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91화 (91/255)

# 91

4장, 승부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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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호는 돌아가는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고 받고 있었다.

김영찬 교수가 K대 한의학과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내추럴 코리텍 등이 법적 대응을 검토한다는 것 모두 모르지 않았다.

팀 DK의 오대경이 그의 손발이 되어 정보를 물어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 다 예사로 넘길 사안은 아니었다.

모교의 윤리위원회에 회부되는 건 그 자체로 크나큰 불명예다.

대형 로펌을 앞세운 업체들과 법적 분쟁을 시작하게 되면 꽤 오래 골치아픈 일에 시달려야 한다.

소송에서 이기고 지는 게 문제가 아니다.

1심, 2심, 3심을 거치는 동안 시간과 정신력을 무진장 소모하게 된다.

하지만 한지호는 그다지 걱정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강북 원조 부자들의 동네인 평창동을 찾는 그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한지호는 황만금의 대저택 담벼락 밑에 차를 세웠다.

매일같이 이곳을 찾아와 태자병을 치료했던 게 엊그제 같았다.

그런데 벌써 수 개월이 지나고, 이제는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한의사가 됐다.

남다른 감회에 젖어들 수밖에 없었다.

딩동-

초인종을 누르자 기다렸다는 듯 커다란 대문이 열렸다.

한지호는 빈털털이 프리랜서 한의사 시절로 돌아가 계단을 거슬러 올랐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처음 전생을 깨달았을 때의 기분이 되살아났다.

넓은 정원 너머 저택 현관 앞에는 말쑥한 차림의 집사가 나와 있었다.

집사는 한지호를 발견하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그나저나 오랜만입니다, 집사님.”

“한 원장님 소식은 뉴스를 통해 종종 접하고 있습니다.”

“그런가요? 괜히 부끄러워지네요.”

“회장님께서도 뉴스를 보실 때마다 흐뭇해 하십니다.”

집사의 말에 한지호가 미소를 지었다.

어찌 보면 황만금은 한지호로 하여금 VIP 전문 한의사가 되는 길을 열어준 인물이다.

1억 원의 수표를 치료비로 준 것, 원화 한의원을 열 때 조건 없이 10억 원을 투자해준 것 외에도 여러모로 고마운 게 많았다.

세상에서 더 이상 이룰 게 없는 황만금은 한지호의 성장을 지켜보며 응원하는 큰 어른과 같았다.

한지호 역시 산전수전을 겪으며 밑바닥에서 평창동 최고의 현금부자까지 올라간 황만금에게 배울 점이 많았다.

집사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간 그는 당연하다는 듯 2층 서재를 찾았다.

황만금은 평소처럼 서재 안에서 책을 읽고 있을 터였다.

불법 도박 사업을 바탕으로 큰돈을 벌었지만, 세간의 평가와는 다르게 무식한 노인네가 아니었다.

매일 새로운 책과 세계의 뉴스를 가까이 하며 투자처를 발굴하는 황만금의 통찰력은 절대 만만히 볼 수 없다.

돈을 벌기는 쉬워도 지키기는 어렵다고 하지 않았던가.

큰돈을 굴리며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황만금의 저력 뒤에는 독서에 대한 집착이 자리잡고 있었다.

똑똑똑-

“회장님, 한 원장님이 왔습니다.”

“그래! 들어오라 그래!”

서재 안쪽에서 황만금의 목소리가 울렸다.

무척 반가운지 한껏 상기 된 음성이었다.

집사가 문을 열어줬고, 한지호는 그에게 목례를 하며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한 원장, 어서 오게!”

“잘 지내셨습니까, 회장님.”

“나야 잘 지내고말고. 그나저나 요즘 속이 좀 시끄럽지 않은가?”

황만금은 의자에서 일어나 한지호를 맞이했다.

그는 대놓고 한지호의 심경에 대해 물었다.

가짜 백수오 파동으로 인해 마음고생이 심했을 거라 여긴 것이다.

한지호는 여유롭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예상한 일이고, 국민들의 폭발적인 응원 덕에 잘 버티고 있습니다. 방송국에서도 시청률이 잘 나와서 좋아하더군요.”

“듣자하니 자네 모교인 K대와 몇몇 백수오 업체들이 단체 행동에 나선다는 풍문이 돌던데 말이야.”

“회장님께서도 들으셨습니까?”

“이 사람아, 여기저기에서 내 돈 받아먹고 있는 사람이 한둘인가. 특히 자네와 관련된 소식이면 나에게 바로 들어오게 되어 있네. 박 사무장도 걱정이 많더군.”

한지호는 새삼 황만금의 영향력을 실감했다.

하긴, 그가 언론계 등에 뿌려 놓은 현금이 한 두 푼이 아닐 것이다.

뿐만 아니라 원화 한의원의 사무장 박우식도 황만금이 추천해준 인물이다.

