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3장, 전야제(前夜祭) (2)
‘저 사람은……?’
한지호는 마이크를 잡고 선 사람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H 호텔 지하 2층, 블랙문 카지노의 VIP 플레이스 앞쪽에 사회자가 나타나 전야제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마이크를 잡고 한국어와 영어, 그리고 중국어로 능숙하게 인사를 전하는 사회자는 다름 아닌 국영 방송 KBC의 아나운서였다.
방송국에 소속된 아나운서는 외부 행사를 뛸 수 없다.
그런데 무슨 수를 썼는지 국영 방송의 간판 아나운서가 카지노의 전야제 파티 사회를 맡고 있는 것이다.
공인된 행사가 아니기에 거액을 주고 부른 모양이었다.
한지호는 새삼 전야제의 스케일을 체감했다.
시간이 되어 지하 2층에 나타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부티가 좔좔 흘렀다.
중국과 동남아 사람들의 머릿수가 제일 많았고, 그다음이 한국인 순서였다.
일본인과 서양인들도 적게나마 섞여 있었다.
한지호는 초대를 받아 전야제에 참석한 이들의 공통점 몇 가지를 찾아냈다.
우선 생각보다 평균 연령이 낮았다.
간혹 백발이 성성한 참석자도 보였지만, 대부분은 40대 이하로 보였다.
블랙문 카지노의 주 고객이 재벌 2세, 혹은 자수성가한 젊은 부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들의 씀씀이가 1세 오너보다는 훨씬 큰 법이다.
이런 인물들을 불러들여 전야제에 참석시킨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다.
시간이 곧 돈인 이들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다.
한지호는 마창우가 어둠의 세계에서 얼마나 전설적인 사람인지 다시금 되새겼다.
그때 유명 아나운서인 사회자가 마창우를 비롯한 주요 투자자들을 앞쪽으로 불러냈다.
“오늘 이 자리를 만들어 주신 블랙문 코퍼레이션의 마창우 대표이사님, 그리고 백성필 인천시 경제부시장님과 허충욱 영종도 국제 특구 추진 위원장님, 마지막으로 의료 자문을 맡고 계신 한지호 원장님을 모시겠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영어와 중국어로도 똑같은 멘트를 전달했다.
동시통역을 하는 것처럼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진행이었다.
과연 국영 방송 KBC의 간판 아나운서답게 능수능란한 역량이 느껴졌다.
아마 이런 비공식적인 행사를 숱하게 뛰며 월급의 수십 배가 넘는 돈을 벌어 왔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토록 위화감 없이 사회를 잘 보는 게 분명했다.
한지호는 의료 자문이라는 이름으로 마창우와 함께 앞에 섰다.
혹여 외부에 주요 투자자로 이름이 거론되면 좋은 시선을 받기 힘들다.
그렇기에 의료 자문이라는, 카지노에 있어 꼭 필요치 않은 직함을 단 것이다.
이것 역시 마창우가 고안한 일이었다.
사실 거액을 투자한 진짜 물주들은 전야제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카지노를 통해 돈이 굴러가기를 바랄 따름이다.
블랙문의 대표이사 마창우가 모든 투자자들을 대신하는 존재였고, 허충욱과 백성필은 각각 민관(民官)을 대표하는 위치다.
사회자의 부름을 받은 4명이 앞으로 나가서 나란히 섰다.
한 손에 샴페인 잔을 들고 서 있는 백여 명의 VIP 참석자들이 가볍게 박수를 쳤다.
짝짝짝짝-!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넷을 대표해 마창우가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블랙문 카지노의 전야제에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께는… 블랙문 카지노를 이용하지 않으셔도 한국에 방문하실 때마다 영종도 H 호텔의 이그제큐티브 룸을 무상으로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아울러 블랙문 카지노에서 마련하는 별도의 리무진 서비스와 개인 비서 제공까지, 그 모든 특권을 여러분들께 무상으로 제공할 예정입니다. 블랙문이 문을 닫는 그날까지 이 약속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조촐한 자리이지만 마음껏 파티를 즐기며, 블랙문의 앞날을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마창우는 구구절절한 환영 인사 대신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어 참석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회자는 영어와 중국어로 마창우의 인사말을 통역했고, 뒤늦게 내용을 알아들은 참석자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몇몇은 가볍게 탄성을 내뱉기도 했다.
카지노에서 돈을 몇억 이상 쓰는 VIP 고객에게 호텔 룸을 제공하고, 리무진을 빌려주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다.
하지만 카지노를 이용하지 않아도 무상으로 5성급 호텔의 이그제큐티브 룸을 제공해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게다가 마창우는 리무진 서비스는 물론이고, 한국에서의 스케줄 관리를 도와줄 개인 비서까지 조건을 따지지 않고 제공할 예정이라 했다.
말 그대로 한국에 몸만 오면 나머지 모든 것을 블랙문 카지노에서 제공하는 셈이다.
