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7장, 거물이 되는 길 (2)
문이 열렸다.
지하 2층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비밀의 방.
판돈으로 몇 억은 가볍게 쓰는 VVIP들에게만 허락되는 방은 의외로 소박하게 꾸며져 있었다.
인터리어에서 반짝이는 금붙이와 보석류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신 은은한 향을 풍기는 최고급 자단목 위주로 실내가 꾸며져 있었다.
거부들이 오직 게임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정신 사나운 인테리어를 지양하고, 차분하지만 기품 있는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다.
하지만 한지호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자단목이 아니었다.
넓은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내뿜는 기세가 그의 동공을 커지게 만들었다.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흡사 삼국지 시대의 치열했던 전투 현장에 와있는 것 같았다.
칼과 창이 부딪치고, 피가 튀며 사람이 죽어나가는 전쟁터와 맞먹을 정도로 치열한 기운이 느껴졌다.
겨우 카드 게임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 판에 몇 억이 걸린 게임이다.
게다가 엄청난 액수를 아무렇지 않게 배팅하는 거물들은 돈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게임을 한다.
“한 원장님!”
팽팽하게 조여졌던 긴장의 끈이 마창우의 목소리와 함께 잠시 느슨해졌다.
새로운 인물이 들어온 것도 모른 채 게임에 열중하던 사람들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한지호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며 다시 한 번 놀랐다.
아는 얼굴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저희 블랙문의 의료 자문을 맡고 계신 한지호 원장님입니다.”
마창우가 한지호를 소개했다.
한지호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원래라면 게임 테이블에서 번거롭게 자기소개 같은 걸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곳은 특별한 장소다.
블랙문에서 인정한 최고의 VVIP들만 모인 테이블이고, 게임도 게임이지만 마창우의 주재로 친목을 다지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마창우가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소개 할 차례였다.
“전야제에서 인사를 나누셨던 걸로 압니다. 칭화 그룹의 첸 님이십니다.”
마창우는 한국어로 말했지만, 첸은 자신이 소개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가 한지호와 눈을 맞추고 아주 옅은 미소를 보였다.
‘도파민 중독자. 홍콩의 황태자.’
한지호는 첸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무심하게 전야제 파티를 지켜보다 사라졌던 칭화 그룹의 후계자.
홍콩 금융계와 의료계를 장악하고 삼합회까지 발밑에 뒀다는 칭화 그룹의 2세는 심각한 도박 중독자다.
정확히 말하면 짜릿한 스릴 없이 살아갈 수 없는 도파민 중독 증세가 심했다.
그가 게임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한지호는 첸을 바라보며 목례를 했다.
전야제에서 짧게나마 대화를 나누며 교류를 했었기에 그가 마냥 낯설게 느껴지진 않았다.
마창우의 말에 의하면 전야제에 초대 받은 국제적인 거부들 중에서 첸이 꼭짓점에 있었다.
그러한 인물이 자리 잡고 있는 테이블인 만큼 방금 전에 느껴졌던 살벌한 기세도 이해가 갔다.
과연 칭화 그룹의 황태자와 같은 테이블에서 게임을 즐기는 다른 사람들은 누구일까.
호기심이 깊어지려는 찰나, 마창우가 늦지 않게 소개를 계속했다.
“이 분은 영진 건설 김우창 상무님이십니다.”
영진 건설은 경상도 지방에서 인지도가 무척 높은 회사다.
김우창은 고작 서른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데 상무라는 직함을 달고 있었다.
보나마나 영진 건설 회장의 아들일 것이다.
이제 카지노 딜러를 제외하면 한 사람이 더 남았다.
한지호의 고개가 그에게 돌아갔다.
“……!”
그 순간, 한지호는 벼락을 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40대 초반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 만큼 잘 관리된 얼굴. 그리고 몸에 딱 달라붙는 슈트는 철저한 성격을 대변하는 것 같다.
더 놀라운 건 그의 이목구비다.
사나운 기운을 숨기고 있는 살짝 찢어진 눈매와 끝이 올라간 얇은 입술.
거기에 구부러짐 없이 매끈하게 솟은 콧날과 갸름한 턱선, 좁은 미간.
‘효웅의 상이다.’
한지호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효웅(梟雄).
천하를 난세에 빠지게 만들고, 그 난세를 발판삼아 다시 천하를 가지는 역사적 인물들의 얼굴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공통점을 학문으로 만든 것이 바로 관상이다.
눈앞의 미중년은 효웅의 관상을 지니고 있었다.
“한 원장님도 잘 아실 겁니다. 이 분은 위천 한방병원의 조준혁 이사장님이십니다.”
조준혁.
일찍이 전례가 없던 한의원의 전국 프랜차이즈를 성공시킨 입지적인 인물.