황만금은 원화 한의원의 투자자이자 한지호의 후견인으로서 그의 일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내색을 하지 않을 뿐, 누구보다 한지호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황만금 앞에서 속내를 숨기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한지호는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조언을 구하기 위해 평창동까지 찾아왔다.

황만금이 전후사정을 알고 있어 구구절절 상황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마음을 편히 먹은 한지호가 입을 열었다.

“회장님 말씀처럼 모교와 백수오 가공 업체들이 움직일 모양입니다.”

“걱정이 되는가?”

“아닙니다. 가장 큰 장애물이던 민시헌 의원을 막아 놓았습니다. 업체들이 명예훼손으로 걸고 넘어져도 공익을 위한 사실 적시에 해당되기에 소송에서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 다만 과정이 길어지고, 공연히 힘을 빼게 될까봐 신경이 쓰이는 것입니다.”

“흐르는 물의 방향을 억지로 되돌릴 순 없는 것이지. 그러려고 해봐야 급류에 휩쓸릴 뿐이네.”

황만금이 선문답 같은 말을 내놓았다.

한지호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자글자글한 주름과 기미로 가득 찬 노안이지만, 세상 풍파를 몸소 헤쳐 온 지혜가 묻어나왔다.

곧이어 황만금이 설명을 덧붙였다.

“가짜 백수오를 고발한 자네는 옳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물이네. 그런 자네를 못 마땅히 여겨 움직이는 이들은 물의 흐름을 막아 거꾸로 돌리려는 자들이지. 그냥 내버려두게. 그리하면 자네는 더욱 거센 급류가 되어 저들을 쓸어버리게 되어 있어.”

“그냥 내버려두고 더 강한 급류가 되어라…….”

“감이 오는가?”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습니다.”

“한 원장, 자네라면 바로 알아들을 줄 알았네.”

황만금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지호는 복잡하던 머릿속이 깨끗하게 정리 된 기분이었다.

굳이 상대의 수작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가 없다는 말, 놔두면 이쪽에 더 큰 힘이 생길 거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가 됐기 때문이다.

마치 속이 꽉 막혔을 때 시원한 사이다를 마신 기분이었다.

한층 밝아진 표정을 지은 한지호가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어려운 문제일수록 쉽게 생각해야 한다는 걸 잊고 있었습니다. 회장님 조언 덕분에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원래 훈수를 두는 게 쉬운 법이지.”

“괜찮으시다면 하나 더 여쭙고 싶은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뭐든 말해보게.”

“혹시 영종도에 설립이 논의되고 있는 내국인 카지노 사업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한지호의 질문에 황만금의 안색이 바뀌었다.

그가 다소 굳은 얼굴로 한지호의 눈동자를 마주봤다.

“나도 투자를 하려고 관심을 뒀던 사업이네. 그러나 오래 전부터 내국인 카지노에 공을 들인 세력이 존재하더군. 외부에서 아무리 돈을 써도 치고 들어가는 게 불가능한 영역이라 포기하고 말았네.”

“사실 투자 제안을 받았습니다.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쪽 사업권을 꽉 잡고 있는 확실한 라인입니다.”

“그게 정말인가? 사실이라면 금맥을 잡은 셈이구만!”

“백수오 문제로 정신이 없긴 한데, 제 일을 도와주는 동생이 인천에서 이런저런 정황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신중하게 접근해보려 합니다.”

“자네를 알게 되고, 한의사 타이틀 하나로 만족할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네. 내가 관여할 부분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영역도 아니니 어디 한 번 제대로 만들어보게.”

“감사합니다.”

말은 이렇게 해도 황만금이 태클을 걸면 한지호의 대외 활동에도 제약이 걸린다.

아직 10억 원의 초기 투자금을 다 갚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만금은 투자자가 아닌 후견인으로서 정체성을 분명히 밝혔다.

한지호는 평창동에 들러 돈 주고 살 수 없는 조언을 얻었고, 카지노 투자에 대해 허락 아닌 허락을 받았다.

사람들은 보통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멘토를 찾는다.

믿을 만한 멘토가 없어서 유명 연예인의 TV 프로그램을 보고 위안을 얻는 경우도 많다.

황만금 같은 멘토가 있다는 건 축복이다.

복잡한 일 이야기를 충분히 나눈 한지호는 이런저런 사담을 주고받으며 미소를 지었다.

평창동에서 얻은 힌트로 남은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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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백수오 파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용감하게 진실을 고발한 한지호가 영웅으로 떠올랐고, 관련 업체들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소 충격적인 헤드라인의 기사가 언론을 장식했다.

- K대 한의학과, 가짜 백수오 고발한 한지호 원장 윤리위원회 회부! -

- 내추럴 코리텍, 대형 로펌에 한지호 원장 명예훼손으로 고소 검토 중! -

잠잠해지던 여론이 다시 들끓었다.