아쉬울 거 하나 없는 VVIP들도 반길 만한 특권이었다.
카지노에서 쓴 금액을 따지지 않고, 전야제에 참석했다면 무조건 특권을 준다는 점도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무조건이라는 말이 가지는 힘은 적지 않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특권을 제공받는 VVIP 대접을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창우는 어차피 쓸 돈이라면 화끈하게 쓰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낌없이 화끈하게 쓴 돈은 수십, 수백 배의 돈으로 불어나 카지노의 재정을 채워 줄 것이다.
부리부리한 그의 얼굴에서 흔들림 없는 확신이 엿보였다.
‘사업은 저렇게 하는 거구나. 한 수 배웠어.’
한지호는 마창우의 인사말을 듣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역시 원화 한의원이라는 사업체를 운영하는 경영주이다.
병원이라고 해도 본질은 사업체다.
내국인 카지노에서 투자 이익을 보면 한의원을 확장할 계산도 하고 있다.
그렇기에 마창우의 사업 수완을 옆에서 지켜보며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촤아아악-
그 순간, 지하 2층의 사방에서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미녀들이 쏟아졌다.
섹시하지만 절대 천박해 보이지 않는 파티 드레스를 입은 수십 명의 모델들이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섞였다.
마창우가 손을 들어 그녀들을 가리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밤, 여러분의 자유로운 소통을 위해 통역이 되어 줄 인원입니다. 물론 통역 외에도 여러분이 원하시는 건 무엇이든 도와줄 겁니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듣기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하다.
전야제에 참석한 각국의 거부들은 미녀들의 등장이 싫지 않은 눈치였다.
남자라면 당연한 일이다.
싸구려 콜걸로 노골적이고 수준 떨어지는 접대를 하는 것도 아니다.
통역이라는 명분을 내세웠고, 그로 인해 미녀들은 외국어 실력을 갖춘 인텔리라는 신분이 증명됐다.
거기에 마창우가 묘한 뉘앙스를 덧붙였으니, 잘하면 한국에서의 일정을 즐겁게 만들어 줄 파트너가 될지도 모른다.
묘한 희망은 모든 남자들을 들뜨게 만드는 법이다.
결과가 정해진 먹잇감보다 이런 식의 유혹이 남자들을 더 자극한다는 걸 마창우는 익히 알고 있었다.
“한 원장님도 즐거운 파티를 즐기십시오. 우리의 밤 아닙니까. 하하하!”
공식적인 인사를 마친 마창우가 한지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백성필과 허충욱은 벌써 여기저기 인사를 나누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인맥을 쌓는 데 있어 이런 기회도 드물기 때문이다.
한지호도 전야제 파티라는 잘 차려진 밥상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마 이사님의 수완에 감탄을 여러 번 하게 됩니다. 오늘 밤을 제대로 즐기며 더 많이 배우겠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제가 늘 원장님께 신세만 지지 않습니까.”
진심이 묻어나는 칭찬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강렬하게 눈빛을 교환했다.
곧이어 둘은 동시에 씨익 미소를 지었다.
서로가 서로의 필드에서 한참 더 높이 올라갈 재목임을 알아본 지 오래다.
한지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국제적인 거부들과 미녀들이 샴페인을 마시며 환담을 나누는 파티의 중심으로 나아갈 시간이었다.
***
“술을 상당히 즐기시는군요. 지금은 괜찮지만, 이대로 3년만 지나면 간에 무리가 올지 모릅니다. 미리 관리를 해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한지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했다.
한국말이 아닌 영어로 의사를 전달하는 데도 크게 무리가 없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인도네시아 출신의 에단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건강 검진에서도 간이 문제라고 나왔었는데 신기합니다. 손 한 번 잡은 걸로 진단을 내리다니…….”
에단 역시 영어로 대답했다.
인디안 잉글리쉬(Indian English) 억양이 묻어 나왔지만, 의사소통을 하는 데 지장이 없었다.
에단과 한지호 사이에는 굳이 통역이 필요 없었다.
그래도 모델처럼 늘씬한 미녀가 샴페인을 들고 두 사람 사이에서 그림 역할을 했다.
확실히 미녀 한 명이 서 있으니 통역을 하건 말건 분위기가 한층 화기애애해지는 것 같았다.
한지호는 신기해하는 에단을 바라보며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한의학이 가진 힘입니다. 코리안 트레디셔널 메디슨, 아니 아시안 트레디셔널 메디슨의 신비죠.”
“아시안 트레디셔널 메디슨. 인도네시아에도 전통 의학이 있지만 체계적으로 정립이 되어 있진 않아요. 그마저도 서양 의학에 자리를 다 내주었고.”
“중국과 한국은 다릅니다. 중의학, 한의학이 오랜 뿌리를 두고 발전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텍사스 의대나 존스 홉킨스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중입니다.”
