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3장, 평정심(平靜心)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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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토요일 오전 진료가 끝났다.
한지호가 중심을 잡고, 박우식이 직원들을 독려한 덕분에 다들 평소와 같은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다.
예약을 잡고 방문한 상담자와 환자들도 어제 방송의 여파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지만, 크게 달라질 일은 없었다.
다들 어렵게 예약을 잡고 시간을 내서 내원한 사람들이다.
세상이 떠들썩해진 것과는 별개로 한지호를 만난 환자들은 치료를 받는데 집중했다.
한지호 역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진정성 있게 진맥과 처방을 하며 환자들을 대했다.
오전 진료밖에 없는 날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더 빨리 지나간 것 같았다.
마지막 환자가 나가는 것을 보고 1층으로 내려온 한지호가 직원들을 돌아봤다.
“오늘도 다들 수고 많았습니다. 남은 주말 잘 보내고, 월요일에 좋은 얼굴로 봐요.”
“저… 원장님.”
1층 대기실에 한데 모인 직원들을 대표해서 사무장 박우식이 입을 열었다.
내내 2층에 있었던 간호사들과 달리 1층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하나 같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어진 박우식의 말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아침에 찾아온 기자들이 아직까지 병원 건물 바깥에서 진을 치고 있습니다. 몇 번이나 로비로 들어오는 걸 안내 데스크 직원이 제지했습니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고 원장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서 차를 타고 가면 됩니다.”
“기자들 행태로 봐선 지하주차장 출구에서 차를 막아 세울지도 모릅니다.”
“설마 그렇게까지야…….”
“한국 기자들이 괜히 기레기로 불리겠습니까? 독한 기자들은 앞뒤를 안 가리고 막무가내로 들이댑니다, 원장님.”
박우식의 말을 흘려 들을 수 없었다.
그는 비록 망했지만 한 때 잘 나가던 중견 업체의 대표를 역임했었다.
한지호보다 기자들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다이어트 한약 때 찾아왔던 기자들은 친절하고 젠틀한 편이었다.
어쩌면 한지호가 먼저 그들을 맞이해 인터뷰를 해줬기에 부드러웠던 건지도 모른다.
가짜 백수오 파동을 취재하러 찾아온 기자들은 단단히 작심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
한지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직원들부터 퇴근시켰다.
“알겠습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붙잡히면 몇 마디 해주고 말아야죠. 걱정하지 말고 퇴근해요.”
“수고하셨습니다, 원장님.”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간호사들과 직원들이 인사를 했다.
박우식도 마지못해 인사를 하고 다른 직원들과 함께 나갔다.
염려가 되어도 한지호가 괜찮다면 괜찮은 것이다.
그는 위계질서를 확실히 지키는 사람이다.
조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지만, 한지호가 내린 결정에 토를 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직원들을 모두 퇴근시킨 한지호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절대 고민에 빠진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살짝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날도 추운데 몇 시간이나 기다렸다니… 고생한 기자님들에게 미끼라도 좀 던져 드려야겠네.”
원래 한지호는 추가적인 취재 요청에 응할 생각이 없었다.
해야 할 말을 모두 방송에서 다 했고, 근거 역시 빠짐없이 전파를 탔기 때문이다.
굳이 언론과 접촉해 이슈를 확대시켜 봐야 당장 득이 될 게 없었다.
가짜 백수오 사건을 진실게임 양상으로 만들면 안 된다.
팩트에서 밀린 백수오 업체들이 사건을 감정싸움으로 유도시켜 물타기를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영찬 교수와 민시헌 의원실 보좌관의 메시지도 간과할 수 없었다.
한지호는 권력과 손을 잡고 있는 백수오 업체들의 동향을 주시할 작정이었다.
그들의 대응을 보고 난 뒤에 히든 카드를 하나씩 오픈하는 게 효율적인 전략일 것이다.
그러나 판단은 상황에 맞춰 조금씩 변하기 마련이다.
그는 한의원 건물 앞에서 오전 내내 기다린 취재진들을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혼자 서있는 채로 생각을 정리한 한지호가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간 그는 망설이지 않고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부우우웅-
김해수에게 선물 받은 검은색 아우디가 미끈한 차체를 뽐내며 지상으로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박우식의 예상대로 건물 밖에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기자들은 대놓고 자동차의 앞길을 가로막지는 않았다.
대신 지하주차장 출구 옆에 서서 애매하게 진로를 방해했다.
그들 나름대로 룰을 지키면서 취재 압박을 가하는 행태가 제법 노련했다.
물론 한지호가 엑셀을 때려 밟으면 기자들을 지나쳐 금방 사라지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생각을 바꾼 대로 슬쩍 운전석 창문을 내렸다.
지이잉-
창문이 내려가자 간을 보던 기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먹잇감을 노리고 맹렬하게 질주하는 치타처럼 한지호의 자동차 옆에 달라붙은 것이다.
“한 원장님, 어제 방송 한 말씀만 해주세요!”
“가짜 백수오 파동, 정말 확실한 겁니까?”
