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122화 (122/255)

# 122

9장, 진짜 중의 진짜 (1)

“음.”

조준혁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왼손을 대리석 테이블에 내려치고도 신음 한 번만 내뱉었던 독종이다.

하지만 한지호의 첫 번째 침이 피부를 뚫고 혈도를 파고드는 고통을 완전히 참아낼 순 없었다.

한지호가 일부러 아픈 통점을 자극한 건 아니었다.

이미 왼손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고, 빠른 치료를 위해서는 환자의 고통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손이 계속 커지는 거, 붓는 게 눈에 보이네요. 흐으음…….”

첸이 아래턱을 만지며 조준혁의 손을 쳐다봤다.

양껏 분비된 도파민의 영향으로 신이 났었지만, 막상 미친 짓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위험한 게임을 직접 보니 등골이 서늘해진 것이다.

수 억, 때로는 수십 억 원을 걸고 도박을 하는 첸이지만 오늘은 아예 차원이 다른 게임의 플레이어가 됐다.

삼합회의 깡패들도 아니고, 한국 최고의 VIP라 불리는 사람들이 자기 몸을 다치게 만들며 게임을 하는 광경을 볼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몇 개의 침을 놓을 생각입니까?”

조준혁이 뼈를 찌르는 고통을 참으며 질문을 던졌다.

한지호는 담담한 얼굴로 두 번째 침을 손에 잡으며 대답했다.

“다섯 개면 충분합니다.”

“만약 다섯 번째 침을 놓은 뒤에 내 손이 곧바로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때는 제가 진 것이니 이사장님의 소원을 들어드리고, 첸에게는 여기 남은 칩을 모두 줘야겠죠.”

엄청난 부담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조준혁은 한지호의 신묘한 의술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그를 사기꾼이라 여길 것이다.

아마도 무척 굴욕적인 조건을 소원으로 내걸 확률이 높았다.

실력도 없는 가짜 명의가 TV로 유명세를 쌓고, 조준혁의 친척인 김영찬 교수를 한의학계에서 묻어 버렸다는 걸 절대 호락호락하게 넘길 리 없었다.

거기다 9억 9천만 원에 해당하는 칩을 모두 넘겨주게 되면 금전적으로도 문제가 생긴다.

아무리 블랙문 카지노의 투자자라고 해도 빌린 10억 원은 갚아야 한다.

이래저래 그의 어깨에 걸린 짐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꾸욱-

두 번째 침이 조준혁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어느정도 적응이 됐는지 조준혁은 입술을 깨물고 더 이상 신음을 흘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인내력이었다.

무공을 익힌 것도 아니고, 평범한 육체능력을 지닌 중년 남성이 이만한 고통을 참는다는 게 불가사의했다.

정신력을 수치로 환산할 수 있다면 조준혁은 세계에서 손가락 안에 꼽힐 것 같았다.

그러나 마냥 조준혁의 정신력과 인내력에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부터가 진짜 중요하다.’

한지호가 눈을 부릅떴다.

처음 두 개의 침은 왼손의 혈도를 자극해 기운을 받아들이기 쉽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했다.

눈에 띄게 부어오르고 있는 조준혁의 왼손은 낯선 기(氣)를 받아들이기 좋은 상태가 됐다.

한지호가 놓은 두 개의 침이 왼손의 혈도와 경락을 완전히 열어버렸기 때문이다.

증세는 심각한 타박상. 부어오르는 환부의 색상으로 보아 뼈에는 이상이 없다.

사람이 아무리 손을 세게 내리쳐도 스스로 뼈를 부러트리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이만한 타박상으로도 족히 전치 몇 주가 나온다.

온몸의 피가 왼손으로 몰리며 신경과 감각을 마비시키는 상황이다.

그 와중에 한지호는 침으로 혈도를 확장시켰다.

그래서 더 붓기가 빨리 차오르는 것이기도 하다.

당장은 부상이 악화되는 것 같지만, 지금부터 놓은 세 개의 침을 위해 기반을 다져놓은 것이다.

고오오오-

한지호의 단전에서 거대한 기운이 꿈틀거렸다.

어느덧 묵직하게 쌓인 오금희의 내공이 용솟음쳤다.

두 눈을 부릅뜬 그는 모든 기운을 오른팔 끝으로 집중시켰다.

셔츠에 가려진 팔뚝 위로 핏줄과 힘줄이 선명하게 돋아났다.

만약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면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가 놀랐을 것이다.

‘녹공이 먼저다. 녹공의 수기로 환부의 열을 진정시킨다.’

다 아는 내용이지만 신중하게 과정을 되짚으며 침을 놓았다.

“…….”

