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남화타-88화 (88/255)

# 88

3장, 평정심(平靜心) (1)

당연하게도, 난리가 났다.

한지호의 예상처럼 다이어트 한약 방송을 능가하는 후폭풍이 몰아쳤다.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아침까지 스마트 폰을 꺼두길 정말 잘 했다.

아니었으면 쉬지 않고 울리는 알람에 노이로제가 걸렸을 것이다.

한지호는 토요일 일찍 병원으로 출근했다.

평소처럼 오전 진료를 보기 위해서였다.

누구보다 먼저 한의원에 도착한 한지호는 원장실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로 접속하자마자 어제 방송과 관련된 기사가 메인 화면을 장식한 게 보였다.

실시간 검색어 1위는 가짜 백수오였다.

2위가 한지호, 3위가 이엽우피소, 4위가 내추럴 코리텍이다.

프로그램 제목인 건강백서는 9위에 랭크되었다.

그야말로 밤새도록 대한민국의 이슈를 장악해버린 것이다.

모바일과 웹 위주로 이슈가 소모되는 한국에서 실시간 검색어를 장악했다는 건 대단한 의미가 있다.

이미 발 빠른 언론들은 가짜 백수오와 관련된 기사를 무한정 재생산했고, 뉴스 순위에서도 가짜 백수오가 상위권을 점령하고 있었다.

다른 중요한 뉴스들이 가짜 백수오에 묻혔다는 볼멘소리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거 정말… 장난이 아니네.”

한지호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예상은 했지만 그 모든 계산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한 번 몸집을 불린 이슈는 네티즌들의 손가락을 타고 계속 덩치를 키웠다.

주말이 지나면 한국에서 가짜 백수오 사건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질 기세였다.

한지호는 여러 기사 중에서 상위권을 장악한 뉴스 몇 개를 클릭해봤다.

“충격! 국내 업체 대부분이 가짜 백수오 사용. <건강백서, 진짜! 가짜!>의 한지호 원장에 따르면 한약 가공 업체들이 중국산 이엽우피소를 백수오로 둔갑시켜 원가 절감을 시도했다고 한다. 뭐, 나쁘지 않은 팩트 정리군.”

그는 기사 하나 하나를 평가하며 네티즌들의 댓글까지 살펴봤다.

베스트 댓글은 80% 이상이 국내 업체를 욕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우리나라도 중국처럼 식품으로 장난치는 놈들 사형시켜야…… 음, 이건 좀 과격한 댓글인데? 이런 소식은 업체 이름 가리는데 건강백서에서는 가짜 백수오 사용한 업체를 전부 알려줘서 속 시원했다. 바로 그게 제가 의도한 겁니다.”

한지호는 댓글들을 읽으며 네티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혼잣말을 주고받았다.

“용기 있게 진실을 고발해준 한지호 선생님, 고맙습니다. 저도 좋은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분노한 네티즌들은 백수오 가공 업체를 비난하는 동시에 건강백서 프로그램과 한지호의 용기를 칭찬하고 있었다.

특히 업체 이름을 가리지 않고 낱낱이 공개한 게 반응이 좋았다.

그동안의 고발 프로그램은 업체나 식당 등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었다.

사실 적시라고 해도 명예훼손이나 영업 방해 등 법적 분쟁의 여지가 있기에 다들 몸을 사린 것이다.

하지만 한지호는 달랐다.

그는 반드시 업체 이름을 공개해야 된다고 주장했고, 채성일 PD는 위험을 무릅쓰고 한지호의 의견을 따라줬다.

어쩌면 가짜 백수오를 사용한 업체 이름을 드러냈기에 지금처럼 반응이 뜨거운 건지도 모른다.

특히 업계 1위를 굳건히 지키던 내추럴 코리텍의 이름은 가짜 백수오 사건의 대표격으로 거론되고 있었다.

이런저런 뉴스와 댓글을 쭉 읽던 한지호는 눈길을 확 잡아끄는 헤드라인을 발견했다.

“내부고발자? 건강 상식 저격수? 한의학계 논란의 중심에는 한지호 원장이 있다!”

기사 제목부터 심상치 않았다.

포털 사이트 상위권에 올라있는 걸 보면 이미 수많은 네티즌들이 읽은 기사라는 뜻이다.

한지호는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기사를 클릭했다.

곧이어 <건강백서, 진짜! 가짜!>에 출연 중인 한지호의 사진이 나타났고, 장문의 기사 겸 칼럼이 이어졌다.

놀랍게도 주요 일간지의 부장 급 기자가 직접 작성한 기사였다.

