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3장, 전야제(前夜祭) (1)
아침부터 마음이 붕 뜬 느낌이었다.
마음을 다잡고 환자 한 명 한 명에게 최선을 다했지만, 평소와 다른 기분이라는 걸 숨길 순 없었다.
환자들은 모르지만 함께 일하는 원화 한의원 직원들은 한지호가 상당히 업(up) 됐다는 걸 눈치 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분 좋은 소식들이 줄지었고, 오늘밤에는 무척 중요하고도 특별한 자리에 참석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먼저 황태수의 아내는 지난 2주 동안 발작을 하지 않았다.
사슬로 지은 약의 복용을 끝낸 지 벌써 2주가 넘었다.
약하게나마 발작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그녀는 정상인처럼 무리 없이 일상생활을 소화했다.
발작에 대한 염려도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질 것이다.
광전증 증상이 발병한 이후 2주 넘게 발작이 없었던 건 처음이었다.
황태수 부부는 완치라는 말이 허풍이 아님을 체감했고, 한지호 역시 스스로의 의술에 자부심을 느꼈다.
전생을 각성하고 난 후 생명의 은인이란 말을 여러 번 들었지만, 황태수 아내의 케이스는 각별했다.
광전증으로 인생이 완전히 망가졌던 부부 한 쌍을 벼랑 끝에서 같이 구해낸 것이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그의 아내를 치료한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허약해진 체질을 개선하고, 온전하게 남아있는 한 쪽 눈이 건강해지도록 보약을 지었다.
당연히 일반적인 VIP 환자라면 최소 몇 백만 원을 내야만 한지호의 보약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플래티넘 홀딩스의 유건영을 통해 황태수에게 일자리를 알아봐줬다.
딱히 좋은 일자리는 아니지만, 그가 다시 서울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데 모자람이 없는 직장을 구해준 것이다.
아내의 병을 치료하고 직장까지 소개해줬으니 황태수는 한지호만 보면 눈물을 뚝뚝 흘리려 했다.
그의 말대로 한지호가 죽으라면 시늉이 아니라 정말 죽을 것처럼 은혜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대가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인생은 길고 복잡한 법이다.
언젠가는 황태수 부부가 한지호에게 도움이 되어 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대가 없는 선행은 돌고 돌아 긍정적인 나비 효과를 일으킬 것 같았다.
황태수 부부를 확실하게 도우며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한의사로서도 한 단계 도약한 한지호는 또 다른 경사를 맞이했다.
유초아가 진짜 대학생이 된 것이다.
국내 최고의 경쟁률을 자랑하는 D대학교 연극영화과에 합격한 유초아는 신입생 OT에 참석하며 캠퍼스의 낭만을 꿈꾸고 있었다.
한지호가 원화 재단을 만들어 천사원을 다시 세웠고, 등록금까지 든든하게 지원한 결과였다.
유초아의 미모가 꽃을 피우면 정말 여배우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막내 여동생이나 다름없는 그녀가 대학에서 마음껏 꿈을 꾸길 바랄 따름이었다.
천사원의 다른 아이들도 유초아를 보며 꿈을 키워갔다.
한지호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만, 유초아는 한 결 가깝게 느껴질 터였다.
그런 그녀가 대학생이 됐으니 중고등학생인 지훈이와 민기도 자극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일은 순환한다.
다만 악순환이냐 선순환이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진다.
한지호와 유초아는 천사원 아이들에게 선순환하는 구조를 만들어줬다.
이제 남은 아이들이 노력만 하면 훗날 천사원은 세상에 널리 알려질 명문 보육원이 될 수도 있다.
최근 있었던 좋은 일들을 생각하며 미소를 짓던 한지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 환자의 진료가 끝났고, 차트 정리까지 마쳤으니 병원 문을 닫을 시간이다.
오늘밤에는 그의 기분을 붕 뜨게 만든 중요한 행사가 열린다.
그렇기에 특별히 신경 써서 옷차림을 점검하고 약속 장소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전야제라, 전야제.”
한지호가 하얀 가운을 벗으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드디어 영종도에 들어선 내국인 카지노의 전야제가 열리게 됐다.
마창우로부터 투자 제안을 받고, 카지노 사업을 성사시키기까지 손에 땀을 쥐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그 모든 장애물을 넘고 블랙문 카지노의 전야제가 열리게 됐으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한지호는 무려 50억 원을 투자했다.
TV에 출연하는 유명 한의사로서의 신용을 이용해 최대한 자금을 끌어 모은 것이다.
오늘밤을 시작으로 그가 투자한 50억 원이 점점 불어나게 된다.