손목 중앙에 침을 놓은 한지호는 숨을 쉬지 않았다.

잠시 호흡을 멈추고 끌어올린 녹공의 기운을 침에 불어 넣었다.

쏴아아!

침 끝에서 퍼져나간 녹공의 수기(水氣)가 조준혁의 혈도로 퍼져나갔다.

차가운 물의 기운이 갑작스런 충격으로 차오른 열기를 식혔다.

“후!”

침에서 손을 뗀 한지호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그는 조준혁의 표정이 변하는 걸 지켜봤다.

당사자가 자기 몸의 상태를 가장 잘 아는 법이다.

지금 조준혁은 마치 파스를 뿌린 것처럼 시원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확장된 혈도로 녹공의 수기가 투입되어 빠르게 환부의 열기를 가라앉히는 중이다.

한지호가 남몰래 얼음찜질을 했다고 착각할 지경이었다.

그만큼 시원한 느낌이 퍼지며 화상을 입은 것처럼 폭발하기 일보직전이던 왼손의 열상(熱傷)이 나아갔다.

“느껴지십니까?”

“이건…….”

조준혁이 당황했다.

20억 원을 배팅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던 포커 페이스에 균열이 생겼다.

왼손을 대리석 테이블에 내려치고도 고작 신음 한 번을 흘리고 말았던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몸으로 직접 침의 효능을 체험하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두 개가 더 남았습니다. 그때 가서 마저 놀라십시오.”

한지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첸은 조준혁과 한지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그는 기상천외하고도 위험한 둘의 게임에 완전히 몰입한 것 같았다.

‘수기로 환부의 열을 가라앉힌 다음에는 토기로 충격을 다독이고…….’

오금희 녹공에 이어 원공(猿功)이 발휘됐다.

비장과 직결된 원공의 기운은 토기(土氣), 즉 흙의 본성과 닮아있다.

충격을 받은 상처 부위를 토닥토닥 다독이며 진정시키는데 적합한 기운이다.

한지호는 온정신을 집중해 토기의 기운을 손끝에 모았다.

그가 잡은 길고 가느다란 침에 넉넉하고 부드러운 대지의 기운이 응축됐다.

꾸우욱!

긴 여운을 남기고 네 번째 침이 조준혁의 혈도에 꽂혔다.

이번에는 검지와 중지 사이의 위치에 침을 놓았다.

“이제 마지막입니다.”

한지호는 조준혁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자신만만하게 공언했던 대로 마지막 다섯 번째 침을 놓을 차례였다.

사실 벌써 효과는 나타나고 있었다.

수기가 열을 가라앉혀 빨갛던 손의 색깔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뿐만 아니라 방금 놓은 침에서 퍼져나간 토기가 통증을 진정시켰다.

뼛속까지 저리게 만들었던 극심한 통증이 조준혁도 모르는 사이 완화되고 있었다.

녹공의 수기, 원공의 토기, 마지막으로 삼위일체를 이룰 기운은 바로 웅공의 목기였다.

나무는 토양 위에서 자라난다.

당연하기 짝이 없는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게 한의학이다.

한(韓)의학이건 한(漢)의학이건 본질적으로 자연의 섭리를 따라 만들어졌다는 것은 다르지 않다.

생각해보면 간단한 이치다.

물로 열을 식히고, 흙으로 상처를 덮는다.

그 흙 위에 나무를 심어 인체의 재생 능력을 일으켜 치유를 한다.

말은 쉽지만 사실 아무나 할 수 있는 치료법은 아니었다.

오행(五行)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 생각한 바를 침술로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오금희의 유일무이한 계승자인 한지호만 시도 할 수 있는 치료법이었다.

우우웅!

마음을 먹자 목기가 요동쳤다.

웅공의 기운이 한지호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묵직하고 둔중한 웅공이 발휘되자 한지호의 동작도 조금 느려졌다.

자연스레 영향을 받는 것이다.

그는 느릿느릿하지만 신중하고 섬세하게 마지막 침을 놓았다.

손등의 중앙, 대리석 테이블과 직접적으로 부딪쳤던 자리에 침이 꽂혔다.

슈우우우우-

단전에서 손으로, 손끝에서 침으로, 그리고 침에서 조준혁의 혈도와 왼손으로 목기(木氣)가 전해지고 있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거침없이 쏟아 부어진 기운이 퍼지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했다.

“10분, 아니 5분만 지켜보시죠.”

한지호는 마지막 침을 놓고 5분이라는 시간 제한을 걸어 뒀다.

그의 얼굴에서 불안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5분 뒤에 치료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9억 9천만 원을 포함해 많은 것을 잃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섯 개의 침을 놓은 한지호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약간 긴장했지만, 스스로의 침술에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막상 오금희의 원리를 응용해 침을 놓다보니 긴장이 풀어졌다.