속된 말로 우라까이를 한 인터넷 언론 기사가 아니라 중량감 넘치는 정통 보도였다.

한지호는 장문의 기사 중에서 묵과할 수 없는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원화 한의원의 한지호 원장은 이전에도 다이어트 한약 논쟁을 촉발시킨 전력이 있다. 그 결과 수많은 한의원과 한약방이 위기를 겪었고, 원화 한의원은 다이어트 한약을 지으러 몰려든 새로운 환자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건강백서, 진짜! 가짜!>에서 백수오 가공 업체들을 고발한 이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원화 한의원에서 기다렸다는 듯 백수오로 만든 한약을 내놓지는 않을까. 잘못이 있으면 당연히 고발을 해야 한다. 그러나 자기 이익을 위해 한의학계의 내부고발자 역할을 자처하는 젊은 한의사의 모습에서 진정성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이게 말이야, 방구야?”

교묘하게 한지호를 비판하는 기사였다.

다이어트 한약 방송 이후 원화 한의원이 가장 큰 수혜를 입었다고 지적한 것도 악의적이다.

거기에 가짜 백수오를 연결시켜 마치 한지호를 자기 이익을 위해 고발을 일삼는 배신자처럼 느껴지게 만들어 놓았다.

다행히 네티즌들의 반응은 이 기사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물 타기를 하려는 거냐는 댓글부터 국민들의 알 권리를 위해 용기를 낸 한지호를 비난하지 말라는 댓글들이 주류를 이뤘다.

그러나 일간지의 부장이 이런 기사를 내보냈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사인이었다.

한지호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사회의 거물들이 하나 둘 나서기 시작할 거라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불쾌한 기사까지 확인한 한지호는 품 안에서 스마트 폰을 꺼냈다.

어제 저녁 이후 전원을 꺼둔 폰을 킬 때가 됐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 온 오프 버튼을 눌렀다.

우우우우웅-

밤 사이 잠들어있던 스마트 폰이 기지개를 켜듯 진동을 토해냈다.

곧이어 짧은 부팅 화면이 지나갔고, 전원이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 알람이 쏟아졌다.

우웅! 우웅!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 도착을 알리는 진동이 끊임없이 울렸다.

누가 보면 전화가 계속 오는 거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한지호는 알람음이 멎을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중간에 연락 온 내역을 확인해봐야 계속 뒤로 밀릴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분이나 흘렀을까.

드디어 스마트 폰이 조금 잠잠해졌다.

한지호는 기대 반 걱정 반의 심경으로 스마트 폰 액정을 노려봤다.

과연 몇 통의 전화와 메시지가 와있을까.

“대박이다, 진짜.”

연락을 확인한 한지호는 피식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좋다 싫다로 나눌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부재중 전화 467통, 메시지 대략 1200개.

폰을 키자마자 배터리의 20%가 순식간에 증발 됐다.

전원을 켜고 부재중 연락을 체크하는 것만으로도 배터리의 5분의 1이 사라진 것이다.

어디서 전화가 왔고, 어떤 메시지를 보냈는지 일일이 확인 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래도 중요한 연락이 있을지 모르니 체크는 해두어야 한다.

아직 직원들의 출근 시간까지 1시간이 남았다.

아침, 아니 새벽부터 한의원에 나온 한지호는 이런 일을 예상했던 것이다.

직원들이 나오기 전에 하룻밤 동안의 대국민 반응을 확인하고, 쏟아진 연락을 분류해 둘 계획이었다.

부재중 통화 목록과 메시지들을 살펴보기 시작한 한지호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영양가 없는 인터뷰 요청이나 항의 연락 등은 빠르게 무시하며 넘겼다.

다만 진흙 속에도 진주는 숨겨져 있는 법이다.

혹시 모를 중요한 연락이나 제의를 찾아내기 위해 눈이 빠지도록 폰을 들여다보는 한지호의 태도가 사뭇 진지했다.

전쟁 아닌 전쟁은 시작됐고, 어제의 방송으로 선전포고를 한 이상 돌아갈 길은 없다.

배수진(背水陣)을 쳤다고 마음먹은 한지호는 자신이 만든 게임에서 반드시 최후에 웃는 자가 되겠다고 작정했다.

어제와는 다른 오늘의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

“원장님!”

낮게 깔린 목소리가 울렸다.

어느덧 직원들이 출근을 했고, 사무장 박우식이 가장 먼저 원장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한지호의 말이 끝나자 박우식이 문을 열었다.