그는 위천의 이사장이면서 한의학계의 주요 행사에는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고, 정확히 어떤 사업체를 더 운영하는지도 베일에 싸여 있다.
조준혁이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건 그의 업적과 더불어 미스테리한 정체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조준혁이 무표정한 얼굴로 한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찌릿-!
두 사람의 눈빛이 얽히며 금방이라도 불꽃이 튈 것 같았다.
한지호와 조준혁은 서로에게 적대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다.
다만 서로의 존재 자체가 자석의 같은 극처럼 상대를 밀어내는 느낌이었다.
“반갑습니다. 소문대로 아주 훤칠하게 생기셨습니다.”
조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소개를 한 마창우를 포함해 첸과 김우창도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묘하게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은 까닭이다.
게다가 한지호와 조준혁은 한의학계라는 바닥에 몸을 담고 있다.
둘의 배경을 아는 사람들이 보기엔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첫 만남이다.
조준혁이 먼저 인사를 했으니 한지호도 예의를 갖췄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사장님에 대한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이 바닥에 내 이야기가 별로 좋게 떠돌지는 않을 텐데. 한의학의 정신을 팽개치고 돈벌이에 급급한 인간이라고들 해서 말입니다.”
조준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신에 대한 악담을 늘어놓았다.
웬만큼 강한 멘탈을 가지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한지호는 말없이 그의 눈을 응시했다.
효웅의 상을 가진 조준혁의 눈동자에서 무엇도 읽어낼 수 없었다.
속내가 아예 파악이 안 되는 인물은 전생을 각성한 후 처음 만났다.
그때 분위기가 묘해진 걸 느낀 마창우가 자리를 정리했다.
“여러분들께 저희 블랙문의 의료 자문이신 한지호 원장님을 꼭 소개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한 원장님, 대표실에 계시면 제가 곧 올라가겠습니다.”
거물들과 인사를 하게 해준 마창우가 한지호에게 대표실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어차피 한지호가 이 테이블에 앉아 게임을 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작은 판도 아니고, 한 판에 몇 천에서 몇 억이 우습게 오가는 테이블이다.
게임에 참여하지 않는 관전자가 허락될 리 없었다.
사실 마창우가 게임의 흐름을 끊고 한지호를 소개해준 것만 해도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죄송합니다만, 여기 계신 분들께서 허락한다면 저도 테이블에 앉고 싶군요.”
인사를 마치고 돌아가야 할 한지호가 폭탄 선언을 했다.
이곳에 앉아서 한 명의 갬블러가 되어 게임을 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마창우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한지호를 쳐다봤다.
그때 첸이 유창한 영국식 영어로 질문을 던졌다.
“한국말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닥터 한. 여기서 게임을 하겠다고 말한 게 맞아요?”
“맞습니다.”
짝짝짝짝짝-!
대답을 들은 첸은 크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그는 예상하지 못했던 지금의 상황이 무척 즐거운 듯 했다.
“하오, 하오!”
첸이 영국 발음의 영어 대신 좋다(好)는 뜻의 중국어를 뱉어냈다.
모국어가 바로 튀어나올 만큼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곧이어 첸은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또박또박한 엑센트의 영어로 모두에게 질문을 했다.
“재밌는 플레이어가 끼어들어야 게임이 흥미진진해지는 법. 나는 찬성. 닥터 한이 테이블이 앉는 걸 반대하는 분?”
칭화 그룹의 황태자가 웃으며 찬성하고 있다.
그 앞에서 굳이 반대를 할 사람은 없다.
어차피 마창우를 제외하고 세 명이서 게임을 하던 중이라 자리도 남는다.
조준혁은 유심히 한지호를 주시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김우창 역시 오른 손을 드는 것으로 찬성의 뜻을 나타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마창우도 말릴 수 없었다.
“그럼 앉겠습니다.”
한지호가 오른쪽 끝 자리에 앉았다.
바로 옆이 김우창의 자리였고, 첸 다음으로 조준혁이 왼쪽 끝에 앉아 있었다.
“마 이사님. 소개도 끝났고, 본격적으로 게임을 할 테니 테이블에 앉거나 자리를 비워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한지호가 자리에 앉자 조준혁은 마창우의 게임 참여 의사를 물었다.
마창우는 블랙문 카지노의 대표지만, VVIP들 앞에서는 을이 될 수밖에 없다.
한지호는 놀라움을 감추고 조준혁을 쳐다봤다.
마창우는 딱 봐도 위압적인 어깨넓이와 강렬한 눈빛을 자랑한다.
