다.”

한지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꾹 닫고 조준혁을 노려봤다.

언제까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을 할 수 있을지 두고 볼 것이다.

지금은 조준혁이 더 높은 곳에 서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 배경 없는 한의대 졸업생이었던 한지호는 1년이 조금 넘는 시간만에 위천 한방병원의 이사장에게 위협이 되는 인물로 성장했다.

두 사람 사이의 격차는 더 빨리 줄어들 것이다.

적어도 한지호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누구는 많은 것을 잃고, 또 누구는 많은 것을 얻게 된 오늘밤.

모든 것은 블랙문의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이뤄진 일이다.

세상 사람들은 모르지만, 당사자들은 오래오래 기억할 수밖에 없는 밤이 저물고 있었다.

+++

“기운아.”

“네, 형님.”

한강 반포지구의 벤치에 한지호와 조기운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둘은 차를 몰고 왔기에 캔맥주 대신 캔커피를 마셨다.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한지호가 갑자기 조기운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잡담을 나눌 때와는 목소리 톤이 조금 달라졌다.

조기운은 자세를 고쳐 잡으며 한지호를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한지호가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위천 한방병원 말인데.”

“네.”

“나도 여러 경로로 조사를 해볼 테니까, 너 역시 힘을 써줘야겠어.”

“위천에 대해 조사를 하라는 것입니까?”

“맞아. 당분간 청우단 판매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전국에 세워진 위천 한방병원 지점을 방문하면서 분위기를 살펴봐.”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청우단 판매는 조기운의 주요 업무이자 한지호의 캐시 카우(cash cow)다.

강남과 광화문, 여의도의 직장인들에게 청우단을 팔면서 버는 현금이 매달 수천만 원에 이른다.

한지호는 그만큼 중요한 일을 뒤로하고 우선적으로 집중해야 할 새로운 미션을 준 것이다.

이야기를 듣는 조기운도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청우단 판매와 고객 관리는 그에게도 특별한 임무였다.

살면서 처음으로 몰입한 일이 청우단 판매였고, 지금은 여러 고객들과 신뢰를 쌓았다.

미래가 캄캄하던 조기운에게 새로운 집과 보금자리, 삐까번쩍한 외제차와 희망을 선물해준 매개가 바로 청우단이다.

그는 대체 위천 한방병원을 조사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궁금한 눈치였다.

“위천의 조준혁 이사장을 만났어.”

“베일에 싸여있다는 조준혁 이사장 말씀이십니까?”

“그래, 바로 그 조준혁.”

조기운도 위천 한방병원의 이사장에 대한 소문을 여기저기서 접했었다.

그 역시 한지호와 함께 한의학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이다.

이 바닥에서 조준혁의 전설을 모르면 간첩일 것이다.

한지호가 그만큼 입지전적인 인물을 직접 만났다는 사실 자체로 놀라웠다.

이제야 청우단 판매보다 중요한 지시를 내린 게 이해가 됐다.

조준혁과 얽힌 일이라면 그 무게감을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형님?”

“방금 말한 것처럼 전국에 있는 위천 한방병원 지점을 방문해서 분위기를 살피는 게 먼저야. 니가 눈으로 보고, 듣고, 경험하며 지점들의 영업 방침이나 전반적인 운영 상태를 체크해줘.”

“알겠습니다.”

“가능하다면 각 지역 한의원과 주민들이 위천 한방병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아보고. 너무 추상적이긴 한데, 위천의 실상에 대한 모든 것을 조사한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런 일 믿고 맡길 사람이 너밖에 없다.”

“만약 조사를 하다가 그쪽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끼면 어떻게 할까요? 그냥 접을까요, 아니면 무리를 해서라도 계속 파고들까요?”

“일단 나한테 연락해서 결정하자. 혹시라도 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임의로 판단해. 기운이 니가 내린 판단이라면 그게 최선일 테니까.”

한지호는 조기운에게 최대한의 자율권을 부여했다.

서울과 경기도뿐 아니라 전국 각지의 위천 한방병원 지점을 방문하고, 종합적으로 조사를 하는 일은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시간도 오래 걸릴 뿐더러 언제 어디서 무슨 사건이 터질지 모른다.

그러나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조기운은 그동안 한지호 밑에서 여러 경험을 쌓으며 놀랍게 성장 했다.

원래부터 발군의 신체 능력은 웬만한 운동 선수들보다 나았다.

거기에 경험이 더해졌으니 무슨 일을 맡겨도 잘 해낼 것 같았다.

한지호도 청우단 매출 급감을 각오하고 조기운에게 지시를 내린 셈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은 한지호가 가장 좋아하는 옛말이다.

그는 조준혁과 위천 한방병원에 대해 속속들이 알기를 원했다.

팀 DK의 오대경에게도 정보 수집 의뢰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발로 뛰며 얻은 현장의 정보에서 예상 밖의 빈틈이 나올지 모른다.

위천 한방병원은 단단하고 높은 철옹성이다.

철옹성의 주인이 한지호를 주시하고 경계하기 시작했다.

김영찬 교수를 한의학계에서 묻어버린 순간부터 언젠가는 부딪칠 운명이었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을 하기 전에 최대한 많은 무기를 확보해 놓아야 한다.

한지호는 위천의 성벽에서 작은 균열이라도 발견한다면 얼마든지 치고 들어가 와르르 무너트릴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조기운에게 맡긴 임무가 아주 중요한 키 포인트가 될 것이다.

이제부터 조기운은 본격적으로 한지호의 칼이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업무를 도와주는 오른팔이었다면, 앞으로는 만만치 않은 상대의 빈틈을 찌르는 칼 역할을 해낼 필요가 있다.

조기운도 한지호가 자신에게 새롭고 막중한 역할을 기대한다는 걸 깨달았다.

“기대하고 믿어주시는 만큼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형님.”

“기운아. 우린 더 멀리, 더 높이 올라갈 거야. 누릴 거 누리면서도 항상 위를 보자. 그리고 힘내자.”

일상적인 어조로 가볍게 말했지만, 한지호의 목소리에 담긴 진심이 깊은 울림을 만들어냈다.

조기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강을 내다봤다.

그는 한지호와 함께 앉아 한강을 보며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고 생각했다.

둘의 우정과 믿음은 진짜다.

세상으로부터 무엇 하나 선물 받지 못하고 태어난 한지호와 조기운은 세상을 뒤집는 일을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다.

위천도, 조준혁도, 그 무엇도 둘을 쉽게 막아설 수는 없을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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