다소 창백한 안색을 한 박우식은 허리를 숙이고 급히 용건을 말했다.

“병원 밖에 기자들이 몰려왔습니다. 홈페이지도 접속 폭주로 서버가 다운 됐습니다.”

“그렇군요. 다이어트 한약 때처럼 협회들의 반발은 없습니까?”

“아직까지는……. 없는 말씀을 하신 것도 아니고, 섣불리 나섰다간 국민 여론의 역풍을 맞을 테니 협회들이 쉽게 나서진 못할 것 같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기자들은 그냥 돌려보내세요. 당장 추가 인터뷰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주요 일간지 기자들을 포함해서 무려 스무 명이 병원 건물 앞에 모여 있습니다.”

“사무장님께서 직접 나가서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돌려보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원장님.”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상담과 진료에 전념하는 겁니다. 가짜 백수오 방송과 관련된 후폭풍은 나 혼자 맞으며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 직원들, 특히 환자들이 동요하게 만들면 안 됩니다. 저도 주의를 주겠지만, 박 사무장님이 직원들의 마음 단속을 확실히 해주세요.”

“원장님 지시대로 이행하겠습니다. 아침부터 분주한 모습 보여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반응이 뜨거울 거라 예상은 했지만 기대 이상이라서 저도 놀랐어요. 침착한 척 하고 있을 뿐입니다.”

한지호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박우식을 안심시켰다.

다른 무엇보다 원화 한의원을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게 중요하다.

직원들이 동요하면 환자들까지 덩달아 불안해지게 된다.

한지호는 가급적 원화 한의원을 가짜 백수오 파동에 휩쓸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이어트 한약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박우식을 내보낸 한지호는 컴퓨터에서 환자 차트를 살펴보며 오전 진료를 준비했다.

하루 사이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지만 비교적 담담한 모습이었다.

이미 여러 번 유명세를 타며 경험을 했기에 멘탈이 강해진 것이다.

사실 한지호는 수백 통의 전화와 1200개에 달하는 메시지 중에서 그냥 넘기지 못할 것들을 여럿 찾아냈다.

그 중에는 한지호의 멘탈을 뒤흔들 만한 것도 포함 돼 있었다.

특히 한의학계의 로열 패밀리이자 K대 한의학과 교수인 김영찬의 메시지, 그리고 민시헌 의원실의 보좌관이 보낸 메시지는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러나 한지호가 흔들리면 병원 전체가 흔들리기에 티를 내지 않을 뿐이었다.

- 너의 일탈을 학교 차원에서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 동문회와 교수회가 소집되어 처분을 내릴 테니 각오하고 있는 게 좋을 거다. 건방진 놈. -

김영찬은 늘 그렇듯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거만한 메시지를 보냈다.

한지호는 야소녀 모임을 통해 유명세를 얻고, 김영찬과 통화를 하며 이빨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앙심을 품어온 김영찬이 가짜 백수오 파동을 계기로 행동을 개시할 것 같았다.

한지호가 잘못한 게 하나도 없지만 김영찬이 마음먹고 나서면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모른다.

민시헌 의원실 보좌관의 메세지도 의미심장했다.

김영찬처럼 노골적으로 경고를 하진 않았어도 편하게 넘길 수 없는 내용이었다.

- 한 원장님,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의원님께서 무척 당황하셨습니다. -

짧은 문장이지만 부담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야당의 잠재적 대선 후보인 국회의원 민시헌의 불편한 심기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나도 아무 대책 없이 사고를 친 건 아닙니다. 김 교수님, 민 의원님.”

한지호는 두 사람을 떠올리며 마음가짐을 확실히 했다.

당장 오늘부터 본격적인 물밑 싸움이 시작 될 것이다.

탁탁!

손바닥으로 가볍게 책상을 두드린 한지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료실로 옮겨 환자들을 만날 시간이 됐다.

그에게는 아직 꺼내지 않은 카드들이 남아있다.

“조 간호사님, 5분 뒤부터 첫 환자 보내주세요.”

조민주에게 지시를 내리며 진료실로 들어가는 한지호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방송이 나가고, 본격적으로 화제가 되기 시작하자 부담감 보다는 호승심이 더 강해졌다.

전생을 각성하며 얻은 무인의 피가 뜨겁게 달아오른 것이다.

한지호는 복잡한 머리와 뜨거운 심장을 차분한 이성으로 조율하며 차근차근 히든카드를 뽑을 생각이었다.

한의학계와 정치권에 걸쳐 가짜 백수오를 놓고 펼쳐지는 싸움이 재미있게 흘러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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