“내가 전혀 몰랐던 분야네요. 다음에 우리 한 번 만나죠.”
에단이 품 안에서 명함을 꺼냈다.
한지호는 그의 명함을 받고, 자신의 것을 꺼내 건네줬다.
이미 블랙문 카지노의 의료 자문으로 소개를 받았으니 확실한 신분이 보장된 셈이다.
명함을 교환한 한지호는 살짝 에단의 직함을 살펴봤다.
‘자카테크 CEO……. 잘은 몰라도 요즘 인도네시아가 엄청나다던데, 자카르타에서 온 거부인 것 같아.’
30대 중반의 에단은 사실 IT 업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국제적인 인물이다.
인도네시아 자바 섬 출신답게 까무잡잡한 피부와 균형 잡힌 체형, 핸섬한 외모로도 유명한 그의 이름은 자카르타 IT 업계에서 자수성가의 상징으로 통한다.
나중에 조사를 해 보면 한지호도 깜짝 놀랄 게 분명했다.
어쨌거나 그런 에단이 한지호에게 호기심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명함을 주고받았지만, 이만한 인물의 개인 명함을 받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명함에 적힌 직통 전화번호가 언젠가는 어마어마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
한지호와 에단은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정리했다.
호감을 가지고 흥미로운 대화를 공유했으니, 기회가 된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반가웠어요, 닥터 한.”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악수를 나눈 한지호는 넓게 펼쳐진 공간을 쳐다봤다.
창공 위에서 사냥감을 찾아 맴도는 한 마리 독수리가 된 기분이었다.
블랙문 카지노의 지하 2층은 큰 게임을 즐기는 VVIP들을 위한 프라이빗 룸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중앙에 탁 트인 공간의 넓이도 결코 좁지 않았다.
성대하고 비밀스러운 파티를 즐기기에 딱 알맞은 장소였다.
대리석과 18k 금을 사용해 치장된 화려한 인테리어는 비현실적인 느낌을 선사했다.
마치 화려했던 로마의 전성기로 차원 이동을 한 것 같았다.
그 안에서 늘씬한 미녀들이 샴페인과 핑거 푸드를 끊임없이 날랐고, 더 아름다운 모델들이 통역사 역할을 하며 여기저기에서 대화의 물꼬를 틔우고 있었다.
아마 전야제 파티를 돕는 미녀들은 고액 일당을 받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 모인 거부들과 마음이 통하면 단위가 다른 액수로 하룻밤을 보낼 수 있고, 아예 팔자가 바뀔 가능성도 있다.
물론 모든 것은 그녀들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 있다.
한지호는 길에서 만나면 뒤돌아볼 것 같은 미녀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대신 미녀들이 모여 있는 대상을 찾았다.
영악한 미녀들을 끌어모으는 인물이라면 특별하지 않을까.
곧이어 그의 눈에 사냥감이 포착됐다.
‘중국 남방계 스타일의 외모, 금통 시계, 다이아가 박힌 한정판 아이폰. 저게 10억이라고 했었나?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전형적인 중국 재벌 2세 스타일. 내가 관심 둘 인물은 아니야.’
한지호는 순식간에 판단을 내렸다.
여러 명의 미녀들이 온몸을 번쩍이게 치장한 중국 부자 옆에 서 있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저런 스타일과는 사대가 맞지 않는다.
그 순간, 독특한 스타일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한 번이라도 안아 보고픈 미녀들을 물리치고 구석에서 혼자 샴페인을 마시고 있는 남자였다.
전야제에 참석한 거부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즐겁게 파티 분위기를 즐기는 중이었다.
다들 모르는 사람에게 자연스레 말을 거는 파티 문화가 익숙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비슷한 클래스의 사람들이 모인 파티이기에 국적이 달라도 어울리기 쉬웠다.
그런데 한지호가 포착한 남자는 다른 공간에 머무는 듯 무심한 눈빛으로 카지노 내부를 둘러보고 있었다.
한지호는 돔 페리뇽이 찰랑거리는 샴페인 잔을 든 채 그에게 다가갔다.
본능적인 흥미를 불러일으킨 상대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실례합니다.”
한지호가 먼저 영어로 말을 걸었다.
중국인, 또는 일본인으로 보이는 상대가 영어를 하지 못한다면 별수 없이 통역을 하는 미녀를 불러와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남자가 고개를 돌리며 완벽한 억양의 영어로 대답했다.
그것도 미국이 아닌 정통 영국식 영어였다.
“무슨 일이죠?”
“혼자 계시기에 인사를 하고 싶어서요.”
한지호는 여유로운 얼굴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의 목례에 남자도 자세를 고쳤다.
20대 후반, 아니면 30대 초반. 한지호와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첸입니다. 반가워요.”
“한지호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내뱉은 한지호가 첸의 손을 잡았다.
이 악수가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게 되는지, 아직은 한지호도 첸도 알지 못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