“한 마디만 부탁드립니다, 한지호 원장님-!”
무작정 한 마디를 요구하는 기자들의 외침이 절규처럼 울려 퍼졌다.
차를 타고 나왔다는 건 정식 취재에 응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베테랑 기자들은 한지호가 창문을 내린 틈에 단 한 문장이라도 건지기를 원했다.
정식 취재는 아니라도 한지호의 육성을 따가면 충분히 후속 기사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단어만 잘못 내뱉어도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수십 개의 기사를 만드는 게 한국 기자들의 특성이다.
괜히 기레기라는 오명이 붙은 게 아니었다.
한지호는 열린 창문 사이로 들이밀어진 기자들의 녹음기와 스마트 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을 걸고, 원화 한의원의 명예를 걸고 지난 방송에서 밝힌 모든 내용이 사실임을 알려드립니다. 저는 오직 국민의 건강과 알 권리만을 생각하며 방송에 임하고 있습니다. 부당한 외압에도 절대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오늘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말을 마친 한지호가 창문을 닫았다.
아쉬움을 느낀 기자들이 자동차 뒤로 따라 붙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미 확실한 미끼를 던졌다.
눈치 빠른 베테랑 기자들은 ‘부당한 외압’이라는 단어를 확실히 감지했을 것이다.
그만큼 기자들에게 자극적으로 팍팍 꽂히는 단어도 몇 없을 터.
한지호는 정확하게 기자들이 원하는 단어로 헤드라인을 짤 수 있게 미끼를 푼 셈이었다.
기자라면 베테랑이건 신참이건 물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먹음직스런 미끼였다.
한지호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핸들을 잡고 차를 몰았다.
아무리 많은 일들이 폭풍처럼 몰아쳐도 사람은 먹고, 쉬고, 일을 해야 한다.
오늘 일은 마쳤고, 점심은 사랑하는 연인과 만나 해결할 계획이었다.
그가 모는 아우디 A5는 강남을 가로질러 이지은의 녹음실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는 이지은의 소속사에서도 둘의 관계를 감지했다.
아무리 소속사의 힘이 강해도 신인이 아니라 독보적 여자 솔로 가수인 이지은의 사생활을 강제로 컨트롤 할 수는 없다.
다만 언론에 소문이 새어나가지 않게 조심을 시킬 따름이었다.
그 덕에 오히려 둘의 만남은 이전보다 더욱 편해졌다.
소속사나 매니저들을 속이려 애쓰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한지호는 이지은의 큰 눈망울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가짜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자신을 진짜로 위해주는 속 깊은 여자,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은 언제나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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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은 한지호가 던진 미끼를 놓치지 않았다.
이지은과 녹음실 근처에서 비밀스러운 데이트를 마치고 귀가하니 미끼를 문 기자들의 기사가 포털 메인을 장식하고 있었다.
- 원화 한의원 한지호 원장, 가짜 백수오 사건에서 외압이 있음을 밝혀! -
- 한지호 원장의 심경 토로, 국민 건강을 위했지만 부당한 외압이 있다! -
몇 개의 기사만 훑어봐도 자극적이기 짝이 없었다.
뉴스를 접하는 국민들의 마음에 뜨거운 불을 붙이기 딱 좋은 헤드라인이었다.
한지호는 자신이 의도한 대로 게임이 진행되고 있음을 느꼈다.
마음을 바꿔 기자들에게 짧지만 강렬한 미끼를 준 게 유효하게 먹힌 것이다.
인터넷 여론을 주도하는 베스트 댓글도 비분강개한 목소리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국민의 건강 상식을 위해 진실을 고발한 한지호에게 누가 외압을 넣느냐는 질문부터 무턱대고 우리나라의 썩은 고위층을 욕하는 댓글까지 다양하지만 일관된 반응이었다.
신사동 오피스텔 아파트의 서재에서 컴퓨터로 기사들을 확인한 한지호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미 흐름을 탔다.
따지고 보면 <건강백서, 진짜! 가짜!>가 방송되고 아직 24시간도 채 흐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전체가 가짜 백수오 파동으로 들끓었고, 언론과 여론 모두 동시에 난리가 났다.
이런 상황에서 내추럴 코리텍이나 여타 업체들이 해명을 하긴 무척 힘들 것이다.
깔끔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면 모르되 어설프게 변명을 하다간 더 큰 비난을 받을 게 뻔했다.
하루 만에 태풍처럼 한국을 휩쓴 이슈 때문에 업체의 경영진도 고심하는 게 분명했다.
아직까지 내추럴 코리텍 등에서 아무런 공식 대응을 내놓지 않는다는 게 그 증거였다.
아마 경영진과 임원들이 비상 소집되어 사태 해결을 위해 답 없는 회의를 이어가고 있을 것이다.
데드 라인은 오늘 저녁이다.
24시간 안에 여론을 진정시킬 사과문이나 해명이 나와야 한다.
시기를 놓쳐 주말이 지나가면 한지호의 주장이 사실로 굳어지게 된다.