한국을 비롯해 중국과 동남아의 거부들을 초청한 전야제는 샴페인을 터트리는 날이다.
게다가 국제적인 부자들과 안면을 트게 해줄 기회의 시간이기도 하다.
웬만해선 평정심을 잃지 않는 한지호지만, 오늘은 살짝 들떠 있을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평소처럼, 침착하고 당당하게.”
거울을 본 한지호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곧이어 그가 옷걸이에 걸어둔 자켓을 걸치고 원장실 밖으로 나왔다.
진료가 끝난 원화 한의원의 불은 꺼진다.
하지만 블랙문 카지노의 화려한 불빛이 오늘밤을 밝힐 것이다.
한지호는 영종도로 달려갈 준비를 마쳤다.
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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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새로 주문해놓은 차가 나오기도 전이고, 어차피 술을 꽤 마실 것 같아 모범 택시로 영종도까지 왔다.
영종도 국제 특구에 도착한 한지호는 몰라보게 달라진 전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속속 완공된 글로벌한 특급 호텔들이 줄지어 휘황찬란한 야경을 만들었다.
인천시에서 심혈을 기울여 조성한 공원과 자전거 도로, 독특한 디자인의 가로등도 국제 특구를 멋진 공간으로 꾸미는데 일조했다.
마치 외국 같았다.
한국의 신도시라고 하기엔 믿기 힘들 정도로 세련된 부티가 줄줄 흘렀다.
“인천이 요지는 요지야.”
한지호는 자못 진지한 얼굴로 국제 특구를 살펴봤다.
인천시는 이미 송도 신도시를 성공적으로 개발해냈다.
송도 역시 외국의 설계 회사가 주축이 되어 더 할 나위 없이 트렌디한 신도시가 됐다.
해외 출장이 잦은 젊은 부자와 외국계 기업 임원들은 강남보다 송도를 더 선호한다.
인천공항과 가까우면서 너무 번잡하지 않고, 동시에 완벽한 인프라와 상업 시설을 갖췄기 때문이다.
그런 송도를 위협할 새로운 신도시가 영종도 국제 특구였다.
사실 위협이라기보다는 인천이라는 큰 틀 안에서 두 곳의 신도시가 시너지 효과를 낼 것 같았다.
한지호는 이 거대한 신도시 프로젝트의 일익(一翼)을 맡았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블랙문 카지노에 몰려들 내외국인 손님들은 영종도 국제 특구의 경제를 활성화 시킬 것이다.
송도와는 달리 주거 지구가 아닌 비즈니스 특구이기에 어떻게든 돈이 돌아야 한다.
카지노에서 뿌려질 막대한 현금은 영종도, 인천, 나아가 한국 경제에 꽤나 도움이 될 전망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한지호는 상념을 거두고 블랙문 카지노가 들어선 H 호텔로 걸어갔다.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5성급 호텔답게 입구에서부터 정장을 차려입은 직원이 허리를 숙였다.
“프론트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한지호는 비슷한 또래의 직원에게 손을 내저었다.
투숙객으로 호텔을 방문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블랙문 카지노에 볼 일이 있습니다.”
“아, 그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호텔 직원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금방 무표정한 얼굴을 회복했지만 놀랐던 게 분명하다.
블랙문 카지노의 전야제는 국내외 최고의 VIP들만 초대를 받았다.
H 호텔 직원들도 사전에 철저하게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지호가 카지노에 볼 일이 있다고 하니 의외였던 것이다.
하지만 교육을 잘 받은 호텔리어답게 얼른 포커페이스를 갖췄다.
사실 한지호보다 더 어린 재벌 2세들도 꽤 초청을 받았다.
호텔 직원은 TV에 나오는 한지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젊은 사람이 카지노 전야제에 참석한 게 마냥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저벅저벅.
한지호는 호텔 직원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한 층만 내려가면 카지노 입구가 나오기에 굳이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다.
덩치 좋은 경호원들이 지하 1층의 카지노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별도의 VIP 입구와 직원 출입구가 있지만 오늘은 이곳의 입구만 열린다.
지하 1층까지 안내를 해준 호텔 직원이 다시금 허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대리석으로 장식 된 커다란 입구를 지키는 경호원들이 정중하게 질문을 해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조금 일찍 도착한 것 같군요. 전야제에 참석하러 왔습니다.”