치료해야 하는 대상이 위천 한방병원 이사장 조준혁이라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침을 놓는 순간만큼은 조준혁도 똑같은 환자의 한 사람일 뿐이었다.

째각- 째각-

벽에 걸린 고풍스러운 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한지호, 조준혁, 첸.

세 사람은 말을 아끼고 있었다.

5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기다리면 알게 될 터, 미리 호들갑을 떨 정도로 모자란 사람은 셋 중에 없었다.

어쩌면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조준혁의 왼손이 회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녹공의 기운으로 침을 놓았을 때부터 치료 효과가 드러났었다.

새빨갛게 달아올랐던 왼손이 원래의 살색을 되찾았고, 손등을 뭉툭하게 만들었던 붓기도 빠지고 있었다.

조준혁의 표정을 보면 통증 역시 꽤 사라졌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볼썽사납게 비명을 지르진 않았어도 신음을 흘린 그는 인상을 찡그렸었다.

하지만 침을 맞는 과정에서 저도 모르게 표정이 펴졌다.

왼손에서 느껴지던 극심한 고통이 서서히 거짓말처럼 가라앉고 있는 까닭이다.

시계의 초침이 세 바퀴쯤 돌았을까.

아직 약속한 5분이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세 사람은 무거운 침묵 속에서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믿기 힘들지만 한지호의 치료는 초단시간 안에 효과를 보이고 있다.

조준혁의 왼손은 눈에 띄게 호전되고 있었다.

승부와 내기에 인생을 송두리째 바친 첸도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왼손을 지켜보는 게 전부였다.

섣불리 무슨 말을 꺼낼 수 없는 분위기가 조성됐기 때문이다.

너무 어이없는 상황에 직면하면 아무 말도 안 나온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조준혁이 자기 왼손을 내려친 것부터 비현실적이었지만, 한지호가 고작 침 다섯 개로 왼손을 치료한 건 영화 속 컴퓨터 그래픽 같았다.

가장 놀란 사람은 역시 당사자인 조준혁이다.

그는 세 번째 침이 놓였을 때부터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한지호라는 듣도 보도 못한 젊은 한의사가 TV에 나와 인기를 끈다고 했을 때도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잠깐 반짝하다 사라지는 쇼닥터가 어디 한둘인가.

그런데 한지호는 달랐다.

가짜 백수오 파동이라는 전국적인 사건을 터트렸고, VIP 전문 한의원이라는 낯설고 거슬리는 시스템을 안착시켰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한의사 협회에서 김영찬을 추락시키고, 젊은 한의사들과 한의원 네트워크를 만들며 세력을 형성했다.

이제는 전국 한의학계를 장악한 위천 한방병원 입장에서도 제법 거슬리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렇기에 조준혁이 나섰다.

자기 외에는 누구도 믿지 않는 그는 한지호의 진면목을 파악하려 했다.

속으로는 운이 좋아 승승장구하고 있는 애송이일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판단이 완전히 뒤집혔다.

조준혁이 이렇게 크게 한 방을 먹은 건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퉁퉁 부은 왼손으로 한지호의 가짜 의술을 조롱하고,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수치심을 새겨주려 했건만.

그랬건만 한지호는 진짜 명의였다.

조준혁은 한의사는 아니지만 웬만한 전문가보다 더 낫다.

위천 한방병원을 전국적인 프랜차이즈로 만들며 보고 들은 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준혁의 경험으로는 한지호의 의술을 헤아릴 수 없었다.

“5분 됐습니다.”

그때 한지호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조준혁의 왼손 위에는 그가 놓은 다섯 개의 침이 꽂혀 있었다.

한지호는 조준혁과 첸을 쳐다보며 물었다.

“두 분이서 직접 결정하시죠.”

게임의 승패를 알아서 선택하라는 것이다.

그만큼 누가 봐도 명확한 결과가 나왔다는 뜻이었다.

붓기가 아주 약간 남아있었지만, 조준혁의 왼손은 거의 멀쩡해졌다.

대리석 테이블을 내려친 직후 보기 흉하게 부어 오르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며칠은 더 통증이 남아있겠지만, 이 정도면 한지호가 자신의 말을 지킨 것이다.

“한 원장님이… 이겼습니다.”

조준혁이 패배를 인정했다.

첸도 뒤늦게 박수를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짝짝짝-!

“내 평생 이렇게 멋진 게임은 처음 봅니다. 닥터 한,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한지호는 살짝 고개를 숙인 후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웃음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럼 게임에서 이겼으니 약속했던 대가를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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