이미 대다수의 국민들 사이에선 <건강백서, 진짜! 가짜!>를 통한 한지호의 주장이 진실로 받아들여진 분위기였다.
“1시간 정도 남았네.”
시계를 본 한지호가 혼잣말을 읊조렸다.
이지은과 데이트를 하며 이른 저녁을 챙겨 먹었다.
이제 1시간 뒤면 어젯밤 <건강백서, 진짜! 가짜!>가 방송되고 딱 24시간이 지나게 된다.
과연 1시간 안에 유의미한 해명이나 액션이 나올까.
지난 하루 내내 고민을 거듭했을 관련 업체와 권력자들은 어떤 답안지를 내놓을까.
걱정이 되면서도 묘한 기대감이 한지호를 사로잡았다.
내공이 쌓인 단전이 간질간질 거리는 게 꼭 바이킹을 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우웅- 우우웅-
그때 컴퓨터 모니터 옆에 올려둔 스마트 폰이 울렸다.
한지호는 망설이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그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오른팔, 조기운의 전화였기 때문이다.
“그래, 기운아.”
“형님, 지금 막 영종도에 도착했습니다.”
“이번에도 믿는다. 알지?”
“네. 잠시 후에는 인천시장과 지역 유지들이 모이는 술자리에 참석합니다. 플래티넘 홀딩스 유건영 팀장님의 도움으로 연이 닿았습니다.”
“편안한 사석에서 술이 몇 잔 들어가면 속 깊은 이야기가 나오기 마련이지. 특별히 눈에 띌 필요는 없고, 카지노 개발과 관련한 정보만 집중적으로 수집해둬.”
“잘 해내겠습니다.”
“난 당분간 가짜 백수오 일로 바빠질 것 같다. 영종도 쪽 탐사는 너에게 맡길게.”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한지호는 만족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조기운은 괄목할 속도로 성장하며 엄청난 인맥을 능숙하게 컨트롤하는 인재가 돼 있었다.
한지호가 만든 청우단을 여의도와 광화문 일대의 고객들에게 판매하며 막강한 인맥을 제 것으로 흡수한 것이다.
유건영의 도움을 받아 인천시장이 참석하는 술자리에 초대 받은 것도 조기운의 수완이었다.
한지호는 잘린 손가락에서 환상통을 느끼는 마창우를 치료하는 중이었고, 그 대가로 거액의 현금과 별도의 사업 투자를 제의 받았다.
영종도에 들어설 내국인 카지노가 현실화되면 그야말로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될 것이다.
전설적 주먹인 마창우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러나 돌 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야 한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일 수록 꼭꼭 씹어 삼켜야 체하지 않는 법.
한지호는 조기운을 보내 영종도 카지노 사업의 실체를 파악하려 했다.
백수오 사건을 처리하면서 동시에 카지노 투자도 미리 준비를 해두는 것이다.
우웅!
그때 스마트 폰이 다시 짧게 울렸다.
이번에는 전화가 아닌 메시지였다.
한지호는 폰 화면에 떠오른 글자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은 피할 수 없는 메시지였다.
- 한 원장님, 의원님께서 오늘 늦게라도 뵙기를 원하십니다. 답을 주시지 않으면 의원님께서 많이 불쾌해 하실 것 같습니다. -
민시헌 의원실의 보좌관이 보낸 메시지였다.
한지호는 어떻게든 한 번은 부딪치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민시헌은 계속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보좌관의 은근한 협박성 멘트에 겁을 먹지는 않았다.
다만 이왕 부딪칠 거면 상대가 확실한 대응을 하기 전에 빨리 만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답장을 보냈다.
- 시간과 장소를 정해주면 바로 나가겠습니다. -
메시지를 보낸 한지호는 머릿속을 여러 개로 쪼개어 생각을 분할했다.
한 번에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두뇌를 100% 가까이 쓰는 것도 전생을 각성한 이후 얻은 특별한 능력이다.
오금희의 내공이 머리의 백회혈을 뚫어버리고 난 후 지력(知力)이 놀랍게 상승한 것 같았다.
원래도 불우한 환경에서 한의대에 합격할 정도로 머리가 좋았던 한지호는 남들이 따라잡기 힘든 지력의 소유자가 됐다.
지금 그는 머릿속으로 영종도의 카지노 개발, 민시헌과의 만남, 김영찬 교수와 내추럴 코리텍의 대응이라는 세 가지 문제의 시나리오를 동시에 써내려가고 있었다.
생각이 깊어지려는 찰나, 다시 메시지가 왔다.
- 의원님께서 한 원장님의 자택으로 직접 가신다고 합니다. 바로 지금. -
보좌관의 문자였다.
국회의원 민시헌이 신사동 오피스텔 아파트로 오고 있다.
사소하지만 한지호의 예상 시나리오와는 다른 행동이었다.
그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앞서 결심했던 것처럼 피하거나 미적거릴 생각은 눈꼽 만큼도 없었다.
한지호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일렁거리는 것 같았다.