한지호는 한의원 앞으로 찾아왔던 기자들에게 부당한 외압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말을 남겼었다.

그의 말처럼 부당한 외압이 실제로 작용하기 시작했고, 더러운 권력에 질려있던 국민들의 분노에 불을 지피기 충분했다.

내용을 살펴보면 여론이 들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K대 한의학과에서 한지호를 윤리위원회에 회부시킨 이유는 ‘잦은 방송 출연과 이슈 메이킹으로 건전한 한의사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유였다.

이제껏 K대 출신 중에 TV에 나와 쇼 닥터 노릇을 한 한의사들이 한 두 명이 아니다.

한지호가 스캔들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정당한 방송 출연을 통해 이슈를 만든 걸 걸고넘어지는 건 속이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다.

내추럴 코리텍의 명예훼손 고소도 마찬가지다.

사실 적시를 해도 명예훼손이 성립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공익을 위한 사실 공표의 경우 명예훼손죄로 처벌을 받지 않는다.

가짜 백수오를 사용한 업체 이름을 공개한 건 누가 봐도 공익을 위한 일이었다.

자승자박(自繩自縛).

K대 한의학과와 내추럴 코리텍은 공연히 한지호를 압박하려다 거센 역풍을 맞게 됐다.

벌써부터 K대 한의학과 사무실은 전화기에 불이 났고, 내추럴 코리텍은 처음 방송이 나갔을 때보다 더 심한 비난 여론에 휩싸였다.

괜히 나서서 한지호를 들쑤시는 바람에 사단이 난 것이다.

그러나 언론 기자들에게 윤리위원회 회부와 소송 진행을 알린 사람은 따로 있었다.

한지호가 사무장 박우식을 움직여 한 발 앞서 정보를 흘린 것이다.

K대 한의학과와 내추럴 코리텍의 행보를 기자들에게 제보해서 여론 재판을 이끌어내려는 계획이 적중했다.

황만금의 조언대로 굳이 윤리위원회나 로펌과 싸울 필요가 없었다.

있는 그대로 사실을 알리기만 하면 뜨겁게 불타오른 여론이 모든 걸 해결해주리라 기대했다.

그 기대는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

뜨거운 여론의 맛을 본 K대 한의학과는 즉각 학교 차원의 공문을 발표하며 윤리위원회 회부 결과 특별한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추럴 코리텍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한지호 원장에게 소송을 걸 의도가 없고, 계속 자숙하겠다는 사과문을 재차 발표했다.

이미 식약청과 검찰의 수사가 시작된 상황에서 여론이 더 악화되는 걸 부담스럽게 느꼈기 때문이다.

흐르는 물을 억지로 막으려 하면 급류(急流)가 된다는 황만금의 말이 무섭도록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이로서 한지호는 가짜 백수오 파동을 둘러싼 크고 작은 전투에서 모조리 승리했다.

민시헌을 비롯해 여기저기에 후환을 남겨두긴 했지만, 적어도 당장 문제될 일은 없었다.

특히 건강 문제에 민감한 주부들 사이에서 한지호는 단순한 훈남 한의사가 아니라 영웅 대접을 받게 됐고, MBS는 물론이고 다른 방송국에서도 그를 모셔가기 위해 러브콜을 보내왔다.

원화 한의원의 상담 예약이 2주 넘게 풀로 가득 차는 건 이제 일상이 됐다.

하나의 관문을 무사히 뛰어넘은 한지호는 새로운 장을 맞이하고 있었다.

국민적 관심과 응원을 등에 업은 한의사로서, 그리고 동시에 내국인 카지노 투자를 결정한 사업가로서 역량을 발휘할 때가 왔다.

하지만 아직 그는 모르고 있었다.

카지노 투자 사업이 그리 단순하게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그 과정에서 아주 까다로운 병마(病魔)와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결국은 한의사로서의 의술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말이다.

또한 윤리위원회를 제멋대로 이용하지 못한 김영찬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물론 한지호 역시 김영찬 교수를 완전히 밟아버릴 기회를 노리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가짜 백수오 파동을 이끌어낸 한지호는 이제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기사화되는 유명인이 됐다.

TV에 나오는 한의사 수준을 넘어서 모르는 사람이 드문 레벨까지 올라선 것이다.

앞으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터. 지금부터 인생을 건 본 게임이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하를 향한 야망을 품은 한의사.

힘이 강해진 만큼 맞서 싸워야 할 적들의 덩치도 더 커졌다.

다른 걸 떠나서 미처 경험하지 못한 희귀한 병마와 질병들도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한지호는 두려움 없이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과 맞서 싸울 것이다.

가느다란 침 하나만 있으면 세상 그 무엇도 무서울 게 없었다.

현생의 한지호는 전생의 규호가 이루지 못한 천하의 꿈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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