단순히 허세가 아니라 어둠의 세계를 주먹 하나로 제패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준혁은 평범한 가게 직원을 대하듯 마창우의 기운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돈이 엄청나게 많거나 높은 자리에서 권력을 잡은 사람도 마창우를 조심스럽게 대한다.
아마 조준혁의 타고난 기운이 마창우 못지않게 강한 것 같았다.
“좋은 자리가 만들어졌으니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마창우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조준혁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그가 VVIP 룸 밖으로 나가며 한지호에게 눈짓을 보냈다.
너무 큰 판이니 적당히 즐기고 깊게 빠지지 말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한지호를 각별하게 생각하는 마창우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충고였다.
그의 시선을 받았음에도 한지호는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냥 이 판에서 빠지고 싶지 않았다.
거물들에게 인사만 하고 돌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같은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고 싶었다.
첸도 첸이지만 조준혁의 특별한 존재감이 한지호를 사로잡았다.
여간해선 만나기 힘든 조준혁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졌다.
“너무 오래 기다렸어요. 다시 게임을 시작하죠. 닥터 한, 텍사스 홀덤 플레이 할 줄 알아요?”
마창우가 나가자 첸이 더 이상 참기 힘들다는 듯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한지호는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영어와 한국어를 번갈아가며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 낯설었지만,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물론. 잘은 못해도 룰은 숙지하고 있습니다.”
“오케이. 딜러?”
첸이 딜러를 호명했다.
2대8 가르마에 유니폼을 입은 딜러는 방송국 아나운서라고 해도 믿을 만큼 단정한 외모의 젊은 남자였다.
VVIP들의 룸에 들어올 정도이니 특별 대우를 받는 딜러일 것이다.
카드를 돌려 게임을 시작하기 전, 딜러가 한지호를 쳐다봤다.
“칩은 어떻게 준비해드릴까요?”
한지호는 현금으로 칩을 바꿔오지 않았다.
하지만 번거로운 절차를 거칠 필요는 없다.
그의 공식 직함은 블랙문 카지노의 의료 자문이지만, 실제로는 마창우와 막역한 사이의 주요 투자자라는 걸 직원들은 전부 알고 있다.
때문에 신용만 믿고 얼마든지 칩을 내줘도 되는 인물인 것이다.
다른 VVIP들도 이름 석자만으로 칩을 즉시 공급 받는다.
카지노의 룰은 엄격하지만, 특별한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예외가 적용되는 법이다.
딜러의 질문으로 인해 모두의 시선이 다시금 한지호에게 꽂혔다.
조준혁, 첸, 김우창.
세 사람이 한지호의 입술을 쳐다봤다.
과연 그가 얼마만큼의 칩을 원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50억 원을 마련해 블랙문 카지노에 투자했다.
방송 출연과 한의원 운영, 청우단 판매로 매달 억 대의 수입을 올린다.
이만하면 대한민국에서도 상위 3%안에 든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준혁이나 첸, 김우창은 상위 1%다.
정확히 말하면 상위 0.1%에 속한다.
상위 3%와 10% 사이의 격차보다 1%와 3% 사이의 격차가 더 크다.
그렇기에 0.1%에 속하는 이들의 재력은 아예 차원이 다르다.
이들은 몇 천만 원을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배팅할 수 있지만, 웬만한 부자에게도 그런 판돈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호기롭게 테이블에 앉은 한지호는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제법 큰 숫자가 튀어나왔다.
“10억.”
한지호 입장에서는 쉽게 부르기 힘든 액수였다.
조준혁과 김우창도 예상보다 큰 액수에 의외라는 듯 이채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한지호가 기껏해야 1억 정도를 부를 거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한지호는 변함없이 딜러에게 자신의 뜻을 확인시켜줬다.
“10억 원의 칩을 부탁합니다.”
“준비하겠습니다.”
딜러가 한지호에게 줄 칩을 세기 시작했다.
그 동작을 보고 첸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칩을 준비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도파민이 분비된 것이다.
한지호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테이블에 앉았고, 또 10억이라는 거액을 배팅 머니로 책정한 것일까.
단순한 호기심 또는 호승심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무모한 일이었다.
그러나 자리에 앉는 그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눈동자만 봐도 한지호가 평소처럼 묵직하게 중심이 잡힌 상태라는 걸 알 수 있다.
한지호는 뜻하지 않게 찾아온 운명의 화살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겜블러도 아니고, 이 테이블에서 돈을 따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외도는 카지노에 투자한 것으로 충분하다.
도박으로 돈을 벌고픈 마음은 눈꼽 만큼도 없는 게 확실했다.
다만 게임 이후를 바라보며 테이블에 앉은 것이다.
이미 머릿속에는 또 다른 큰 그림이 그려졌다.
무엇이든 정면으로 부딪치는 한지호의 게임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