“죄송하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한지호입니다. 마창우 이사님과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마창우의 이름이 나오자 경호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원래도 정중한 태도를 보였지만, 한층 몸가짐을 조심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내국인 초대자 리스트에서 한지호의 이름을 찾아낸 경호원들이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떡 벌어진 덩치들 여럿이 일시에 90도 인사를 하자 마치 조폭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마 이사님께서 계신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경호원 중 한 명이 앞장섰다.
대리석과 원목으로 장식 된 거대한 카지노 입구의 문도 활짝 열렸다.
손님이 올 때마다 일일이 문을 여는 것 같았다.
번거롭겠지만 확실히 임팩트가 있었다.
문이 열리고, 길지 않은 복도를 지나치자 블랙문 카지노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지하 1층 공간을 가득 채운 카드 테이블과 룰렛, 왼쪽 면에 들어선 고급스러운 식당과 바(bar)까지.
게임을 위한 테이블과 기구만 없으면 백화점 명품관을 옮겨 놓은 것 같은 인테리어였다.
카지노를 즐기는 사람들이 이용할 내부 레스토랑과 바(bar) 역시 미국에서 꽤 이름 높은 프렌차이즈로 채워졌다.
물론 바깥보다 가격은 훨씬 비싸겠지만, 동네 푸드 코트처럼 운영 되는 정선 카지노와는 차원이 달랐다.
지하 2층은 이보다 훨씬 더 화려하게 꾸며 놓았을 것이다.
지하 1층이 내국인 등 소소한 이용객들을 위한 공간이라면 2층은 VVIP를 위해 특별히 꾸민 공간이다.
게임 한 판에 수천만 원 이상을 가볍게 배팅하는 사람들이 지하 2층의 프라이빗 룸을 채울 것이다.
한지호는 전야제가 시작되면 지하 2층을 둘러보기로 하고 경호원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다른 손님들은 아직 안 오셨습니까?”
그의 물음에 경호원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대답했다.
윗사람에게 대답을 할 때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숙이는 게 그 바닥의 예의인 것 같았다.
“먼저 도착하신 국내외 귀빈들은 스위트 룸에서 쉬고 계십니다. 시간이 되면 지하 2층으로 모실 예정입니다.”
“전야제는 1층이 아니라 2층에서 진행되는 것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한지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따라갔다.
스위트 룸에서 쉬고 있을 다른 손님들과 달리 한지호는 블랙문 카지노의 투자자 자격으로 전야제에 참석한 것이다.
그렇기에 대표이사인 마창우가 기다리는 곳으로 안내를 하는 모양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손님이 아닌 파티를 준비한 호스트의 입장이다.
물론 실질적인 준비는 마창우와 블랙문 코퍼레이션이 담당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대외적인 명분으로는 한지호도 블랙문 카지노의 주인이다.
발을 들인 액수를 떠나 마창우가 공인한 주요 투자자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똑똑-
“마 이사님, 한지호 원장님께서 오셨습니다.”
카지노 내부의 대표실에 도착한 경호원이 문을 두드렸다.
대표실은 블랙문 카지노의 인테리어와 이질적이지 않게 설계 돼 있었다.
밖에서는 안이 안 보이지만 안에서는 바깥 전경이 다 보이는 특수 유리를 벽면에 도배해 놓았다.
아마 대표실 안에 들어가면 블랙문 카지노의 전체 모습이 한눈에 들어올 것 같았다.
스르르륵!
대답 대신 문이 열렸다.
밀고 닫는 방식이 아니라 자동으로 슬라이딩 되는 문이었다.
대표실까지 안내를 한 경호원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한지호는 망설이지 않고 마창우가 기다리고 있는 공간으로 들어섰다.
“한 원장님, 오셨습니까!”
마창우가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대표실 안에는 인천시 경제부시장 백성필과 국제 특구 추진위원장 허충욱이 미리 도착해 있었다.
한지호와 함께 블랙문 카지노를 유치한 개국 공신들이다.
한지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바라봤다.
허충욱이 쓰러졌던 걸 계기로 네 명 사이에 제법 끈끈한 감정이 생겼다.
“드디어 블랙문 카지노가 세상에 나서게 되는군요. 이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한지호의 말을 백성필이 대표로 받았다.
“한 원장, 오늘부터 우리는 스케일이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오. 영종도를 디딤돌 삼아 한 원장의 원대한 꿈을 이뤄가길 바라겠소. 그동안 고생 많았으니 다 잊고 샴페인을 터트리십시다.”
차기 인천시장 당선이 유력한 백성필의 축사가 그냥 하는 말로 들리지 않았다.
한지호는 원대한 야망의 조각을 가슴 깊은 곳에서 꺼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오늘 밤, 전야제를 시작으로 인생의 또 다른 전기가 열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